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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Mar 29. 2024

수정궁과 미래철학의 꿈

수정궁과 미래철학

수정궁과 미래철학의 꿈


1. 수정궁, 찬란한 미래에 대한 착각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 크리스탈 팰리스라는 팀이 있다. 크리스탈 팰리스는 1905년 영국 런던의 남부 지역을 연고로 창단한 축구 클럽이다. 이 팀은 이름은 인근에 있었던 유명한 건축물 크리스탈 팰리스(Crystal Palace, 수정궁)에서 유래되었다.


<1851년 영국만국박람회, 출처: 위키피디아>


수정궁은 1851년 런던 엑스포의 개최를 위해 고안된 유리로 만들어진 철골 구조물이다. 영국의 건축사 조셉 팩스턴(J. Paxton)이 유리와 철제 구조만으로 지어 당시 산업혁명의 최첨단 상징처럼 여겨졌다. 당시 영국은 1849년 열린 프랑스의 파리 박람회를 보고 촉박하게 런던 박람회를 기획했다.


당시 가장 큰 문제는 공사 기간이었다. 기존 건축방식으로는 최소 1년 6개월 정도의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수정궁의 단순한 건축 방식으로는 단 5개월이면 충분했다. 영국은 크리스탈 팰리스를 통해 최첨단 건축술과 화려한 즐길 거리를 선보임으로써 산업혁명의 성과를 전 세계에 과시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수정궁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서울 잠실에 있는 롯데월드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산업혁명의 꿈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오늘날 서울 대도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고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을 상징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런 수정궁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왜 그랬을까?



당신들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수정궁을 믿고 있다. 즉 남몰래 혀를 내밀거나 눈을 흘기거나 하는 따위 짓을 할 수 없는 건물을 믿고 있다. 내가 그 건물을 꺼리는 것은, 그것이 수정으로 되어 있고 영원토록 무너지지 않으며 그 속에선 남몰래 혀를 내밀 수도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지하생활자의 수기, 도스토옙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체르니셰프스키(1828~1889년)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반박으로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모든 사회주의 학설에 대하여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 이념에 의한 사회 통제를 개인의 노예화, 인권유린이라 생각했다. 그는 체르니셰프스키가 차용한 푸리에의 공산 공동사회에 대한 이상을 반어적으로 ‘수정궁’이라 표현했다. 공산주의적 이상이 실현되면 모든 인간의 행동을 예측가능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며, 논리적으로 결정하게 된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나아가 도스토옙스키는 수정궁은 인간의 긍정적인 면만 부각하여 찬란한 미래를 찬양하는 것에 대해 경계했다. 인간은 창조를 사랑하고 새로운 진로를 개척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파괴와 혼돈을 좋아하는 악마적인 성향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본능은 수정궁처럼 투명하기보다는 블랙박스처럼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심연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수정궁이 상징하는 산업혁명의 찬란한 성공을 보면서 그 성공 이면에 숨어 있는 부작용을 간파했던 것이다.


인간은 예측 가능한 것을 통해 안정감을 얻고 싶어 하지만, 자신이 모든 것을 손아귀에 넣게 되면 권태를 느끼게 되는 특이한 성품을 지녔다. 성취의 끝에는 권태가 이어진다. 인간은 성취를 바라는 것 같지만, 실제로 완전한 성취를 좋아하지는 않는 배은망덕한 성품을 지녔다. 수정궁은 2*2=4라는 투명한 공식을 내세웠다면, 도스토옙스키는 2*2=5도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인간은 무사 안일만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때로는 파괴와 혼돈을 추구하기도 하는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하는 자율적인(배은망덕한) 존재라 생각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 사후 공산주의 혁명 과정에서 2*2=5라는 것이 또 다른 공식이 되어 학문을 탄압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단순한 공식의 문제가 아니다. 2*2=4 이든 2*2=5 이든 어느 하나만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이다.


결과적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주장이 옳았다. 증기 기관의 발명으로 촉발된 산업혁명은 공장의 기계화, 자동화를 통해 생산성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켰다. 이와 더불어 인류는 더 이상 힘들게 노동하지 않아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사회가 곧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초기 산업 혁명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문제시되었던 것은 가혹한 노동 환경이다.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하는 데 비해, 당시 영아 사망률이 조금씩 줄어갔다. 인구는 매년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인구가 늘고 도시화가 가속화되면서 노동 공급은 급속하게 증가했다. 이로써 부르주아들이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을 손쉽게 착취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당시에는 노동자들의 참정권이 없었고 자유주의적 정책 기조로 정부와 의회는 부르주아들의 이익을 대변했고 관련 법 제정이 미비했다. 제대로 된 근로시간도 정해지지 않은 채 많은 노동자들이 살인적인 과로에 시달렸다. 어린이들도 만 7세부터 면직 산업에 동원되어 학대를 받으며 일하다 요절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이다.


