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읽기]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드미뜨리 서사의 비극적 구조
지그문트 프로이트(출처: 나무위키)
“그는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자리를 차지한다.「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지금까지 쓰인 가장 장엄한 소설이고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세계 문학사의 압권이다.”<지그문트 프로이트>
1. 도스토옙스키,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작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읽고 도스토옙스키를 셰익스피어와 비교하며 극찬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프로이트는 인간 정신을 분석하고 이론화하면서 그리스 신화적 상징들의 역할을 매우 중요시했다. 프로이트가 주목했던 것은 유럽 문명을 근간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원형 그중에서도 ‘비극’이었다. 그는 오이디푸스의 비극, 삶과 죽음의 신화, 남성과 여성 간의 긴장 관계 등과 같은 신화적 상징을 통해 인간 자아의 구조, 불안, 무의식 등의 주제를 심층적으로 탐구했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융(karl Gustav Jung)은 프로이트 이론을 좀 더 발전시켜 신화와 꿈에 나타는 상징들이 인류의 공통 사건의 유형이나 심리 유형에 반영된다는 집단무의식 개념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셰익스피어의 작품들과 비견한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뛰어난 시적 상상력, 인간성의 안팎을 넓고 깊게 꿰뚫어 보는 통찰력, 놀랄 만큼 풍부한 언어의 구사, 매우 다양한 무대형상화 솜씨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특히,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은 인간들의 악마적이고, 추악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면서도, 그 내면에 자리 잡은 희망의 불씨를 찾아내고자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세계문학사에도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도 비극적 삶의 주제 속에서 인간 내면의 빛과 어두움의 심연에 주목했다. 그러나 많은 독자들은 이런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프로이트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극찬하면서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작가로 추켜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도스토옙스키를 셰익스피어 비견할 만한 작가로 극찬한 프로이트의 평가는 적절한 것일까?
2. 상처받은 아이 드미뜨리
이 작품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단연 큰형 드미뜨리다. 그의 출생, 그의 연인들, 아버지와의 갈등 등 드미뜨리는 사실상 이 소설의 주인공 역할을 하며 플롯의 전반을 이끌어 나간다. 그러므로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이해를 위해 드미뜨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이다. 드미뜨리의 비극적 삶에 대해 논하기에 앞서 그가 어떤 외모와 성격의 소유자였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드미뜨리 표도로비치는 28세의 젊은 사내이며, 보통 키에 수려한 용모를 갖추고 있었으나 나이에 비해 상당히 늙어 보였다. 근육질의 사내로서 비록 그의 얼굴에는 뭔가 병적인 것이 엿보였지만 뛰어난 체력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위었고 두 뺨은 움푹 꺼졌으며 안색에는 환자의 황달기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상당히 크고 검은 두 눈은 퉁방울처럼 튀어나와 있었고 대단한 고집을 가진 듯하지만 어딘지 초점이 흐려 있었다. 흥분하여 씩씩거리면서 말할 때조차 그의 시선은 자신의 심리 상태를 거역하고 있는 듯 무언가 당시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엉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란 무척 어렵습니다〉라고, 그와 이야기를 해본 사람들은 그를 평하곤 했다. 어딘가 모르게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듯한 우울한 눈빛을 하고 있다가도, 재미있고 장난기 어린 생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갑자기 호탕하게 터뜨리는 그의 웃음소리에 사람들이 놀라는 일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 서려 있는 약간의 병적인 기운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최근 우리 고장에서는 그가 몰입해 있던 너무나 불안정하고 〈방탕한〉 생활에 대해 모두가 잘 알고 있었고 소문이 자자했으며, 또한 골치 아픈 돈 문제 때문에 그가 아버지와 반목하는 매우 흥분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익히 알려져 있었다. 읍내에는 이 일과 관련된 우스갯소리들이 나돌았다. 우리 고장의 뛰어난 재판관인 세묜 이바노비치 까찰니꼬프가 어느 모임에서 〈즉흥적이며 비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인물이라고 주도면밀하게 평했듯이, 사실 그는 천성적으로 쉽게 발끈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드미뜨리를 설명 위 대목을 통해 우리는 드미뜨리가 어떤 상태인지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는 28세로 수려하지만 왠지 겉늙어 보이는 용모를 가졌다. 외모와 비슷하게 그의 심리적 상태는 심상치 않다. 근육질의 육체와는 달리 어딘가 아파 보인다. 그의 <얼굴은 여위었고 두 뺨은 움푹 꺼졌으며 안색에는 환자의 황달기>가 있다. 눈의 초점은 흐려있고 시선과 표정은 뭔가 상황에 맞지 않는 것 같다. 우울한 것 같다가도 갑자기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는 쉽게 흥분하고, 즉흥적이며, 쉽게 발끈하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방탕하고 건강하지 못한 드미뜨리의 삶은 그의 어린 시절의 불행했던 가족사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드미뜨리는 표도르의 첫 번째 아내 아젤라의 아들이다. 아젤라는 부유하고 명망 있는 미우소프 귀족 가문의 출신이었다. 많은 지참금을 갖추었고, 아름답고, 재기가 넘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 오필리아처럼 낭만적이고 불꽃같은 사랑을 꿈꾸었다. 사랑하는 신사와 사랑에 빠진 후 불가항력적인 장벽에 가로막힌 후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밤, 높은 절벽에서 강물로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처녀의 이야기를 동경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런 낭만 적이고 충동적인 생각에 사로 잡혀 표도르와 결혼했다. 가난하고 배경조차 없는 표도르와의 결혼을 위해 친인척과 가족들의 반대에 맞서는 일을 선택할 만큼 충동적이고 무모한 여자였다.
