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한 기억 속의 유년기와 초, 중, 고를 다니고, 대학 진학을 위해 미련 없이 떠나온 곳,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멀리 있다가, 세상살이가 팍팍하다 느껴질때 잠깐씩 생각의 수면 위에 떠 올랐다 금세 사라지는 곳이었다.
그 후, 강산이 몇 번 바뀌는 시간이 흐르고 부모님과 동생들도 서울로 올라오면셔,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았던 고향은 기억 속에서조차 까마득히 멀어져 갔다. 그러기를 10여 년, 불현듯 부산이 생각났고, 언제나 순위 밖으로 밀려나 있던 부산에 대한 미안함, 궁금함, 그 무엇보다 그리움. 복합적인 감정으로 여행가방을 쌌다.
귀향도 방문도 아닌 고향 여행, 예전에 부모님과 동생들, 친구들을 만나러 갈때는 현지인처럼 당당했지만,
이제 모두 떠나버린 고향에서 나는 갈 곳 없는 나그네가 되었다.
우리 집 (지금도 대문만 열고 들어가면 될 것 같은), 우리 동네를 눈앞에 두고,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이 느낌.
도시의 화려한 불빛에 감탄하다가 계속 보고 있으면 조금 슬퍼지는 느낌.
고향을 여행하는 느낌은 이런 것일까?
사실 그 속에 있을 때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했으나 때로는 너무 낯선 가족처럼.
관계도, 풍경도, 생각도.. 조금 떨어져 있을 때 잘 보인다.
그곳에서 일어나고 보고 들었던, 좋았던 일, 때로는 힘들고 슬펐던 일. 그곳의 공기, 사람들, 만남과 헤어짐, 나의 20년 치 인생이 시간이라는 포장지에 고스란히 싸여 있다가, 여행으로 인해 폭우에 강 밑바닥이 헤집어지듯 풀어헤쳐져 이리저리 부유하고 있었다.
부산 여행은 기억 여행이다.
머릿속에 맴도는 기억들. 실제인지, 허구인지도 모르는 희미한 유아기의 기억들.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유년기, 초 중 고의 기억들. 그 집, 그 골목, 그 학교.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길과 집, 학교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어느 작가의 말이 무색하리만치 내 예감은 빗나갔다.
초등학교를 오가던 산길은 없어지고 흙길은 깨끗이 포장되고,
수많은 학생들로 붐비던 중학교는 이제 1,2, 3학년 통틀어 6 학급으로 줄어
학교는 마치 조금 큰 주택처럼 보였다. 정원 손질을 하고 계시던 수위 아저씨의 설명에 의해
주변의 여러학교가 없어지고(이주와 출산률 감소) 그나마 남아있는 학교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동네 또한 큰 도로만 남아있을 뿐 옛집들은 사라지거나 신축되고,
학교를 마치고 늦은 밤 집에 갈 때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아 온 몸이
긴장되던 으슥하고 굽이진, 때때로 꿈속에도 나타나던 끊어질 듯 이어지던 골목길,
희미하던 가로등, 먼 길에 쉬어가던 길모퉁이 가게, 그 옆 하천도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내 머릿속의 풍경들이 실재하리라는 일말의 기대감은 그야말로 억지일 뿐이었다.
40여년의 시차는 전생만큼 아득하기만 한데 나는 영화에나 있을 법한 시간 여행을 꿈꿨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