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지옥이란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할 수
[고전읽기]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지옥이란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할 수 않는 고통
1. 들어가며: 글쓰기의 이유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학가 도스토옙스키, 그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3(1878~1880)년 동안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완성하기 위해 무절제한 생활을 청산하고 집필 활동에 전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러시아 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아니, 세계 문학사에 영원히 남을 최후이자 미완의 역작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리고 세계사에 빛나는 위대한 이 작가는 1881년 1월 근대사의 중심에서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를 마감한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심오한 그의 사상과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수작이다. 말 그대로 이 작품은 그의 생애 전반을 통해 통찰한 인간간과 세계관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기에 앞서 그가 젊은 시절 상트페테르부르크 군사 공병학교 출신이라는 것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는 마치 건축 재료를 하나 하나 세워나가듯 전생애적 건축(Life-Span Construction)이라도 하는 듯 기존에 집필했던 작품의 내용과 등장인물들을 통합적으로 사용해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라는 위대한 건축물을 창조했다. 내가 그러했듯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1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그 방대한 양에 놀랄 뿐 아니라, 사람의 본성, 이데올로기, 신과 세계에 대한 심오하고 신비스러운 그의 사상에 압도되어 작품을 읽을 엄두조차 내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1년 전 토스토옙스키 전집 읽기라는 계획을 세웠고, 연말이 되어서 그의 5대 장편 소설을 완독하게 되었다. 전공자가 아닌 나에게 그의 작품을 완독하는 과정은 마치 광야에서 헤매는 나그네와도 같은 지난한 과정이었고 때로는 괴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빈 들에 마른풀처럼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작품들을 이해하고 싶은 갈증에 목말랐다. 그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참고 서적들과 자료를 넘나들며 무수한 낮과 밤의 광야를 헤매기도 했다. 시시 때때로 마치 장막을 열어젖히듯 가난한 사람들, 지하생활자, 인간과 신에 대한 심오한 통찰,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작가의 통찰들을 마주할 때마다 망치로 머리를 맞는 듯한 충격과 감동이 너무 커서 이루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제 나는 저 위대한 작가의 사상을 어렴풋이 알만한 지금, 도스토옙스키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다루는 글들을 연재하려 한다. 이번 연재의 목적은 이 작품을 내가 잘 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을 더 이해하고 싶은 욕심이 더 컸기 때문이다. 나아가 나와 같은 일반인들이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으려 할 때 겪을 어려움에 대한 형제애적 연민과 연대가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작품들 속에 숨겨진 보석 같은 건축자재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글쓰기가 되지 않을까? 혹 누군가 나의 어리석은 글쓰기를 통해 이 위대한 인류사적 건축물을 종합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된다면 부끄러운 나의 손에게 작은 위로라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 글이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주제이기도 한 ‘작은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지고 죽지 않는다면, 많을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 12장 24절)’의 진리를 증명하는 작은 씨앗이 될 수만 있다면 이 보다 더 큰 기쁨이 있겠는가?
2. 천국과 지옥의 비밀: 3가지 에피소드
이 소설의 중반에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당대의 현인 조시마 장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조시마 장로는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훌륭한 사제로서 까라마조프가의 세 번째 아들 알료샤의 영적 스승이기도 하다. 그의 생전의 가르침과 행실은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사후에 발생한다. 그의 시신에서 악취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의인의 타락과 수치를 보고 싶어 한다>는 고인의 평소 이야기는 현실이 되어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냄새가 지독해지고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자 사람들은 그 냄새가 조시마 장로의 심한 방종과 유혹의 증거라도 되는 듯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장로를 존경했고, 신앙심이 깊었던 알료샤는 괴로움 속에서 고뇌한다.
2-1. 첫번째 에피소드: 대심문관
조시마 장로의 악취 문제는 앞으로 이어지는 3가지 이야기와 연결된다. 그중 첫 번째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중 둘째 이반이 만들었다는 소설 속 [대심문관] 전설이다. 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 지방에 종교재판을 책임지고 있는 대심문관에 예수가 현신한다. 대심문관은 자신 앞에 나타난 예수를 보자마자 금세 그가 진짜 예수라는 것을 알아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오신 예수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이렇다.