아젤라는 표도르와 도둑 결혼했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의 불행했다. 부부 사이는 무서질했고, 끝이 없이 다투고 갈등했다. 표도르는 아젤라에 대한 사랑보다는 그녀의 지참금과 상속금을 빼앗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았다. 결국 아젤라는 세 살짜리 아들 미쨔(드리뜨리의 애칭)을 남겨 놓고 가난한 신학교 출신 교사와 함께 도망쳤다. 표도르는 아내를 원망했고, 술과 여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지속했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아젤라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때 표도르는 자신을 가난에서 구해 준 아내의 죽음에 <어린아이처럼 통곡하기도>하고, <이젠 해방>이다 라며 소리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아내의 죽음 소식에 표도르가 <자신이 속박에서 풀려났다는 사실에 만족해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을 해방시킨 아내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표도르는 아젤라 사이에 둔 3살짜리 자식, 미쨔를 방임했다. 당시 외가 친척들은 드미뜨리를 돌볼 여건이 되지 않았다. 미짜의 외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후였고, 외할머니는 중병을 앓고 있었고, 이모들은 모두 출가한 다음이었다. 다행히 이 아이를 돌본 것은 그 집의 충직한 하인 그레고리였다. 소설 속에서 그의 어린 시절과 관련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을 방임하고 친모가 비명행사 하게 만든 아버지와 좋은 관계로 지냈을 리 없다.
3. 드미뜨리의 방황
아니나 다를까 그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했지만 모범적인 군인의 삶을 살지 못하고 술, 도박, 여자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중 죽은 어머니의 유산을 상속받을 권리를 주장하며 아버지와 대립한다. 아버지 표도르는 이미 유산에 해당하는 비용을 지불했으며 평소 낭비벽이 심한 드미뜨리가 이미 생활비로 유산에 해당하는 비용을 모두 탕진했다고 비난하며 아들과 대결한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그루센까라는 여자를 두고 경쟁하게 되면서 그들의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다. 조시마 장로의 암자에서 아버지 표도르에게 모욕까지 당한 후 그는 아버지를 찾아서 때려죽이겠다는 얘기를 여기저기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닌다.
친부 살해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친부살해는 소설의 고전적 주제이다. 특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역사는 ‘친부살해의 전통’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친부 살해의 그리스어 어원은 파트로크토니아(patroktonia)이다. 파트로(patro)는 아버지를, 크토니아(ktonia)는 살해를 의미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쫓아내고 신의 제왕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의 아버지 크로노스도 마찬가지로 할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후 제 왕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세대 갈등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도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들은 무수한 역사를 통해 신구세대의 갈등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야만 어두운 역사의 그늘은 찬란한 여명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표도르는 다음 세대의 앞길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어린 시절 자녀들을 방임했고 아이들이 장성한 이후에도 ‘꼰대스런’ 태도로 일관하며 자식들을 무시했다. 드미뜨리가 가졌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기성세대가 가진 한계를 넘어서고 싶은 자유를 향한 욕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버지 집의 담을 넘었고, 아버지와의 한판 대결이 시작되는 듯했다. 그러나 드미뜨리의 진짜 문제는 아버지 살해가 아니다.
4. 드미뜨리의 심경의 고백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큰형 드미트리가 막내 알료샤에게 자신이 고뇌를 고백하며 쉴러의 서사시 ‘환희에 넘치는 송가’(An die Freude)의 일부를 읊조리는 장면이 나온다.
올림포스 산정에서
어머니 데메테르는 하산한다
유괴당한 페르세포네를 찾아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야만스러워라
쉴 곳도 맞아 주는 이도 없고
그곳 어디에서도 여신을 찾아볼 수 없으니
사원은 결단코
신을 숭배하는 곳이 아니었구나.
