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기

-쿠알라룸푸르, 말라카 여행

by 한정선

나이가 들수록 해외여행이 힘들어진다.

체력적인 이유야 당연한 것이니 차치하고라도, 내가 힘든 이유는 여행의 방법 때문이다.

요즘과 달리 해외여행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던 예전에는 패키지여행을 주로 했었다.

학교 수업 시간표처럼 정교히 짜인 일정표, 자유여행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

눈과 귀만 열어두면 먹고 자고 보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표방하는 것 자체로는 꿈같은 여행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해외여행이 보편화, 대중화되면서, 패키지 여행은 본질을 벗어나 점점 상업적으로 변질되어갔다.

꽉 짜인 일정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강행군에, 한 눈 팔면 야단맞는 초등학생처럼 가이드의 꽁무니를 따라 줄맞춰 가야 하고, 이동 중인 차 안에서조차 쉬지 못하고 들어야 했던 마이크 소리, 취향과 상관없는 음악듣기, 비디오 상영, 무엇보다 횡포에 가까운 가이드의 쇼핑, 옵션 강요.

어떤 가이드를 만나는가에 따라 여행의 절반이 좌우될 정도이다 보니 잠시나마 자유를 느끼러 떠난 여행이 또 다른 구속과 스트레스의 장이 되기도 했다.

패키지는 싫고, 자유여행은 자신이 없고, 이래저래 해외여행은 난공불락의 성, 밤하늘의 별처럼 아득하기만 할 때, 동생 모녀의 여행에 얼른 숟가락을 얹었다.

이름하여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기’.



쿠알라룸푸르, 말라카.

호텔, 항공, 여행지, 오랜만에 남이 차려주는 밥상을

받는 기분이 얼마나 황홀하던지.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 여행의 컨셉은 ‘따로 또 같이’.

숙소와 식사는 같이 하고, 그 외는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쉬든지, 관광을 하든지, 따라가든지, 혼자 가든지.

결론적으로 호기심 많은 모녀는 열심히 보러 다니고

관광지보다 동네를 좋아하는 나는 어슬렁거리며

여기저기 기웃기웃, 그림도 그리고.



말라카, 비, 아쉬움..

말라카를 떠나는 날. 야속하게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더위를 핑계 삼아 조금 시원한 새벽에 그리리라 이틀 내내

미뤄놓았던 스케치 도구를 챙겨 로비로 내려왔건만

우기의 태양이 행운인 줄 모르고 덥다고 불평만 하는

나를 벌주듯,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발목을 잡는다.

내일도 오늘 같으리라고,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이 우매함에 후회와 자책이 더해진다.

비에 젖은 강변 풍경. 기약할 수 없는 해후.

말라카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소나기, 스콜..

하늘이 뚫린 듯 내려 꽂히는 물 화살들.

그 세기만큼 땅을 박차고 튀어 오르는 물방울들.

통곡을 하는 듯, 춤을 추는 듯.

막막함. 먹먹함. 외로움.

그 속에 슬며시 끼어드는 자유로움.

이렇게 눈앞에서 떨어지는 비를 본 것이 언제이었을까.

내 머릿속 비의 이미지는 고층아파트 창밖으로

떨어지던 그림처럼 조용한 비의 중간 부분.

깜깜한 새벽. 불 꺼진 호스텔 로비.

모든 감각은 빗소리에 묻히고 오직 눈과 귀만이

빗소리와 비의 춤을 마주한다.

세상에는 오직 비와 나뿐.

그 경계마저 희미해질 때 하나, 둘 가로등이 꺼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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