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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Feb 13. 2020

나는 두세 번째 파도를 잡는 사람

나의 사랑하는, 무너지는 세계




 가만 보면 성격이 묻어 난다. 서핑을 할 때도.


 파도는 대개 세트로 온다. 서핑에서의 세트란 서너  정도 되는 파도의 묶음 단위를 뜻하는데, 그날 파도의 높이보다 조금  크고 세게 온다. 서핑을   좋은 파도를 잡는다는   세트  하나의 파도를 잡는다는  뜻한다. 세트가 오는 주기는 일정하지 않아서 가끔은   넘게 기다려야  때도 있다.


 저 멀리서 세트가 온다는 걸 알아챘을 때 서퍼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세트의 첫 번째 파도를 잡기 위해 바빠지는 사람과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를 기다리며 이번 파도를 타기 좋은 자리로 조금씩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한 번도 첫 번째 파도를 위해 패들링을 한 적이 없다.






 이는 성격 탓인 듯한다. 두 번 세 번  혹은 가능한 많이 확인하려 드는 성격, 겁이 많아서 의심하고 다시 다짐하고 또 확인을 한 다음에야 조금씩 마음이 놓이는, 그래서 섣불리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마음가짐을 나는 서핑을 하면서까지 지고 있는 게다. 집어던지고 싶은데 정말 이건 아직 고치기 어렵다. 이런 비약까지는 하기 싫지만 인생에 비추어 한 번 만에 잘 풀린 일이 없었던 이유까지 구차하게 곁들여 본다. 사실은 멋진 첫 번째 파도를 위해 힘차게 패들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멋있고 부럽다는 감정을 느끼면서도 애써 '신 포도를 바라보는 여우의 마음'을 곁에 둔다.


 두세 번째 파도를 타고 모두들 가버린 뒤에 가끔은 정말 멋진 파도가 하나 더 올 때가 있다. 나는 겁쟁이들을 위해 서핑의 신이 선물하는 보너스 파도라고 부른다. 두세 번째 파도도 잡지 못하고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다가 조금 얼빠진 표정으로 맞닥뜨리곤 했다. 그럴 땐 바짝 오기가 생겨서 바보 천치 멍청이를 속으로 외치고 손바닥으로 푹푹 바다를 찔러 가며 패들링을 한다. 뭍에서는 큰 겁쟁이인 내가 바다 위에서 작은 겁쟁이가 되는 서핑의 위대한 순간이다. 점점 파도가 서프보드 아래에 붙는다. 속도가 났을 때 나는 보드를 딛고 일어나 파도와 함께 걷기 시작한다. 짜릿하다. 시간을 붙드는 게 이런 걸까.






 내가 아무리 떠들어 봤자 내가 두세 번째 파도를 잡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바다에 닿는 순간 무의미하다. 그래서 좋다. 비록 서핑 실력은 제자리걸음이지만 세상에 굳이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자기 수련 같은 스포츠가 내 취미라는 사실을 되새김할 때 행복해진다. 자연을 읽는 멋진 눈빛과 파도와 하나가 되어 그 위대한 리듬 속에서 잠시나마 존재하는 일, 바다에 뛰어들 이유는 이것 하나면 오늘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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