들판의 달콤한 과일과 포도는
주연에서 빛나지 않으며
피로 물든 제단 위에는
육신의 잔해만이 연기로 화하도다
데메테르는 슬픈 눈길로
어디를 둘러보아도
곳곳마다 깊은 굴욕에 빠진
인간이 눈에 띌 뿐이로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페르세포네의 귀환, 프레데릭-레이튼,1891>
위에서 인용된 쉴러의 시에서 대지의 신 데미테르는 지하의 신 하데스에게 납치된 딸 페르세포네를 찾아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곡식과 땅의 생산성을 주관하는 데미테르는 어떤 신보다 인간에게 자애로운 신이다. 그러나 그녀는 야만성과 굴욕에 빠진 인간을 발견한다. 더 이상 인간은 신에게 과일과 포도를 바치지도 않고, 재단을 섬기지 않을 만큼 타락했다. 이 시는 드미뜨리 자신이야말로 신에게 반역하고 굴욕에 빠진 인간임을 자백한다.
5. 굴욕에 빠진 인간: 까쩨리나를 모욕한 죄
드미뜨리는 소위보 시절 전선의 어느 부대에서 근무하게 된다. 잘생긴 외모에 돈을 물 쓰듯 썼으므로 그 고장 사람들은 그가 부자라 믿고 평판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해당 부대의 나이 든 한 중령의 미움을 받게 된다. 그 중령은 일에서는 다소 고집불통이었지만, 미남이었고 마음씨도 좋아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리고 두 번 결혼했지만 부인들과는 모두 사별했다. 그의 슬하에 첫 번째 부인의 딸인 아가피야 이바노브나와 두 번째 부인의 딸인 까쩨리나 이바노브나를 두었다. 첫째 딸 아가피아는 매력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다. 항상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어느 곳에서든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옷 만드는 솜씨가 뛰어난 모두의 환영을 받았지만, 일한 대가로 돈을 요구한 적도 없는 고운 마음씨를 지녔다. 드미뜨리는 아가피아와 순수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된다.
어느 날 둘째 딸 까쩨리나 이바노브나가 뻬쩨르부르크로부터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등장으로 마을 전체가 활기를 뛰었다. 그녀는 금세 무도회, 야휴회의 여왕이 되었다. 모두가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혈안이 될 정도로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사건은 포병 중대장의 집에서 열린 모임에서 벌어졌다. 그 모임에 참석한 드미뜨리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예쁜 까쩨리나가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다가가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그녀 곁에 다가가 말을 걸었지만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심지며 경멸하듯 입술을 꼭 다물었던 것이다. 드미뜨리는 그녀의 이런 태도에 상처를 받았다. 겉으로는 잘생기고 멋진 젊은이었지만, 실제로는 무엇 하나 가진 것 없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녀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술판을 벌이고 난동을 부리다 결국 중령에게 체포당해 사흘간 영창에 가기도 했다.
드미뜨리가 다짐한 복수의 기회는 금세 다가왔다. 그와 우정관계를 유지해 온 첫째 아가피야를 통해 중령이 공금횡령으로 난처한 상황에 이르렀음을 알게 된다. 중령이 공금 4천5백 루블을 횡령해 시장의 장사꾼에게 빌려줬다가 돌려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두 시간 이내에 즉각 공금을 반납하라는 명령서를 받은 중령은 2 연발 사냥총으로 자살 시도를 했으나 이를 목격한 아가피야와 집안사람들의 제지로 불상사만은 막을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드미뜨리는 둘째 까쩨리나를 자신에게 보낸다면 4천5백 루블을 당장 주겠다고 제안한다. 때마침 어머니의 상속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아버지부터 6천 루블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드미뜨리는 알고 있다. 아가피야와 같이 천사 같은 여인에게 이런 비열하고 치졸한 짓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자부심이 강하고 덕망이 있으며 머리도 좋고 교육도 많이 받은 아가씨를 이런 방식으로 복수를 감행하는 자신이 얼마나 벌레 같은 인간인지를. 언니에게 이 얘기를 들은 까쩨리나는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드미뜨리에게로 찾아간다. 드미뜨리는 까제리나의 고귀한 희생의 모습을 보며 그녀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순순히 돈을 주지 않고 장난을 친다. 그녀에게 2백 루블이라면 몰라도 4천5백 루블을 내줄 수 없다며 비아냥거린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악랄하게 증오하는 이유는 그녀를 미친 듯이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곧 5천 원짜리 무기명 수표를 써서 그녀에게 건넸다. 그 돈을 받아 든 까쩨리나는 아주 정중하고 품위 있게 인사했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진심을 담아.
