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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옌T Sep 22. 2021

집중하지 못하는 그대에게

3인칭 욕구인정시점


 여러분은 지금 공부를 하려고 책상에 앉았지만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는다. 왜일까.

 취준생 시절 나는 다양한 회사에 아주 잠깐씩 몸을 담았었는데 한 기업에 나를 포함 4명의 신입사원이 입사를 했다. 그중 경력직으로 이직을 한 A오빠가 매일 아침 우리 팀 전체에게 커피를 쐈다. 처음엔 공짜 커피에 신이 났지만 우리와 급여 사정이 다를 리 없는 오빠가 쏘는 커피가 점점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커피를 마다하자 그 오빠는


“내가 일하다가 실수하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탁할 수 있게 미리 뇌물 쏘는 거야.”


라고 말했고 이 말에 B선배가 굉장히 크게 화를 냈다. 진심이든 아니든 그런 의도가 있는 커피라면 더더욱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A오빠의 호의도 너무 과했고, B선배의 분노도 투머치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중간에서 매우 곤란했는데 두 사람에게는 각자 사연이 있었다.


 A오빠는 어렸을 적 부모님의 이혼과 어머니의 재혼으로 배다른 동생이 둘이나 생겼고 새아버지와 동생들과 잘 지내지 못했기 때문에 19살 때 독립을 해서 서른이 넘은 당시까지 혼자의 삶에 익숙해진 사람이었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늘 혼자라고 느꼈기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잘 몰랐고 단체 생활을 시작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따돌리거나 혼자가 된다고 했다. 새 회사에서는 동료들과 잘 지내고 싶었기 때문에 선택한 방법이 매일 아침 커피를 돌려서 호의를 사는 것이었다. 이런 사연을 알게 된 우리는 오빠의 결핍을 감싸고 이해해주자고 했지만 B선배는 우리의 반응에 도리어 더 화를 냈다. 결국 일을 잘 해낼 생각이나 실수를 책임질 생각이 아니라 일을 어떻게 해놓아도 잘 봐달라는 의도인 것이 괘씸하고 무책임하다며 그의 지난 환경은 업무와 무관하며 얻어먹은 커피가 면죄부로 작용할 수도 없다고 했다.


 B선배의 집안에는 골칫거리 친언니가 있는데 외모 강박이 심한 언니는 성형과 사치로 매달 월급을 다 탕진하고 부모님에게 용돈과 월세를 따로 받아 살고 있다고 했다. 선배의 언니는 외모 콤플렉스로 인해 폭식과 구토를 반복하는 섭식장애를 앓고 있었고 이 사실 때문에 부모님은 언니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못하고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고 있었다. 선배는 이런 언니와 언니를 감싸고 돌기만 하는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언니의 주장에 따르면 대학시절 일부 학생들의 험담을 듣고 외모 트라우마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살다 보면 누구나 험담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그런 말을 들은 모두가 섭식장애가 오는 것은 아니며 개선할 의지가 없는 자신의 상황을 합리화하는 핑계일 뿐이라고 했다. 따라서 A오빠의 사연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이혼 재혼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이 모두 다 관계에 결핍이 있거나 일에 무책임한 성향을 보이는 것은 아니라며 그의 사연에 동정표를 보내는 것 자체가 같은 사연을 가졌음에도 자기 힘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다. 결국 같은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은 자신의 선택이므로 동정하거나 이해해주고 싶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A오빠와 업무가 겹치기 때문에 그의 업무처리가 잘못되면 책임 질 사람은 B선배였고 실제로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회사는 금방 그만두게 되었지만 “같은 상황에 있는 모두가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다”는 B선배의 주장은 오랫동안 내 가치관에 영향을 끼쳤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대처하는 수험생들을 보면 이 에피소드가 자주 떠오른다. 살아온 환경과 시험을 준비하는 계기는 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현재는 같은 상황이다. 시험 합격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장기간 많은 것을 참고 인내하는 상황 말이다. 여기까지는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간을 보내는 태도는 사뭇 다르다. 누군가는 몰입을 하고 누군가는 하품을 한다. 같은 상황에 있는 모두가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왜 누군가는 다른 이들보다 이 상황을 더 잘 극복해내는 걸까.

 자, 다시 여러분은 공부를 하려고 책상에 앉았지만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는다. 왜일까. 아마도 텔레비전과 핸드폰이 유혹의 손길을 내밀거나, 시계 초침 소리가 귓가를 때리거나, 좀 전에 먹은 식사가 부대껴서, 아니면 외계인이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집중이 안 되는 요인을 쓰라고 하면 백 가지도 넘게 쓸 수 있지만 독자들이 질릴까 봐 이만 줄인다. 백 가지든 천 가지든 공통점은 바로 그것들이 전부 외부요인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남 탓이다.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에는 외부요인과 내부 계기가 있는데 우리는 대부분 외부요인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외부요인은 대부분 우리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내부 계기에 집중했을 때 비로소 이 문제를 더 빨리 극복해낼 수 있다.


 내부 계기는 바로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다. 이 불편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우리의 집중을 방해한다. 그렇다면 불편함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 싫어하는 일을 갑자기 좋아하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시다시피 그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타고난 욕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기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인간에게 식욕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어느 정도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살아간다. 한 번 끼니를 거르면 다음 끼니에서 과식을 하게 되는 경험이 한 번씩은 있을 것이다. 욕구를 거부하려 들면 도리어 욕구를 되새기다가 결국 항복하는 악순환에 빠지고 이로 인해 원치 않는 행동을 저지르기 쉽다. 즉 욕구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충족시켜야 악순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욕구를 조절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밥시간이 되어서 배가 고프다는 사람에게 욕구를 채운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어느 수준 이상으로 욕구를 채우려고 하면 ‘식욕’은 ‘식탐’이라는 단어로 치환된다.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의 배만 채운다거나 때와 장소에 구분 없이 식사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비난을 받는 것은 둘째치고 삶 자체가 욕구에 잠식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구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잠식하지 않도록 조절이 필요하다. 어떤 욕구는 그것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만 해도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하다.


 하기 싫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짓을 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집중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가능하다면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하지만 욕구를 인정하되 잠식당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의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육체 바깥으로 빠져나온 영혼이 되어 나의 모습을 바라보아라. 나 자신을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1인칭 시점에서는 불편함에서 도피하고 싶은 욕구에 스르르 빠져버리기 쉽지만 3인칭 시점에서는 객관적으로 내 모습을 바라보고 불편함과 어느 정도 타협이 가능할 것이다. 결국 같은 상황에서 모두가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 이유는 내부 계기에 있다.


 고로 누구나 바꿀 수 있다.


영화 <소울>에서 주인공 ‘조’와 그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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