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적한 마지막 날을 함께 보낸 B에게
09.12.31 멜버른 플린더스 역에서
B야! 이제 곧 올해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어. '마지막 날'이라고 하면 우리가 함께했던 2009년의 마지막 날이 제일 먼저 떠올라. 처음 호주 땅에 발을 디딘 한여름의 12월 31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충격의 연속이었어. 기억을 더듬어보자. 아침에 멜버른 공항에서 내렸을 때는 날씨부터 달랐지. 햇빛은 뜨거우면서도 청량한 바람이 불었어. 한국의 후텁지근한 여름과는 너무 달랐어. 시내에 도착했을 때 본 도시 풍경은 정말 깔끔하고 쾌적했어. 어떤 건물은 고풍스럽고 어떤 건물은 세련되고. 우리는 횡단보도에서 한참을 서있었어. 신호등이 계속 빨간 불을 밝히길래. 알고 봤더니 신호등 기둥에 있는 벨을 눌러야 초록불이 켜지는 거야. 그런데 달리던 차가 우리를 보더니 멈춰서. 운전자가 우리 보고 길을 건너라고 손짓했지. 한국에선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었어. 도로에 빵빵거리는 경적 소리가 하나도 안 났지. 호스텔에 도착해서는 상냥한 여직원이 높은 톤의 목소리로 우리를 맞아주었어. 배정받은 방으로 가는데 한 금발의 여자가 아래는 긴 수건으로 가리고 가슴은 팔로 가린 채 맨몸으로 방에 들어가는 거야. 샤워를 막 끝내고 방으로 들어가는 듯했어. 정말 깜짝 놀랐어. 방에 들어가니 어떤 근육질의 남자가 딱 달라붙는 팬티만 입고 누워 있었어. 그 남자는 우리에게 웃으며 인사했지. 와, 정말 대단해. 정말 남 눈치 안 보는 자유로운 곳이구나 생각했어. 호스텔 식당에서는 대낮부터 사람들이 파티를 벌이고 있었고. 목말라서 정수기를 찾았는데 없더라고. 호스텔 직원에게 물이 어딨냐고 물어보니 작은 페트의 물은 1달러, 큰 페트의 물은 2달러에 판다는 거야. 매우 큰 충격이었어. 한국에서는 한 번도 물을 돈 주고 사 먹어 본 적이 없었어. 아깝지만 물을 사서 시내 구경을 나갔지. 큰 광장으로 가려고 두리번거리는데 어떤 아저씨가 먼저 우리에게 다가와서 어디 가냐고 물었어. 광장 이름을 말하니 그 아저씨는 우리에게 이 길을 따라가다가 정거장이 보이면 몇 번 트램을 타고 가야 한다고 알려줬어. 지금이야 한국도 도로명 주소를 쓰지만 예전엔 동 주소를 썼잖아. 도로를 지리 지표로 삼는 방식이 매우 어색했어. 어쨌든 그 아저씨는 참 친절했어. 트램을 탔는데 기사가 지폐는 안 받고 동전만 받는다고 했어. 당황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먼저 다가와서 지폐를 동전으로 바꿔줬어. 아니,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냐고. 광장에서는 악기 연주자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불쇼와 마술쇼도 벌어지고 있었어. 근처 공원에서는 사람들이 돗자리도 안 깔고 잔디에 그냥 누워서 태닝하고 책 읽으면서 수다를 떨고 있었어. 한국 공원에서는 돗자리도 안 깔고 누워서 태닝하고 있으면 동영상 찍혀서 SNS에 변태라고 소문나고 풍기문란죄로 잡혀 갈 거야. 그렇게 도시 한 번 가볍게 둘러보고 저녁 먹을 시간이 됐길래 숙소 근처에 있는 식당을 찾았지. 그런데 열려 있는 식당이 없어! 마트도 가봤는데 닫혀 있어. 연말이라 닫았나 싶었어. 나중에 알고 봤더니 호주에선 5시면 웬만한 가게는 문을 닫는다는 사실. 부러워. 나 오늘 10시간 일했는데. 병원에 있을 땐 연속 72시간도 일해봤어. 아무튼 그렇게 손가락 빨면서 숙소 들어갔지. 나는 짐 다 정리하고 호스텔 복도 벽에 기대어 앉아서 첫날의 감상을 다이어리에 적고 있는데, 어떤 금발 곱슬머리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어. 갑자기 내 다이어리에 자기 사인을 해주겠다네? 술 취한 사람인 것 같았어. 나는 그 사람한테 다이어리를 건네줬지. 그 사람은 뭔가를 적더니 나에게 다이어리를 주며 엄지를 치켜들고 갔어. 그 사람 사인을 봤는데 외계어로 썼는지 못 알아보겠더라고. 욕 썼나, 인종차별당했나 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니 'Hi, Korea. have merry happy travel'이라고 써놨더라고. 기분이 좋았어.
조금 자다가 우리는 밖으로 나갔지. 새해 카운트다운을 외치며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아마 낮에 갔던 광장에서 불꽃놀이를 했을 거야. 트램은 끊겨서 트레인을 타야 했어. 플린더스 역에 내려서 광장까지 걸어가야 했어.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은 거야. 게다가 마침 비도 내렸어. 끈적해졌어. 광장까지는 길이 통제되고 사람들이 플린더스 역 앞에 모두 모여 있었어. 사람들의 다양한 냄새가 비 비린내에 실려 왔어. 그 좁은 공간에서 서로 부딪칠 만한데 호주 사람들은 몸이 닿기만 해도 미안하다고 하더라. 한국이었으면 서로 밀치고 난리도 아니었을 거야. 어느새 카운트다운은 시작됐고 우리는 역 앞 젖은 바닥에 앉아서 숫자를 세었어. 불꽃은 비에 젖어서 아주 귀여웠어. 우리는 축축하게 젖어 흥분한 상태로 비를 맞으며 숙소까지 걸어가기로 했어. 길거리에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어. 나중에 알고 봤더니 흰색이 그날의 드레스코드였다고 하더라. 어쨌든 숙소 가는 길에 흰옷을 입은 어떤 여자가 갑자기 우리 쪽으로 막 달려와서는 W를 꽉 끌어 안았지. 'happy new year!!' 라고 외치면서. 기억나지? W는 황당한 얼굴을 하고 우리는 엄청 웃었잖아. 아, 그런 설레는 새해를 다시 한번 맞아보고 싶다.
B야! 요즘 네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즐겁게 하고 있다고 들었어. 지금 느끼는 감정이 호주에 첫 발을 디뎠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려나. 부러워. 우리 모두 내년은 더 설레는 해가 되길.
2019.12.12
너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는 동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