드미뜨리가 전해 준 돈 4천5백 루블은 중령의 공금으로 되돌아갔다. 모든 것이 해결되는 듯했으나 중령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3주를 누워 있다가, 갑자기 뇌연화증으로 사망한다. 장례를 치른 후 까쩨리나와 그의 가족들은 모스크바로 급히 떠났다. 까쩨리나는 <편지드릴 테니 기다려 주세요>라는 종이를 남겼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까쩨리나의 가까운 친척 중 어느 장군 부인이 갑자기 가장 가까운 두 상속자인 두 조카를 천연두로 잃게 된다. 갑자기 까쩨리나는 장군 부인의 상속녀가 디고 우선 8만 루블을 지참금으로 받게 된다. 우편환으로 4천5백 루블을 드미뜨리에게 보내고, 사흘 후에 약속했던 편지도 보낸다. 편지의 내용은 후반부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그녀를 떠나 그가 선택한 여인이 그루셴까이다. 그루셴까가 자신의 명의로 된 어음을 받은 사실을 알고 그녀를 패주러 갔다가 전염병에 걸려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루셰까의 집으로 가기 전날 밤 까쩨리나가 자기를 불러 3천 루블을 모스끄바에 있는 언니 아가피야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드미뜨리는 색욕에 빠져 돈을 모두 탕진해 버린다. 이후에 이 3천 루블은 아버지를 살해한 범행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되기도 한다.
5. 드미뜨리 vs 디오니소스
영원한 기쁨은 피조물의 영혼을
촉촉이 적셔 주며
발효라는 신비의 힘으로
생명의 술잔에 불꽃을 일으키리라.
그것은 수풀도 빛으로 유혹했고
태양 속에서 카오스를 일으켰으며
점성가가 다스릴 수 없는 천상에도
풀어놓았구나.
인자한 자연의 품속에서
숨 쉬는 만물은 기쁨을 들이켜누나.
모든 피조물, 모든 민중을
그것은 생산했음이라.
불행한 우리들에게는 친구들을 주었고
포도즙 같은 미인과 정을 통하니
벌레에게는 정욕을……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대지의 신 데메테르는 인간에게 술을 선물했다. 술은 힘들게 일하며 억척스럽게 자신의 삶을 일구어 가는 인간에게 내려진 천상의 축복 ‘암브로시아’와 같은 것이였다. 그것은 원래 천상의 신들이나 마실 수 있는 맛있고 매혹적인 음료였으나 인간을 연민한 대지의 어머니는 < 인자한 자연의 품속에서 숨 쉬는 만물은 기쁨을> 만끽하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불행한 인간은 그 축복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인간은 술에 취해 자신의 욕망 앞에 무너진다. 까쩨리나의 숭고한 희생과 사랑보다는 술과 탐욕에 빠져 그루쎈까를 욕망하는 드미뜨리가 그랬다. 그는 신으로부터 정욕을 선물 받은 인간은 벌레와도 같다며 괴로워한다. 인간은 신에게서 정욕을 선물 받았지만, 그 정욕에 현혹된 인간은 지옥 같은 삶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마음은 악마가 신과 싸움을 벌이는 전쟁터와 같다>며 좌절한다.
<프란시스코 추카렐리 Bacchanal>
드미뜨리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그리스 고대 비극의 주신 디오니소스를 떠올린다. 다소 긴 야이기이지만 디오니소스 탄생과 그의 축제 비극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려 한다.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의 신이다. 그 원료가 되는 포도의 신인 동시에, 포도를 일구는 농민들의 신이었다. 디오니소스는 포도와 와인의 신으로서 땅의 생산성을 책임졌으므로 그는 데미테르와 함께 풍요와 생명력을 상징한다. 디오니소스는 인간을 즐겁게 해주는 신일 뿐 아니라, 그의 잔은 생명을 탄생시키고, 인간의 모든 질병을 치유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술을 마심으로써 인간은 일순간이기는 하지만 용기가 생기며 두려움을 잊게되었다. 누구보다 디오니소스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약자들의 편이었다. 여성, 노예를 비롯해 음지에서 힘들게 지내던 많은 이들은 그의 신전에서 만큼은 실컷 취하고 노래하며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디오니소스와 관련된 설화는 매우 많다. 제우스와 세멜레의 아들이라는 설화, 아몬과 아말테이아의 아들이라는 설화, 제우스와 페르세포네의 아들이라는 설화, 레테의 아들이라는 설화, 데메테르와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설화 등등 다양하다. 가장 대중적으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게 세멜레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이야기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인용한 쉴러의 시는 데미테르와 페르세포네를 디오니소스와 연결시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한 둣 하다. 이들 모두 대지와 인간의 길흉화복과 깊이 관계되어 있는 신들이므로 개연성 있는 설정이라고 생각된다.
