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읽기]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상처받은 아이, 나의 착한 아저씨
<출처: 나의 아저씨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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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설은 등장 인물의 이름이 길고 복잡하기로 유명하다. 이번 글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에 이름을 잘 익혀두는 것은 이런 복잡성을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므로 간단히 소개하고 시작하겠다.
알료샤:까라마조프가의 셋째 아들로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예비 수도사 과정을 수련 중이다.
1. 상처받은 아이 일류샤
우연히 알료샤가 길을 걸어가던 도중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지만 그에게는 큰 충격을 준 사건이 벌어진다. 광장 운하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어린 초등학생들이 서로 뒤엉켜 돈을 던지며 싸우고 있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 싸움은 여러 아이들과 한 아이와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여러 아이들은 알료샤에게 수수께끼 같은 얘기를 한다. “저놈은 당신 등에도 돌을 던졌어요. 저놈은 당신을 알고 있거든요”, “저 것 좀 보세요, 다시 걸음을 멈추고 당신을 노려보고 있잖아요…. 그놈은 당신을 무서워하지 않아요. 그놈은 갑자기 달려들어 칼로 푹 찌를 거예요. 몰래요. 조심하세요” 알료샤가 그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 아이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은 채 알료샤를 기다렸다. 겉보기에 아홉 살이 넘지 않은 것 같은 소년이었다. 알료샤는 처음 만난 아이가 다칠까 걱정되어 다가가지만, 아이는 그에게 돌을 던지고, 급기야는 짐승새끼처럼 달려들어 그의 손가락을 물어 피가 줄줄 흐를 정도로 큰 상처를 입힌다. 알료샤는 이 사건을 겪을 때만 해도 어린 일류샤가 자신에게 왜 그런 적개심을 품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우리는 그 소년의 외모를 통해 그가 누구인지 예상해 볼 수 있다.
키가 작고 허약했으며 얼굴은 창백하고 바싹 마르고 갸름했고, 크고 검은 두 눈동자는 원한에 사무친 눈초리로 알료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고 있는 외투는 너무 낡아 헐어 있었고 게다가 옷이 너무 작아서 기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짧은 소맷자락 사이로 맨 팔이 뻗쳐 나온 것이다. 바지 오른쪽 무릎은 커다란 헝겊으로 기워져 있었고, 엄지발가락이 있는 오른쪽 장화 코끝에 난 커다란 구멍에는 잉크로 열심히 칠한 흔적이 눈에 띄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도스토옙스키>
퇴역 이등 대위의 아들 일류샤는 작고, 허약하고, 바싹 마른 아이이다. 남루한 옷을 입은 행색을 보면 가난한 가정환경임이 분명하다. 가난한 것보다 더 슬픈 건 그늘진 얼굴과 그의 눈동자에 맺힌 원한이다. 소년 일류샤 그는 왜 상처받고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
알료샤는 큰 형의 약혼녀 까쩨리나를 통해 드미트리가 스네기료프를 폭행한 사건을 알게 된다. 퇴역 이등 대위 스네기료프가 표도르의 하수인이 된 것이 또 다른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드미트리는 스네기료프가 자신의 명의로 된 어음을 그루셴카에게 넘기면서 그녀 보고 돈을 청구해서 자신을 꼼짝없이 파멸시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미트리는 이 일에 대해 복수하게 된다. 어느 선술집에서 그의 턱수염을 붙잡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추한 모습으로 끌고 다니는 폭행을 저지른다. 그 장면을 목격한 이등 대위의 어린 아들 일류샤가 용서해 달라고 애걸하고, 사람들에게 도와 달라고 부탁도 해봤지만 나서서 말리기는커녕 웃어넘기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작은 도시의 선술집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동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급기야 일류샤가 다니는 학교의 동급생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가 당한 ‘턱수염을 붙잡히고 이리저리 끌려 다닌 일’을 흉내 내며 ‘수세미 같은 자식’이라 놀려댔다.
그렇게 괴로운 학교 생활을 이어 나가던 어느 날 소년은 마을 광장을 관통하는 운하를 사이에 두고 가엾은 아버지를 모욕하는 친구들과 돌팔매질을 하며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듣고 알료샤는 수수께끼와도 같았던 그 아이와의 지난 일들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일류샤는 퇴역 후 제대로 된 직업 없이 이곳저곳 전전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아버지의 아들이다. 이 아이는 슬픈 일을 당한 아버지의 착한 심성을 가졌다. 아버지에 대한 간절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를 모욕한 불한당의 동생에게 적개심을 내보이고 복수하려 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상처받기 쉬운 자아상을 가진 슬픈 아이였다.