당신은 인간들로부터 자유를 빼앗고 싶지 않았기에, 빵으로 복종을 산다면 그게 무슨 자유인가라고 판단하여 그 제안을 거절했었소. 당신은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대답했지만, 그 지상의 빵의 이름으로 지상의 악마는 당신에게 반기를 들고일어나 당신과 투쟁하여 결국 당신을 누르고 말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 짐승을 닮은 자야말로 하늘에서 불을 훔쳐다가 우리들에게 가져다주었다!〉고 외치면서 악마의 뒤를 따르리란 사실을 당신은 모른단 말이오? 세기가 지난 뒤 인류는 자신들의 지혜와 과학으로 인해 범죄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죄악도 존재하지 않고 다만 굶주린 자들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자신의 입으로 소리 높여 공언하리란 사실을 당신은 모른단 말이오? 사람들은 〈먹여 살려라, 그리고 나서 선행을 요구하라!〉고 쓴 깃발을 당신을 향해 높이 치켜들고 당시의 성전을 파괴할 것이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끼>
대심문관의 주제는 예수의 공생애 초기에 광야에서 받았던 사탄의 시험과 관련되어 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은 빵을 돌로 되게 할 것, 천하를 통치할 권세와 영광을 줄 것, 성전에서 뛰어내릴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예수는 사탄의 꾐을 과감히 물리치고 영광스러운 공생애를 시작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심문관의 평가는 사뭇 다르다. 예수가 인간들의 자유를 위해 돌로 빵을 만들라는 유혹을 이겨냈다고 하지만, 실제로 인간들은 자유가 아닌 빵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유보다 먹고사는 문제가 우선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세기 동안 종교지도자들이 무수한 노력 끝에 겨우 해결했으므로 예수를 떠나라고 종용한다.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악마적 기적(물질적 풍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권위 따위를 고대하는 인간의 내면의 어두운 욕망)을 상징하는 재료이다. 대심문관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당장 먹고 살아가는 문제를 해결해 줄 권력자의 재림와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이었다. 원래 이스라엘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오랜 로마의 통치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강력한 권력자인 다윗의 자손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인간들의 실제적인 요구를 해결해주기는 커녕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죽어버릴 운명을 타고 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무덤 속의 그리스도, Hans The Body of the Dead Christ in the Tomb 1521 Oil on wood 30.5 x 200 cm Offentliche Kunstsammlung, Basel 출처: 위키피디아 >
이런 예수의 생애는 마치 도스토옙스키의 또 다른 작품 백치에 나오는 홀바인의 작품 <무덤 속의 그리스도, Dead Christ>에서 처럼 자연법칙에 지배당하며 죽어버린 비참하고 무시무시하기까지 한 그리스도의 모습과도 닮았다. 만약 메시아의 지극히 평범한 인간적 삶과 비참한 죽음을 목격한 자라면 그리스도의 신적 부활은 꿈도 꿀 수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수도사인 조시마 장로가 죽었다면 응당 썩지도 않고 악취도 나지 않는 어떤 신적 징표가 나타나야 하는 게 마땅하다. 보통 사람도 사후 하루 이상 지나야 악취가 나거늘 성인과도 같은 장로가 죽은 지 하루도 되지 않아 악취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된 많은 대중들이 조시마 장로에게 등을 돌리게 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마치 <무덤 속의 그리스도, Dead Christ>를 목격한 인간들이 의심하고 절망했던 그 방식 그대로 신도들은 부정적인 소문과 염려를 키워나갔다.