<세밀렐와 베로에: 나무위키>
하지만 나는 위 여러 설화 중 세밀레의 아들로 태어난 디오니소스의 이야기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한다. 세밀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리스 도시 국가 테베의 아름다운 공주였다. 난봉꾼 제우스와 세밀레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제우스와 세멜레의 사이를 질투하던 헤라가 어느 날 세멜레의 유모 베로에로 변장하여 ‘공주와 정을 통한 이는 제우스라는 신을 사칭하는 가짜일지도 모르니, 올림포스에 계실 때의 진짜 모습을 보여달라고 부탁해 보라’라고 꾀인다. 세멜레는 듣고 보니 귀가 솔깃했다. 그래서 한번 말을 붙여 볼 결심을 했다. 제우스를 만나자 세멜레는 우선 부탁이 있다고 말하고 나서, 그 부탁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은 채 꼭 들어달라고 졸랐다. 제우스는 무슨 부탁이든지 들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이 약속을 스틱스강에 걸어 서약했다. 제우스는 신들까지도 두려워하는 저 스튁스 강에다 걸고 서약을 세웠기 때문에 이제는 취소할 도리가 없게 된 셈이다.(참고로, 스틱스 강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 있는 강으로 제우스가 "스틱스 강을 걸고 맹세한 약속은, 신이라도 절대 어기지 마라" 라고 했음으로 스틱스 강을 걸로 한 맹세는 반드시 치켜야 한다).
<루벤스 Death of Semele, 나무위키>
이에 크게 놀라서 당황한 제우스는 세상 여러 가지 아름답고 귀한 물건들을 제시하면서 어떻게든 세멜레가 스스로 부탁을 철회하게 하려고 했지만 세밀레를 설득하지 못했다. 제우스는 올림포스로 돌아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빛이 가장 덜 나는 옷을 골라 입고 번개도 제일 작은 것으로 골라 들고 세멜레에게 갔다. 하지만 한낱 인간에 불과한 세멜레는 제우스가 아무리 약하게 해 보려 했어도 소용없었고 제우스를 보자마자 새카맣게 불타 죽고 만다. 그리고 세밀레의 태중에 있던 디오니소스를 제우스가 잽싸게 꺼내서 6개월도 채 안 된 태아를 자기 허벅지에 넣어서 꿰맨 다음 3개월을 기다려 건강한 디오니소스가 태어난다라는 게 그 탄생 설화 중 하나이다.
제우스는 그 신생아를 출산의 신 헤르메스에게 맡기게 된다. 헤르메스는 아타미스라는 어떤 도시 국가의 왕 그리고 그 두 번째 아내 이노에게 양육을 맡겼다. 그리고 그들은 디오니소스를 헤라의 질투에서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여자애로 변장해서 이제 키웠다. 이후에는 헤라를 피해서 에티오피아로도 가고, 아프리카의 여러 도시들을 전전하며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나중에는 림프들이 그 디오니소스를 양육하게 되는데 새끼 산양으로 변신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헤라의 증오심은 그칠 줄 몰랐다. 디오니소스가 성인이 된 다음에도 해라는 디오니소스를 실성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미치광이가 되어 이집트, 시리아, 북아프리카 지역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게 된다. 다행히도 그는 고대 근동의 프리기아라는 도시에 도착했는데 키벨레라는 여신이 디오니소스를 환대한다. 키벨레의 진심 어린 환대 속에 디오니소스는 점점 정상적인 생활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이제 막 광기에서 벗어난 디오니소스는 다시 트리케라는 지역으로 갔는데 또 한 번 그 지역을 다스리는 왕 펜테우스능 디오니스소와 그의 신도들을 박해한다. 그 지역에 있는 왕은 디오니소스를 감옥에 가두려고 했으나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도움으로 바닷속에서 피난처를 제공받아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그 왕에게서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디오니소스는 ‘그 왕을 죽여야 자신의 분노가 풀릴 거라는 신탁’을 받게 된다. 그 신탁을 듣게 된 신도들은 분노하며 그 왕의 사지를 찢어서 죽인다.
<안토니오 템페스타 The Death of Pentheus, 나무위키>
군중들은 하나 남김없이 우루루 펜테우스에게로 돌진했다. 펜테우스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떨며 변명하고, 혹은 자기 허물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지만 군중은 몰려와 그를 쥐어뜯었다. 펜테우스는 하릴없이 이모들을 향해, 어머니를 좀 말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느 틈에 아우토노에Autonoe는 이쪽 팔, 이노Ino는 저쪽 팔을 잡아당겨 그의 몸을 찢어 버렸다. 어머니 아가우에가 외쳤다.
