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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일기 Nov 20. 2018

몽골의 도로 위에 서 본 적 있나요?

저희 저기 도로 위에서 세워주세요!

게르에서의 밤은 꽤나 혹독한 편이었다. 밤새 춥다가 어느 순간 또 덥기를 반복하던 탓에 잠을 푹 잘 수가 없었다. 그 덕분일까. 오전에 눈을 뜨니 7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일찍 잠들었는데도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며 침낭에서 슬금슬금 벗어났다. 게르의 천장을 때리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비는 이미 그친 지 오래였다.


여전히 흐리긴 했지만 새 하루의 시작인지라 찌뿌둥한 몸을 풀며 기분 좋게 밖으로 나왔다. 멀리 구름이 보이고, 그 구름에선 마치 햇살이 내리듯 회색 빗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고운 밀가루를 채에 넣고 털어대는 모습과도 비슷했다.



우리가 묵었던 게르의 옆 게르에는 우리와 모든 일정이 같은 예비 부부 한 팀이 머무르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들과도 게르와 자동차만 따로 쓰는 일행이 되어 함께하기로 했다. 이 부부와의 인연도 조금 독특했던 것이, 나와인천공항에서부터 내내 함께했던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체크인을 하기 위해 줄을 서며 대화를 잠깐 나누었던 것을 시작으로 비행기 대기, 여행사의 픽업 자동차로 이동, 아침 식사와 나머지 일정을 모두 함께한 사이. 그래서일까. 대화를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친숙했다.


어쨌든 우리는 아침부터 꽤나 바빴다. 뜨뜻한 국물로 밤새 차가워진 속을 달래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의 손에는 카메라가 달랑거렸다. 이게 바로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신호가 아닐까. 모든 게 새롭고 모든 게 신기한 시기, 그래서 내 앞에 펼쳐진 풍경들을 몽땅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 말이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그렇게 찬바람이 불어오는 게르의 바깥, 별 볼 것도 없는 넓은 초원 위에서 서로가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그리고 그런 서로의 모습을 구경하며 한참을 서성였다.


손에 들린 필름 카메라의 철컥 소리가 낯설면서도 정겹다. 새로운 곳, 새로운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카메라까지. 한쪽에선 가이드 언니들이 바쁘게 출발 준비를 하고, 또 한쪽에선 일행들이 모두 나와 줄줄이 소시지마냥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이 이상하면서도 퍽 재미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이동했다. 사실 몽골 여행은 이동으로 시작해서 이동으로 끝난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말 오랜 시간동안 차를 타고 이동해야만 한다. 그 이동이 지겹다 싶을 때쯤이면 거짓말처럼 멋있는 풍경들이 나타나곤 했는데, 우리는 그때마다 차를 잠깐 세워달라고 가이드 언니에게 외치곤 했었다.


비가 내리던 전날과는 달리 날씨가 맑아지면서 모든 풍경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새로 짠 물감을 풍경 위에 덧칠하는 것처럼, 혹은 그림 위를 덮은 먼지를 쓸어낸 것처럼 날은 그렇게 맑아졌고 날이 맑아지는 만큼 우리의 마음도 개운해졌다. 푸르게 갠 하늘 아래, 쭉 뻗은 도로를 발견한 우리는 또다시 외칠 수밖에 없었다.


“언니, 저희 저기 도로 위에서 세워주세요!”



앞뒤로 지나가는 차는 단 한 대도 없었고, 그렇게 몽골의 도로는 우리들을 위한 세트장이 되었다. 우리는 앉고, 뛰고, 뒤돌아서며 온갖 포즈를 지어댔고 개중 절반은 망한 사진, 남은 것의 절반은 구도가 이상한 사진, 그리고 그 반의 반 정도가 진짜 잘 나온 사진으로 남았다. 어딘지도 모를 도로의 모습이 우리의 여행 한 귀퉁이를 예쁘게 물들였다.


도로의 어딘가에서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도 몽골이라는 나라가 가지는 매력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이렇게 쭉 뻗은 도로에, 앞뒤로 단 한 대도 오지 않는 자동차에, 그 뒤로 넓게 펼쳐진 초원과 그것보다 더 넓은 하늘까지.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즐길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에어컨 대신 우리의 운전기사님인 토모루의 우산을 빌려 창문에 걸쳐놓으니 바람이 숭숭 잘도 들어온다. 푸르공 안을 시원하게 감싸는 몽골의 바람이 몰고 온 오후의 꿀맛 같은 낮잠. 덜커덩거리는 차체가 불편할 법도 한데, 참 잘도 잤다. 푹 잤다. 아주 개운하게 잤다.


다시 깨어났을 땐 사방이 온통 푸릇푸릇했다. 켜켜이 쌓인 구름이 멀리까지 보인다. 한국 어디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아무것도 없는 이 풍경이 밋밋하기보다는 충격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하늘 위에 구름으로 쌓기 놀이를 하고 있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 다가왔기에 초원 위에 차를 세웠다.


차가 멈추어 선 이후 우리 모두는 우르르 바깥으로 나갔다. 물론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었다. 30분 정도 걸리니 가서 놀고 있으라는 가이드 언니들의 말에, 몽골에 왔다면 무조건 해야 할 것 중 하나인 ‘푸르공 위에서 사진 찍기’를 시도하며 신나게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늘 그렇게 자유로웠다. 차 위에 올라가고 싶을 땐 그렇게 했고, 초원 위를 뛰어다니고 싶거든 또 그렇게 했다. 그러다가 문득 춤을 추고 싶어지거든 아무런 반주도 없는 초원 위에서 드론 하나를 날려놓고 신나게 춤을 췄다. 괴상하고 이상한 춤들이었지만 그냥 그 모든 순간이 즐거웠다.


우리가 만난 지 이틀도 안 된 사이라는 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지금 바로 이 순간, 놓치면 후회할 수밖에 없는 풍경과 분위기가 바로 앞에 존재한다는 것. 그뿐이다. 우리가 함께한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앞으로 함께할 순간들은 더더욱 아름다울 것이라

는 확신이 들었다.



이내 점심이 준비되었다는 외침이 들려왔다. 빨갛고 매콤한 국물이 가득 든 닭볶음탕을 접시 위로 한가득 옮겨 담았다. 든든하게 배를 채웠고 그것보다 더 든든하게 마음을 채웠다. 요 근래 이렇게 많이 웃어본 적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즐거운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플라스틱 그릇을 손에 쥐고 음식을 입가로 가지고 가던 순간, 찰칵 하는 셔터 음이 들려온다. 우리의 모든 순간은 그렇게 사진 속에, 영상 속에, 그리고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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