그러나 그들이 고대했던 메시아는 물질적 풍요는 커녕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떤 대단한 능력도 없는 종교적 지도자에게 실망한 대중들은 그저 인간적 자유를 포기한 채 대심문관과 같은 권력자에게 연명해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면 된다는 것일까? 자유를 포기한 굴종을 택한 인간이 마주한 것이야말로 사탄이 원했던 지옥과도 같은 삶의 원형이 아니었을까? 자유를 상실한 인간은 도대체 어떤 희망을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2-2. 두번째 에피소드: 파 한뿌리
여기서 우리는 조시마 장로의 비참한 죽음으로 고조된 긴장감 이후에 전개되는 ‘파 한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파 한 뿌리는 생전에 단 한 번도 선행을 하지 않아 지옥에 간 늙은 할머니에 대한 짧은 우화이다. 그 짧은 본문을 직접 살펴보자.
옛날 옛적에 몹시 심술 고약한 할멈이 살다가 죽었어요. 그런데 그 할멈은 평생 선행이라곤 눈곱만큼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악마들은 그녀를 붙잡아다가 지옥 불에 빠뜨리고 말았지요. 할멈의 수호천사는 하느님께 말씀드릴 만한 할멈의 선행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지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천사는 《저 할멈이 밭에서 파 한 뿌리를 뽑아서 거지에게 준 일이 있습니다》라고 하느님께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너는 바로 그 파 한 뿌리를 가져가 지옥 불 속에 내밀어서 할멈이 그걸 붙잡고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라. 만일 할멈이 그걸 붙잡고 빠져나오면 천국으로 가도록 하고, 파가 끊어지면 지금 있는 곳에 계속 머물게 해라.》 그래서 천사는 할멈에게 달려가 파 한 뿌리를 내밀며, 《자, 할멈, 어서 붙잡고 나와요》 하고 말했지요. 천사는 파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기기 시작해서 거의 다 끌어올렸는데 지옥 불 속에 있던 다른 죄인들이 할멈이 올라가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함께 그곳을 벗어나려고 너도나도 할멈한테 매달리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몹시 심술 고약한 할멈은 《나를 끌어올리는 것이지, 너희들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야. 이건 내 파지, 너희들의 파가 아니야》 하고 악을 쓰면서 사람들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어요. 그녀가 이렇게 말한 순간 파는 뚝 끊어지고 말았어요. 그래서 그 할멈은 지옥 불에 떨어져 지금까지 고초를 겪고 있지요. 천사는 하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나고 말았어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끼>
심술궂은 노인은 평생 선행 한번 하지 않아 악마들에 의해 지옥에 던졌지만, 다행히 수호천사의 간청으로 단 한 번의 선행인 ‘파 한 뿌리’를 붙잡고 천국에 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지만 자신만 구원받겠다는 욕심 때문에 실패로 끝난다는 이야기이다. 이 짧은 우화는 도스토옙스키의 심오한 구원관을 담고 있다.
파 한 뿌리는 일회적 선행으로 천국행 티켓을 얻었는다는 이야기 같다. 하지만 실제로 파 한뿌리는 악마의 심판과는 다른 신의 은총을 상징하는 도구이다. 신의 구원은 물질의 양이나 수학적 수지 타산에 근거한 이익의 양과 교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한 사람이 매달려 끊어지지 않는 파 한 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적 기준에 따르면 파 뿌리 그 자체로는 단 한 명의 인간도 구원받을 수 없다.
오히려 파 한 뿌리는 인간을 구원하는 신의 은총을 상징한다. 파 한 뿌리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은총은 주어졌다. 그러나 천국으로 갈 것이냐, 지옥으로 갈 것이냐는 할머니의 행동과 결단에 달려 있는 것이다. 비극은 노파가 파 한 뿌리를 신의 은총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자신만의 소유로 여긴데 있다. 그녀는 신의 은총은 어떤 물질의 소유에서가 아니라 가여운 인간에게 신이 내어주는 연민이자 구원의 손길임을 알지 못했다.