「이겼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영광은 우리 것이다!」
<그리스 신화, 토마스 불펀치>
그리스 신화 속에는 많은 문학의 전형들이 담겨 있다. 나는 [까라마조프가 씨네 형제들]을 읽으며 파란만장했던 드미뜨리의 삶을 보며 디오니소스의 그것을 떠올렸다. 돈과 욕정에 빠져 어머니를 탐닉했던 아버지 표도르, 태어나자마자 방임되고 버렸다. 어린 드미뜨리는, 성인 되어서 자신의 상처를 술과 욕정으로 낭비하며 보상받고자 했다. 그리고 광기로 가득 차 여기저기를 떠돌았던 그의 삶 속에서 나는 영원한 이방인, 비극의 신 디오니소스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을 박대했던 왕의 사지를 찢어야 분노가 풀린다는 그 상징 속에서 다시 아버지의 표도르의 죽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제 그는 자기를 푸대접한 그 왕을 죽여야만 한다. 이로써 신탁이 내려준 운명적 비극은 종결될 수 있다.
6. 나는 환대받는다. 고로 존재한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화로 근대 철학의 여명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위대한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는 '환대'를 인간의 이성적 능력, 도덕적 능력, 미적 능력과 더블어 생득적(선험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환대받기에 적합한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디서나 환대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드미뜨리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슬픈 운명의 주인공이었다. 그를 위한 환대의 자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여기 저기를 떠돌아 다니는 이타카의 왕 오뒷세우스처럼 자신의 존재를 잃고 방황했다.
어린 미쨔의 인생은 디오니소스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다. 표도르는 애초에 세 살짜리 아이를 책임질 위인이 되지 못했다. 표도르의 방탕한 폭음과 창녀들이 드나드는 환경은 정말 최악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그는 자식을 그냥 방임했다. 자식을 폭행하거나 학대할 위인도 되지 못한 것이다. 충직한 하인 그리고리가 그 아이의 양육을 맡았다. 이 어린아이의 외가는 이 아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미짜의 할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외할머니는 중병을 앓고 있다. 이모들도 모두 출가한 상태이다. 어머니의 사촌오빠 미우소프가 유일한 후견인이었다. 그는 프루동이나 바꾸닌과 개인적 친분이 있을 정도의 자유주의 사상가였다. 그는 동생의 아들이 방임되었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으나 2월 프랑스혁명에 대한 진심만큼은 못했던 것 같다. 2월 혁명이 발발하자 미쨔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모스크바에 있는 그의 부인이 죽고, 시집간 그녀의 딸들 중 하나가 미쨔를 맡았다. 그 후 4번 양육자가 변경되면서 여기저기를 전전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보호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정신분석학자로 존 보울비에 따르면 생애 초기의 양육자와 영유아의 유대 관계가 한 사람의 일생 동안의 정서 발달과 사회적 관계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안정적인 양육자와 애착 형성은 유아가 자신감을 갖고 세상으로 나가 탐험할 수 있는 안전한 기반이 되어 준다는 것이다. 안정적 애착 관계를 경험한 곤경에 처했을 때 돌아갈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충분히 안심하고 모험을 지속할 수 있다고 한다. 불쌍한 드미뜨리는 막내 알렉세이처럼 어머니의 얼굴에 대한 기억조차 남지 않았다. 이제 미쨔에게 필요한 것은 그 어린 시절의 결핍을 채워줄 누군가이다.
6-1. 첫 번째 환대: 호도 한 푼트
드미뜨리와 관련된 내용 중 호도 한 푼트(푼트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도량형 단위로 1푼트는 약 409.5g에 해당한다)의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다. 증인으로 출석한 의사 게르첸쉬뚜베는 드미뜨리의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법정에서 그에게 유리한 증언을 시작한다. 증인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환자에게 진료하던 선량한 의사였다. 그는 까라마조프 일가를 오랜동안 알고 지냈으며 드미뜨리를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갓난아이 시절에 아버지 집 뒤뜰에 버려진 채 단추가 하나밖에 달리지 않은 바지를 입고 맨발로 땅바닥을 뛰어다니던 일>을 기억할 정도로 드미뜨리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가엾은 드미뜨리는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운명을 타고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품성을 지닌 청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드미뜨리를 양육해 줄 지혜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었음을 안타까워한다. 결국 드미뜨리는 방탕하는 삶(쉬빠지렌) 속에서 <지혜는 방탕에 허비되었고, 너무나 깊이 빠져 들어서 이성을 잃고 만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미쨔는 감사할 줄도 알고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이었다 회상했다. 그다음 이야기는 너무 감동적이므로 그대로 인용하는 게 좋겠다.
