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죄와 벌
비범한 행위가 지고의 천재성을 입증할 때 이 천재에게 평범한 인간의 모든 열정과 사고를 적용하는 것보다 더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때때로 역사 속에 마치 찬란한 횃불처럼 등장하여 시대의 암흑을 몰아내고 미래를 밝혀주는 이 비범한 존재들의 우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보다 더 그릇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역사, 프랑스 나폴레옹 3세>
죄와 벌은 표드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이다. 가난한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늙고 사악한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내용을 소재로 다뤘다. 오디오북을 접하고, 원작을 다시 읽고, 최근에 한번 더 읽었지만, 소설이 주로 다루고 있는 초인 사상, 돈, 자유 등의 주제가 사뭇 무겁고 침울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인류는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으로 구분되고, 비범한 사람에게는 살인을 포함한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이론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한 초인 사상이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이 초인 사상에 경도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사회에 순응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법률을 어길 권리를 지니고 있지 않지만, 비범한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권리와 법률을 위반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논리를 가지고 살인을 감행한다.
그에게 돈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물리적인 자유를 확보해주는 수단이라면, 사상은 심리적인 자유를 확보해 주는 도구이다. 이 젊은 청년의 눈에 비친 세상은 정의롭지 않다. 늙고 사악한 전당포 노파에게는 돈이 넘쳐나지만, 착하고 어린 여자아이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초인 사상에 더해 제레미 벤담의 도덕의 목표가 행복이며 개인의 행복이 증폭되면 될수록 개인이 모인 집단인 사회의 행복도 증가한다는 이론이 유행했다. 한 사회의 행복 지수를 높이기 위해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요구되는 것이다. 벤담의 이론에 따르면 이 청년의 살인은 정당화된다. 쓸모없고 사악한 인간 하나를 죽임으로써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이 혜택을 입을 수 있다면 그것은 선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초인 사상과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모든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신념을 구축해 나갔고, 그 계획을 실행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살인을 실행한 후 그의 현실은 엄청난 간격이 있었다. 그는 궁극의 자유를 누리는 초인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둘러싼 가난, 동생도 가난으로 인해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상황, 자신의 이론을 확신하게 만든 알코올 중독자 마르멜라도프의 비참한 죽음, 남겨진 가죽들의 불행한 삶, 장교와 대학생이 나눈 노파 살해의 정당성에 대한 대화 등 살인을 저지르기 전부터 자신의 자유는 없었다. 그는 그저 주변의 상황과 우연의 점증에 떠밀려 살해하게 되었음을 깨닫고 절망하게 된다.
그의 노파 살인은 초인적 자유의지로 실행되지 않은 것을 넘어 계획에 없던 리자베타를 죽이는 상황에서 더 비극적이다. 리자베타는 노파의 배다른 동생이다. 그녀는 백치나 다름없이 우둔하지만, 신앙심이 깊고, 착한 존재이다. 리자베타는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의 살인으로 획득한 돈을 베풀어야 할 대상의 전형이다. 나아가 가난하고, 모욕당하고, 학대당하는 사람들의 전형인 것이다. 전당포 노파가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라면, 리자베타는 주변부에 밀려나 온갖 수모를 당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형벌을 받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노파와 함께 리자베타를 살해함으로써 악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선을 죽이고, 불쌍한 그리스도도 함께 죽여 버렸다.
이로써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렸던 큰 그림은 무의미해졌다. 그래서일까, 살해 이후 그는 자신의 좁은 방에서 다시 갇혀버렸다. 노파에게서 빼앗은 돈과 금품도 사용할 의지가 없다. 사실 노파는 잘못이 없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녀를 혐오한 이유는 가난한 자신과 그 주변 상황에 대한 분노 때문이다. 자신의 불편하고 불쾌한 심리를 노파에게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노파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분신 일지 모른다. 돈이 많은 노파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녀의 아파트는 누추하고, 비좁다. 거기에다 전당포를 운영한다는 것은 많은 주의를 필요로 한다. 그녀의 창문은 굳게 닫혀있고, 빗장과 자물쇠로 스스로를 잠궈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의 감옥과 다름없는 방에서 고립되어 살아왔고, 겨우 누울 공간 정도 되는 라스콜로니코프의 하숙집도 마찬가지다. 이 둘의 삶은 자유 없이 유폐된 죄수와 다를 것이 없다. 그는 노파를 죽인 동시에 자신도 사회적으로 죽여 버렸다.
어쩌면 라스콜리니코프는 사회로부터 상처 받고 고립된 사람의 전형이다. 그는 극단적인 고립감과 왜곡된 사상을 가지고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연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파 살인 이후 그 명분의 허구성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그를 구해 낸 것은 어머니다. 그는 어머니 앞에서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의 아들이 자기보다 더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는 어머니를 멈추지 않고 사랑할 것임을 재확인한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어머니와 연결된다. 어릴 적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그의 마음을 녹이고, 무서웠던 순간에서 그를 구원해 낸 것이다.
어머니가 자기 긍정의 시작이었다면, 소냐는 무조건적 동정과 사랑의 상징이다. 그는 소냐에게 자신이 살인범임을 힘들게 고백했다. 소냐는 진심으로 그를 위해 울어주고 불쌍히 여겨준다. 이 세상에 당신처럼 불쌍한 사람이 또 있겠냐며. 그리고 소냐는 절대로 그를 버리지 않겠다는 맹세와 더불어 경찰에 자수하라는 말 대신 센나야 광장으로 나가 온 세상을 향해 절하고, 대지에 입 맞추고, 소리 내어 죄 사함을 구할 것을 요청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의 말대로 온 세상을 향해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의식을 치르게 된다.
17세기 사상가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유로운 인간들은 공포나 악을 피하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 그 자체를 위해서 선을 행할 따름이다. 또한 자유로운 인간들은 어떤 보상을 받기 위해 선을 행하지 않는다. 보상을 위해 선을 행하는 자는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일 뿐이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비범한 초인이 아니다. 오히려 구원은 자기가 자유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루어 가는 것이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행동해서 얻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도움으로 우리 내면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한다.
우연일까? 오늘 밤은 최인훈의 광장을 읽을 예정이다. 그의 광장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광장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공간일 수 있을까? 혹 아니라면 우리는 그 자유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자유에 대한 나의 갈망,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나의 지적 호기심이 살아난다. 그래, 자유다. 한동안 자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사유해 봐야겠다. 이 호기심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기대해 본다. 그러고 보니 나야말로 죄와 벌의 첫 문장으로 되돌아와 버렸다. 찌는 듯한 여름날 해질 무렵, 좁은 하숙집을 나와, 자유를 향해 망설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은 주인공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진정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삶의 굴레와 무게 앞에 좌절할 것인가? 문학사에 길이 남은 이 문장이 이제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7월 초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날 해질 무렵 S 골목의 하숙집에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자신의 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으로 K 다리로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걷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첫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