노파의 진짜 문제는 나만 선택받았다는 이기적인 생각이다. 그녀는 악을 쓰며 사람들을 발로 찼다. 사람들을 발로 찬다는 것은 구원을 나눠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적극적인 몸짓이다. 그녀는 구원의 마지막 사다리를 평소에 그랬듯 교만하고 이기적인 태도로 마지막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걷어차 버린 것이다. 그 결과 노파뿐 아니라 모두가 다시 지옥불로 떨어졌다. 그러나 노파만 나쁜 것은 아니다. 파 한 뿌리에 매달려 구원받고자 했던 사람들고 잘못이 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이기주의가 사회를 망치고 지옥을 만들 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증오심과 이기주의를 넘어 구원받기 위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2-3. 세번째 에피소드: 가나의 혼인 잔치
구원의 비밀은 비로소 세 번째 이야기에서 밝혀진다. 고뇌하던 알료샤가 조시마 장로의 시신이 안치된 수도원으로 돌아온 후 기도를 시작하고 잠들게 된다. 꿈속에서 알료샤가 신약 복음서에 기록된 갈레니아 지방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고 거기서 조시마 장로를 만나게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혼인 잔치 이야기는 광야에서 시험받은 후 예수가 처음 행한 기적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어머니를 보시고 《어머니, 그것이 저에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아직 제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예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일렀다.〉」〈그대로 하라……, 가난한 사람들, 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기쁨, 기쁨일 테니…….그리고 조시마 장로는 이 가나안 잔치에 알료사와 함께 참여하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파 한 뿌리를 적선했고, 그래서 이 자리에 있는 건데.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단지 파 한 뿌리씩, 단지 조그만 파 한 뿌리씩 적선했던 사람들이란다……. 우리가 할 일이 뭘까? 그런데 조용하고 온순한 내 아들아, 너도 오늘 구원의 손길을 뻗는 한 여인에게 파 한 뿌리를 적선했더구나. 이제 시작하거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제 네 임무를 시작해, 얌전한 내 아들아…….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끼>
혼인잔치에 대한 꿈 속에서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의 생전의 가르침, '사람들을 사랑하는 자는 그들의 기쁨도 사랑하는 법이니라'를 기억한다. 그리고 그것은 악마가 제안한 물질과 권력에 대한 유혹을 이겨 내신 예수가 가난한 사람에게 처음으로 베푼 포도주의 의미를 설명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조시마 장로가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이 파 한 뿌리를 적선했기 때문이라는 말과 알료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는 이들에게 파 한 뿌리를 나누는 일을 계속할 것을 독려하면서 알료샤는 불안을 극복하고 자신의 신앙을 지킬 수 있게 된다.
3. 나가며: 공상적 사랑과 실천적 사랑
결론적으로 인간 구원의 비밀은 파 한 뿌리로 상징되는 신의 은총이다. 그러나 이 구원은 악마가 제안한 물질적 소유나 권력이 아니다. 오히려 나만 구원받겠다(소유하겠다)는 이기심에서 벗어나 구원이 필요한 이웃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 파 한 뿌리를 나누려 노력하는 그 행위 자체이다. 이것이 도스토옙스키가 주장한 인간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나는 조시마 장로가 인생 마지막에 이 사랑의 정신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었다.
공상적인 사랑은 사람들이 그것을 주목해 주는, 만족도가 빠른 성급한 성취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럴 때 실제로 자기 생명까지 바치겠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하며 모든 사람에게서 주목받고 칭찬받기 위해 무대 위에서처럼 얼른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그러나 실천적 사랑은 노동이자 인내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완벽한 학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바이지만, 당신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목표에 다가가기는커녕 거기에서 더욱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두려움 속에서 목격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갑작스레 목표를 성취하게 되며, 언제나 사랑으로 보살피시며 언제나 보이지 않게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의 기적의 권능과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끼>
위의 인용구에서 조시마 장로는 사랑을 공상적인 사랑과 실천적 사랑으로 구분한다. 먼저, 공상적인 사랑은 선언적이고 개념적이다. 이런 사랑은 인류에 대한 지극한 봉사 정신이 일 수도 있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걷겠다는 수도자적 다짐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을 꿈꾸는 사람일지라도 어떤 사람과 단 이틀이라도 함께 있으라고 한다면 견디지 못하고, 나아가 타인을 증오하게 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랑을 몇 번 경험해 봤다.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친구와 같은 방을 한 달만 나눠 써보라. 당신은 그 소중했던 벗의 목숨을 빼앗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힐지도 모르는 생지옥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실천적 사랑은 공상적인 사랑과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실천적 사랑은 노동이자 인내이며, 완벽한 학문과 같은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온갖 노력을 기울인 다음에도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없는 두렵고 떨리는 행위라 설명한다.