“나는 그 꼬마가 너무나 가엾어서 1푼뜨라도 사줘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입니다…「나는 그 애한테 호두 1푼뜨를 사다 줬죠. 대체 누가 그 꼬마한테 호두 1푼뜨를 사다 줬겠습니까?... 나는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그 꼬마한테 이렇게 말했었죠…..나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그 꼬마한테 이렇게 말했었죠…. 얘야, 성부 Gott der Vater.〉 그러자 그 애는 생글거리면서 〈성부!〉 하고 따라 하더군요. 그래서 〈성자 Gott der Sohn〉라고 했더니, 다시 웃으면서 〈성자〉 하더군요. 또 한 번 〈성령 Gott der Heilige Geist〉 했더니, 역시 웃으면서 〈성령〉 하고 따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나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틀 후 그 꼬마는 내 곁을 지나다가 〈아저씨, 성부, 성자〉 하고 소리치지 뭡니까. 〈성령〉이란 말만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가르쳐 주었지요. 어쨌든 나는 그 애가 너무나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중략> 그 후로 그 애는 어디론가 보내져 더 이상 만날 수가 없게 되었죠. 그리고는 23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 어느 날 아침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웬 젊은이가 불쑥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는데, 그 젊은이는 손가락을 들어 올린 채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Gott der Vater, Gott der Sohn, Gott der Heilige Geist! 전 지금 도착하는 길입니다. 호두 1 푼뜨를 주셨던 일에 감사드리러 찾아왔지요. 왜냐하면 그때는 제게 호두 1 푼뜨를 주었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하지만 아저씨는 제게 호두 1 푼뜨를 주셨어요〉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했던 젊은 시절과 맨발로 마당에 서 있던 가엾은 어린애를 회상하고는 만감이 교차해서 이렇게 말했죠. 〈자네는 감사할 줄 아는 젊은이일세, 자네가 어렸을 때 내가 준 호두 1 푼뜨를 평생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야〉 하고 말입니다. 포옹한 후 축복했었죠. 나는 눈물이 나왔습니다. 저 사람도 웃고는 있었지만, 역시 눈물을 흘렸습니다……. 진정한 러시아 인은 울어야 할 때 흔히 웃곤 하거든요. 하지만 저 사람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아!”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이 감동적인 이야기 속에 맨발로 마당에 서 있던 가엾은 어린 미쨔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온다. 그리고 미쨔는 호두 한 푼트에 감사하며, 은혜를 오랜 시간 기억할 줄 아는 착한 마음을 지닌 천사였다. 비록 그의 착한 심성을 알아주는 양육자를 만나지 못하며 분노하고 방황했지만 자신을 위로해 준 그 의사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고 감사의 인사말을 건네던 착한 심성을 가진 청년이었던 것이다. 그가 비록 젊은 날 격정이나 울분에 사로잡혀 방황하였더라도 호두 한 푼트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가슴속에 깊게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의 주제인 ‘한 알의 밀알’을 상징하는 코드인 것이다.
6-2. 두 번째 환대: 까쩨리나
이제 앞서하지 못한 까쩨리나의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앞서 얘기한 대로 그녀는 드미뜨리의 복수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러나 기적과 같이 그녀는 아버지를 횡령의 죄에서 구원해 준 드미뜨리에게 진심 어린 사랑고백의 편지를 보낸다.
“미칠 듯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저 이반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좋아요. 꼭 제 남편이 되어 주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저는 어떤 일로도 당신을 구속하진 않을 테니……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고 싶어요. 당신을 자신으로부터 구원해 드리고 싶어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도스토옙스키>
까쩨리나의 진심 어린 편지를 받고 드미뜨리는 그녀의 사랑을 감당할 수가 없다. 모스크바에 있는 이반을 보내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도 했다. 비록 까쩨리나와 정식으로 약혼도 하게 되지만, 결국 천사와도 같은 알료샤를 보내 자신은 더 이상 그녀를 찾아가지 않겠다고, 정중한 작별인사를 전하게 된다.
