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던 H에게

10.1.7 시드니 근교 블루마운틴에서

by 허용운


H야! 우리가 함께했던 호주 여행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뭔지 아니? 오페라 하우스나 하버브리지도 아니고 코알라나 캥거루도 아니야. 바로 하얀 안개밖에 보이지 않던 블루마운틴이야.



난 그때 너무 속상했어. 비싼 돈 내고 투어 신청해서 갔던 곳인데 산은 안개에 가려져서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 유칼립투스 잎에서 나오는 기름이 햇빛을 산란시켜 산 전체가 파랗게 보인다던데. 높게 솟은 세 자매 봉이 있다던데. 내가 아쉬워하고 있는데 옆에서 네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어.

"마음의 눈으로 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속으로 생각했어.

'속 뒤집어지는 소리 하고 있네.'


H야! 마음이 힘든 어떤 분과 대화를 한 적이 있어. 그분을 A라고 할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A의 마음은 산을 뒤덮은 회색 안개처럼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어. 나는 그 가려진 내부를 보고 싶었어. 희망의 봉우리를 찾아내고 싶었어. 나는 A에게 마음속에 혹시 다른 생각이나 감정이 있는지 한 번 찾아보자고 제안했어. 그랬더니 A는 냉담하게 대답했어.

"왜 그래야 하죠?"

우리는 이후 긴 침묵의 시간을 가졌어. A를 보내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했어. 나는 A의 마음 안갯속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거야. 사라지고 싶다는 그 마음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거야. 다음번에 A를 만났을 땐 A의 죽고 싶은 마음에 대해 소중하게 물었어.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봤어. 그랬더니 A는 자연스레 또 다른 색의 마음도 하나씩 보여줬어. 더 나아가 A는 자기 자신도 몰랐던 숨겨진 마음까지 찾아내고 느꼈어.


H야! 지금 생각하니 그때 너의 그 말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들 정도로 탁월하다고 느껴져. 안개를 벗은 산의 모습이 궁금했다면 산에서 내려와서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이라도 찾아봤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어. 우리에게 있어서 블루마운틴은 우리를 뒤덮은 흰 안개와 우리가 디뎠던 암갈색의 바위뿐이었어. 게다가 그때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지금에야 마음의 눈으로 보여. 우리의 기대를 실은 탄광 열차, 전망대에 허망하게 놓여있던 벤치, 안개 사이로 이따금씩 보였던 야속한 가지각색의 들꽃, 아쉬운 산책길, 내려오며 다시 신나게 웃고 떠들던 우리의 모습. 마음의 눈에 보이는 것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네.


19.12.31

너의 통찰력에 감탄하며, 동기가.



(호주의 산이 불타고 있다는 소식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비통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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