조시마 장로의 이런 설교는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인 하이데거의 소유와 존재 개념과 매우 닮았다. 그는 과거 서양철학의 존재론이 존재 자체를 존재(Being)와 존재자(beings)로 오인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기존의 존재(Being)라는 개념은 명사적 개념이다. 이것은 ‘신이 존재한다’, ‘인간이 존재한다’, ‘집이 존재한다’와 같이 어떤 행위를 지칭하는 동사(존재하다)의 개념적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전통적 존재론의 핵심이다. 전통적 존재론은 주체와 동사의 설명을 통해 주체를 구획할 수 있고 그런 개념은 소유 가능한 개념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신이나, 인간, 집 등은 단지 개념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 주장한다. 현실 세계에는 신, 인간, 집 등의 개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자는 명사개념으로 구획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또 대상화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경제적 가치나 도덕적 가치로 환원할 수도 없기 때문에 철저히 비소유적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적(ontical) 사유와 존재자론적(ontological) 사유를 엄격히 분리한다. 이것을 까라마조프 씨의 형제들 속 사랑관과 대비해 보면 이렇다. 첫 번째 이야기에 나오는 악마의 유혹은 물질과 권력과 세계를 소유할 수 있다는 존재적 유혹이었고, 그 시험을 이겨낸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인 가나의 잔치는 철저한 비소유이며 가난한 이웃들을 연민한 '존재자론적 사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와 하이데거의 사상은 ‘삶은 대양과 같아 모든 것이 그 안으로 흘러들어 서로 만나게 된다’는 이 소설의 내용처럼 서로 만나 공명하고 있는 것이 너무 놀랍지 않은가?
파 한 뿌리의 놀라운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가톨릭으로 대표되는 중세의 신정정치, 당시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놀라운 기술의 진보와 자본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 프랑스 시민혁명을 이은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과 같은 거대 담론이야 말로 2천년 전 예수를 시험했던 악마의 달콤한 유혹이라 생각했다. 그는 인간 구원은 이런 개념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오히려 구원은 실천적 사랑을 자각한 연약한 개인들의 인내와 노력에 기반한다고 믿었다. 비록 이런 개인들의 파뿌리 하나는 연약하고 볼품없다. 하지만 이 구원의 놀라운 힘은 연쇄적이고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할 것이므로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이 소설 맨 앞에 인용된 ‘한 알의 밀알’과 연결된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복음 12장 24절>
하나의 씨앗이 땅에 떨어진다. 그 볼품없는 씨앗이 땅에 떨어진다해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거나 썩어 버리는 일은 흔하다. 그러나 그 씨앗이 뿌리를 내리는 은총을 입는다면 그 열매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도스토옙스키가 조시마 장로의 입을 통해 전하는 인류 구원의 위대한 씨앗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낙원이란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낙원은 죽어서 가는 피안에서 얻는 보상을 넘어 즉시 내 내면에서 시작된다. 각자의 마음에서 낙원이 시작되면 비로써 ‘고립된 개인’들을 넘어 형제애적 구원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큰 수레바퀴가 작동하게 된다. 한 인간이라도 파 한 뿌리의 모범을 보여 고립된 인간들을 형제애적 교류의 장으로 이끌어 내는 것이야 말로 인류 구원의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천국의 비밀은 바로 이 파 한 뿌리의 모범을 보이는 데 있다. 그리고…
‘지옥이란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
에 다름 아니다.
<참고 문헌>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도스또예프스끼,이대우 역, 열린책들
도스토옙스키 깊이 읽기, 석영중, 열린책들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안나 도스토옙스키, 최호정 역, 엑스북스
매핑 도스토옙스키, 석영중, 열린책들
마음혁명, 김형효, 살림
존재와 시간,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까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