2. 인간 특성에 대한 오해


칼 융은 그의 책 ‘현재와 미래’에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첨예하게 냉전을 벌이고 있는 이유에 대해 사람들이 인간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즉, 사람은 내면에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중적인 존재인데 이들 이데올로기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만 긍정한다든지, 인간의 자유보다는 사회적 평등만 강조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갈등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는 의식적인 생각 이외에 그림자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그림자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을 억누르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융의 이런 인식은 도스토옙스키의 인간에 대한 인식과 일맥상통한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처럼 인간들은 이데올로기를 맹신하며 그것이 세상을 바꿀 합리적인 시스템이라 믿어왔다. 과학은 개개인을 평균적 인간에 대한 개념으로 대체했고, 정치적 현실은 국가라는 추상적인 원칙으로 변경되었다. 이제 우리 앞에 남은 것은 개인적 삶의 목표와 의미가 아니라 국가의 정책일 뿐이다. 변방에 있던 국가의 정책은 이제 개인들을 삶을 강요하며 개인의 구체적 삶에 영역을 침범해 나간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나 이데올로기의 원대한 이상은 개념일 뿐 실제로는 나약하고 깨지기 쉽고 예측 불가능한 인간만이 실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첫 작품을 <가난한 사람들>로 쓸 만큼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고 글을 쓰고 정치적으로 행동한 문인이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인류 역사상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선 사람은 있었지만 아무도 해결해보지 못했다.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여러 문인들은 가난과 정의의 문제를 광장으로 끌어냈다. 그들이 승화시킨 예술작품은 어떤 정치인들의 행위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 덕분에 인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반성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로써 인류에게 커다란 선물을 선사했다. 그들은 비록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문제들에 대한 ‘불멸의 문제제기’를 했다는 점에서 칭송받아야 마땅하다.


3. 인간 존재의 유일한 조건이고 희망


그렇다면 배은망덕하고 흠이 많은 지하생활자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난하고 굴욕적인 인생을 살았던 젊은 대학생은 죽음과도 같았던 삶에서 부활하고자 몸부림쳤다. 그리고 진부한 이론이나 체계를 넘어서기 위해 우리는 엄격한 자기반성의 터널을 지나왔다. 그는 초인이 될 수도 없었지만 평균적 인간으로 전락하지도 않았다. 그는 깨지고 상처받기 쉬운 인간이기에 더욱 그랬다. 외부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 자신의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지대가 높은 강기슭에서는 탁 트인 주변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있는 맞은편 강가에서는 노랫소리가 가물가물 들려오고 있었다. 햇살을 듬뿍 받은 건너편 초원에서는 유목민들의 분여지가 검은 짐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그곳에는 자유가 있었고, 이곳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또한 그곳은 마치 시간마저도 멈추어 버려서 아브라함과 그가 기르는 가축들의 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은 채 눈을 떼지 않고서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생각은 몽상과 명상으로 이어졌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떤 애수가 그를 설레게 하고 마음을 아프게 했다.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는 소설의 후반부를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지 않는다. 우리 삶은 아름답지만, 여전히 슬프다. 그러나 그 애수를 끌어안은 인생이야말로 우리가 끌어안고 지켜야 할 인생이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개념 저편에 있는 진짜 존재를 찾아야 한다. 선과 악, 지혜와 어리석음, 아름다움과 그렇지 않은 인간을 향한 모든 가능성을 향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서사를 써 내려가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유일한 조건이고 희망이다.


철학자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모든 철학자가 독단주의자라면 그들이 여성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혐의는? 그런 편협한 자라면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졸렬하고 부적당했다는 혐의는 근거 있는 것이 아닐까?'

<선악의 저편, 니체>



사랑뿐 아니라, 철학적 사고에서도 편협한 시선은 파국을 불러일으킨다.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없다면 미안하지만 그녀의 호감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꽉 막힌 인간과 연애하는 여인은 정말 불행할 것이다. 철학적 담론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나?


들뢰즈가 제안하였듯 철학함이란 사상이라는 거대한 산맥과 지층과 단층을 탐구하는 일종의 인류학이고, 고고학이고, 모험적 탐사여야 한다. 독단주의는 더 이상 현대성에는 적합한 개념일 수 없다. 이것이 미래철학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위대한 서곡 아닐까? 우리가 위대한 문인과 철학자들의 통찰을 통해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는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PS. 니체가 비유한 '여성은 진리이다'라는 등의 비유에 대해 여섬 폄하나 조롱이라고 불편해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니체는 여성을 진리의 위치에 두고 편협한 독단주의를 비판했다는 사실을 곱씹어  필요가 있다.  자신도 할머니, 어머니, 동생, 루살로메와 같은 여성들을 이해기도 힘들었겠지만, 어떤 이론에 대해 남들의 이해를 얻기란  힘들다는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참고 문헌>

지하생활자의 수기, 도스토옙스키, 열린책들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열린책들

선악의 저편, 니체, 책세상

무엇이 개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칼 구스타프 융(김세역 역), 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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