2. 선택적 기억의 치유적 능력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어떤 때는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마르쉘 프로스트>
뇌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아이의 불행은 뇌의 정서적 기억과 관계되어 있다. 우리 뇌가 매일 처리하는 정보의 양은 방대하다. 그날그날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일을 처리하고, 수시로 다양한 상황을 대처하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뇌는 모든 정보를 동일하게 처리하지 않지 않는다. 뇌는 정보의 우선순위를 판단 후 중요한 정보는 압축적으로 저장하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망각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렇지 않으면 뇌는 심각한 과부하가 걸려 엉망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단순한 사실에 대한 기억(사실 기억) 뿐 아니라 정서적 기억의 형태로도 저장된다. 정서적 기억은 실제 경험한 사건 중 어떤 감정이 수반된 형태로 저장한 것을 말한다. 일류샤의 사례에서보면 그는 많은 사람 앞에서 아버지가 폭행당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매우 슬프고 수치스러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아이의 기억 속에는 그날의 세부 상황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단지 여러 사람들 앞에서 겪었던 수치심만 남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남은 부정적 정서적 기억은 마음속의 상처가 되어 침잠해하고 무의식적으로 재활성화된다. 무엇보다 친구들의 수군거림과 놀림을 통해 더 악화되고 강화된다. 현재의 기억은 과거의 기억과 연결되고 교묘하게 왜곡하며 날카롭게 그 아픈 부위를 상처를 후벼 판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다고 모두가 고난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철석 같이 믿고 있던 이 아픈 기억이 때론 진실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까라마조프 가문의 막내 알료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우리는 앞서 상처받은 아이 일류샤의 외모에 대한 설명을 살펴본 적이 있다. 외모는 단지 생김새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의 외모와 표정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유추해 볼 수 있다. 외모는 한 사람의 인생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류샤의 슬픈 초상과 비교해 알류샤의 초상을 살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어쩌면 독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나의 젊은 주인공이 병적이고 광신적이며 비정상적인 성품을 가진 창백한 몽상가이자 깡마르고 여윈 인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알료샤는 당시 건장한 체격을 갖추었고, 뺨에는 홍조가 돌며,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나는 건강미 넘치는 열아홉 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당시 대단한 미남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간 정도의 키에 다부진 몸매에다가 짙은 아마빛 머리, 약간 길쭉하긴 하지만 이목구비가 뚜렷한 계란형 얼굴, 반짝거리는 짙은 잿빛의 크고 시원스러운 눈동자를 가진 사려 깊고 아주 얌전한 청년이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도스토옙스키>
알료샤는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잘생긴 청년이다. 그러나 그의 외모에 대한 설명 중 눈에 띄는 묘사는 그가 ‘병적이고 광신적이며 비정상적인 성품을 가진 창백한 몽상가이자 깡마르고 여윈 인물’이 아니라고 시작하는 부분이다. 이런 설명은 마치 ‘키가 작고 허약했으며 얼굴은 창백하고 바싹 마르고 갸름했고, 크고 검은 두 눈동자는 원한에 사무친 눈초리’를 가진 일류샤를 염두에 두고 쓴 것 같다.
어쨌든 알료샤의 얘기를 이어가 보자. 일류샤의 사례에서처럼 알료샤도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한다. 청소년기의 그는 내성적인 성향이었지만, 그것이 타인에 대한 불신감이나 소심함, 우울함, 대인 기피증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친구들의 놀림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남달리 모욕에 민감한 까라마조프 가문 식구들과는 달리, 알료샤는 남을 원망하거나 책망하는 일 없이 모든 것을 다 수용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는 모욕을 마음속에 남겨두지 않았다. 타인이 상처를 주더라도 그것을 모욕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참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거나 타인에 모욕에 대한 민감하지 않았다. 그는 모욕을 가슴속에 두지 않았다. 간혹 그런 일을 당하더라도 금방 회복할 수 있었으며 그것을 모욕이라도 생각하지 않는 범상치 않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알료샤는 정서적 기억 중 부정적 정서에 대한 둔감하고 그것을 망각하는 능력이 뛰어난 아이였다.
