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용운 Jun 06. 2022

차근차근 정확하게 길을 가는 J에게

2014.8.26 타이베이 스펀 기찻길 위에서

 안녕 J야! 네가 결혼식을 올린지도 벌써 8개월이 지났네. 결혼 생활을 하는 너의 마음이 어떤지 궁금하구나. 남의 삶을 함부로 판단한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너는 인생의 주요한 과업을 누구보다 잘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도 한 번에 가고 졸업할 때 맞춰서 대기업에 취직했지. 일하면서 대학원다녔지. 돈 차곡차곡 모아서 집도 마련하고 결혼도 했지. 착실하고 안정적으로 너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것 같아서, 친구로서 어울리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기특해.



 J야! 너와 함께 갔던 타이베이는 나의 첫 아시아 여행지였어. 돌이켜보면 정말 수월한 여정이었어. 싼 비행기표도 네가 다 알려주고 적당한 숙소도 네가 알아서 예약했지. 질 좋은 가이드북도 네가 찾아냈고 나는 그걸 읽어본 다음에 가고 싶은 곳만 추려서 동선만 짜면 됐어. 나도 여행 계획을 잘 짜는 편인데 너는 한 수 위였어. 그리고 낯선 곳에서 길을 어찌나 그리 잘 찾던지. 그때만 해도 핸드폰 지도 어플을 쓰기보단 가이드북 지도를 더 많이 봤었는데 길치인 나로서는 지도 딱 한 번 보고 곧바로 방향을 찾아내는 네가 신기했어. 덕분에 좋은 추억 갖고 왔어. 도심 출근길의 오토바이 부대, 더위를 견디게 해 준 맛있는 대만 음식과 망고빙수, 소박하고 잔잔한 느낌의 근교 마을들, 오랜 세월 바람이 암석을 깎아 만든 지질공원, 야시장의 거리 음식과 취두부 냄새, 적절한 친절을 베풀어 준 대만 사람들 다 기억나.



 문제는 날씨였어. 너무나 습하고 더웠어. 아침마다 숙소에서 나오며 맞는 햇빛은 너무 날카롭고 뜨거워서 소름이 돋았어. 아침 9시가 마치 오후 2시처럼 느껴졌지. 대화와 카메라 셔터 누르는 횟수는 날이 갈수록 줄었어. 돌아다니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우리가 정한 목적지는 정말 많았지. 목표하는 것을 향해 끊임없이 걷는 너의 여행 스타일 덕분에 우리는 가고자 했던 관광지나 맛집을 다 찾아갈 수 있었어. 하지만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것보다 길을 가는 중간중간 보이는 아름다운 것에 더 마음이 동하는 나에게 이런 여행은 조금 숨 가빴던 것도 사실이야.



 J야! 스펀 마을 기찻길에서 풍등을 날린 것 생각나. 우리는 풍등에 '돈 많이 벌고 가족들 모두 건강하길', '시험과 취업에 합격하자' 따위의 소원을 적어 날려 보냈지. 소원 비는 장소에 가보면 보통 사람들의 소원은 이 두 가지로 귀결되는 것 같아. 돈과 건강. 사랑하는 사람들과 풍족하게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겠지. 하지만 누구나 다 그런 소원만 비니까 오히려 진정성 없어 보였어. 막상 쓸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남들 다 적는 상투적인 소망이나 적자는 마음이었.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난 간절히 그 소망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 되었어. 그리고 그 목표가 얼마나 달성하기 어렵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빌어대는지도 알았어. 부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 더 가지는 만큼 더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지. 그리고 세상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 우린 한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 있어. 모두가 한 목적지를 원하며 가는데 그 길은 너무 더워. 나는 이 목표가 맞는지도, 방향을 잘 잡고 가는지도 모르겠어.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여기저기 한 눈 팔다 보면 그대로 길을 잃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내가 풍등에 진정성 있는 소원을 하나 적었더라고.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아가기' 그때 생각했던 '여행자의 마음'이란 무엇이었을까. 지금 생각하기로는 낯선 경험과 사람들을 기꺼이 접해보겠다는 마음, 누가 뭐라 해도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겠다는 마음, 아름다운 것을 찾아 나서겠다는 마음, 계획에서 어긋나도 괜찮다는 마음 정도인 것 같아.


 우린 수많은 길의 어느 한 점에서 만난 사람들이야. 도착지와 방향이 서로 다를 수 있겠지만 각자의 신념을 잃지 않고 가길 서로 응원하자.


2022.6.5

심각한 길치인 너의 친구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