알료샤가 모욕에 강한 내성을 가진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알료샤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알료샤 4살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는 유명을 달리했다. 그녀는 순결하고 뛰어난 미모를 가진 여성이었다. 거친 여성미에만 골몰했던 표도르의 마음을 격동시킬 만큼 청순하고 예뼜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 그 자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네 살바 기인 알료샤가 어렴풋이 엄마의 얼굴을 한평생 기억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마치 어머니가 살아서 자기 곁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알료샤는 엄마의 얼굴과 그 부드러운 품을 매 순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3. 영원한 기억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우리는 인생 초기에 소중했던 사람들과의 관계원형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 특히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는 절대적이다. 아이들에게 있어 부모와의 관계를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다. 부모의 보살핌이 없다면 아이의 생존은 큰 위협을 받게 된다. 그래서 생애 초기의 아이들은 부모의 돌봄을 끊임없이 확인하려 노력한다. 표정, 몸짓, 미소, 울음 등 모든 비언어적 수단을 동원해 부모와 교감하며 생존성을 보장받는다. 아이가 귀여운 재롱을 피우면 부모는 사랑스러운 눈길과 정서적 감탄으로 반응한다. 아이는 부모의 관심 속에서 기본적 욕구와 정서적 욕구를 충족하게 되지만 안정을 유지하지만, 부모가 아이의 반응에 적절히 반응해 주지 않으면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이처럼 생애 초기에 부모와의 경험의 질은 아이가 성장 발달하는 과정에서 주변 세상과 사람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알료샤의 경우 어머니에 대해 따뜻하고 좋은 기억을 가졌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반대로 어린 시절 고착된 타인에 대한 불신감은 개인의 무의식 속에 내재화되어 타인들과 관계 맺는 데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만약 누군가가 지인들과 비슷한 패턴으로 갈등을 경험한다면 자신의 마음속에 잠재된 나쁜 기억에 기인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소설 속 일류샤가 아버지의 불행을 목격한 것이나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한 것 때문에 상처를 받았지만, 그 상처가 더 쓰리고 아팠던 또 다른 이유가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욕구 충족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 조심스럽게 상상해 본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 받은 상처는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아버지, 형제, 부자 지간으로 살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공상적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가족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라는 문장은 ‘공상적 사랑’을 보여주는 전형적 문장이다. 가족은 어떤 당위로 한정지어진 소유의 개념 속에서 ‘불행의 씨앗’라는 독버섯이 자라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버지라고 다 같은 아버지가 아니다. 형제라고 다 같은 형제가 아니다. 단순히 피를 나누었다는 것만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거나 가족을 마치 자신의 소유처럼 생각하고, 쉽게 생각하고, 상처를 주는 행위야 말로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악마적의 유혹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당위적 제도와 그럴듯한 구호들로 우리 사회의 건강한 기초를 만들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런 생각은 실체 없는 신기루이고, 그냥 무너져 내릴 모래성이고, 가장 어리석은 폭력을 방치하는 무책임한 방임일 뿐이다.
그 아이를 기억합시다. 우리가 이 마을에서 아름답고 착한 감정으로 혼연 일체가 되어 그 가엾은 아이를 사랑했으며 아주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기로 합시다……..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불행해지고, 또 누군가는 어쩌면 악당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서 무얼 하건 서로를 잊지 맙시다. 이런 시절 간직했던 그 아름답고 신성한 추억이 단 하나만이라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남게 된다면 그 추억은 언제나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프스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슬픈 기억을 간직한 채 모질고 힘들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불행해지고, 또 누군가는 어쩌면 악당>이 되기도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누군가에게 중요한 한 사람을 기억되는 것, 전 존재를 바치는 사랑을 경험하는 것, 평생 동안 인내하며 한 존재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아픈 기억과 화해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 긴 여정 속에서 서로가 영원히 기억될 수 있다면 그 추억은 언제나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출처: 나의 아저씨 tvN>
4. 에필로그: 슬픈 우리의 자화상, 나의 아저씨를 기억하며
네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네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모든 일이 그래. 항상 네가 먼저야. 옛날 일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드리마 나의 아저씨 중 tvN >
최근 애정하던 한 배우가 세상을 등졌다. 나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모른다. 그리고 최근에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이렇게 생애를 마감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나는 경찰서에서 날아온 벌금 고지서만 봐도 경기를 하는 사람이다. 범죄 혐의를 받고, 포토라인에 서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대중들의 비난과 멸시, 온갖 루머와 혐오 속에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만해도 아찔해진다.
자신도 '천근만근'인 삶의 무게를 버티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갔지만, 그는 정당방위로 살인을 저지르고 억척 같이 자신의 삶을 견디며 살아온 한 젊은 여성을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어주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부서지기 쉬운 평범한 인간이기도 했던 것 같다. 나는 그가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 속에, 참을 수 없는 모욕감 속에 얼마나 힘들었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다만, 힘들고 고단한 삶 속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을 때 내게 찾아와 작은 위로가 되어 준 상처받은 [나의 아저씨]를 기억해 본다.
그리고. ...
‘내가 나의 과거를 잊고 싶어 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의 과거도 잊어주려고 하는 게 인간 아닙니까’
라고 어린 지안의 입장을 항변해 주던 대사에서
[알료샤]의 환영을 만나게 된다. 상처받은 누군가를 위로해 주던 그의 따뜻한 미소가 생각나 더 마음이 아려온다.
<참고문헌>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도스토옙스키, 열린책들
행복한 부부, 이혼하는 부부, 존 가트맨(이주현 역), 문학사상사
프로이트의 의자, 정도언, 인플루엔셜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 프로이트, 열린책들
긍정심리학, 마틴 셜리그만, 물푸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