하지만 까쩨리나의 헌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살인 재판 과정에서 모스크바에 있는 변호사를 초빙해 그의 무죄 판결을 돕는다. 당시 이반에게 마음이 있던 까쩨리나는 결정적인 증거물을 제시해 이반이 아니라 드미뜨리가 유죄 판결을 받도록 복수하는 장면도 있지만, 결국 충동적인 증오심에서 벗어나 미쨔를 탈출시키려 한 것은 까제리나이다. 까쩨리나의 아버지를 향한 숭고한 희생과 자신에게 보내준 진심 어린 사랑의 마음은 드미뜨리의 상처받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며 작은 틈을 만드는 따뜻한 사건이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6-3. 마지막 환대: 상처받은 치료자(Wounded Healer)
증인 심문이 끝나고 검사가 조서를 마무리할 즈음 드미뜨리는 너무 피곤한 깜빡 잠이 들게 된다. 그는 꿈 속에서 장소를 알 수 없는 곳에서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이다. 그는 우중충하고 볼품없는 시골 농가들을 보게 된다. 그중 절반은 불에 타버려 그을린 기둥들만 서 있다. 마을에 도착해서 보니 마을에 큰 불이 났던 것 같다. 한결 같이 마르고 흑빛 얼굴을 한 많은 여인들이 행렬을 이루고 길게 늘어서 있다. 그중 구석에 스무 살 남짓의 갸름하고 깡마른 여인에게 시선이 간다. 그리고 그녀의 품 안에서 울고 있는 갓난 애기, <말라붙은 젖가슴에서는 젖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은 것이 분명한 갓난애는 앙상한 두 주먹을 쥐고 몸부림을 쳐댔다.>
이 모습을 보고 미쨔는 마부에게 묻는다. <왜 저렇게 울고 있지? 왜 저렇게 우는 거야?> 마부가 대답한다. < 아귀(餓鬼)들이죠. 아귀들이 우는 겁니다.> <아귀>라는 농부들의 표현에 가슴이 아팠다. 그냥 아기가 아니라 배고픔에 울부짖는 <아귀>라는 말에 큰 동정심이 유발되었다. 그리고 계속 묻는다. 아이들이 왜 울고 있고, 추위에 두 팔을 내 놓고 있는 건지.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들은 집이 불타 버려 빵 한 조각도 남지 않은 불쌍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집이 타서 동냥이라도 하고 있지만 빵 조각 하나 구할 길이 없다고 했다.
미쨔는 여러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어디 한번 말해 보게, 어째서 집에 불이 난 어머니들이 저렇게 서 있는지, 어째서 저렇게 불쌍한 사람들이 존재하는지, 어째서 저렇게 불쌍한 아귀들이 있는지, 어째서 초원이 저렇게 황량해졌는지, 어째서 저들은 서로 안아 주고 입맞춤하지 않는지, 어째서 즐거운 노래를 부르지 않는지, 어째서 저들은 혹독한 재난 때문에 까맣게 변했는지, 어째서 아귀들에게 젖을 주지 않는지 말이야.>
그리고 미쨔는 자신의 질문에 울고 심은 감정으로 스스로 이렇게 답한다. <아귀들이 더 이상 울지 않도록, 까만 얼굴의 바싹 마른 아귀의 어머니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지금부터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무언가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시간을 질질 끌지 않고 까라마조프적 결단을 내려 지금 당장 무언가 도와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그의 옆에는 이제 그루셴카가가 있다. <제가 당신 곁에 있잖아요, 전 이제 당신 곁을 떠나지 않겠어요, 평생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그녀의 사랑스럽고 감동적인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울린다. 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그리고 자신을 부르는 새로운 빛을 향해 가고 당장이라도 나서고 싶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너무 감동적이다.
<그는 상자 위에 정신없이 쓰러져 잠들었을 때는 없었던 베개가 자기 머리맡에 놓여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마치 남모르는 자선을 받은 것처럼 환희에 젖은 감사의 마음에 빠져 들면서 울먹이는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친절을 베푼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증인들 중의 한 사람이나, 아니면 조서를 작성하던 니꼴라이 빠르페노비치가 측은한 마음에서 베개를 베어 주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미쨔의 영혼은 눈물로 온통 전율하고 있었다. 「여러분, 나는 아주 좋은 꿈을 꾸었습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도스토옙스키>
어려서 부모와 친치들에게 외면당한 미쨔의 삶이 완전히 변화한다. 이방인과 같은 삶 속에서 미짜를 다시 살린 것은 그를 진심으로 받아 준 환대의 경험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불쌍한 어린 미쨔를 연민하며 건네 준 호두 한 푼트, 타인의 향한 분노 속에 숨어 있던 사랑의 불씨들, 그리고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받아 주겠다던 그 사랑의 약속… 비록 안정적인 양육자가 없이 술과 여자에 의지하며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던 미쨔가 다시 세상 속으로 나가겠다며 희망을 키워나가는 장면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치유자가 되어 춥고 배고픈 아귀들과 아귀들의 어머니들에게 손 내밀겠다는 상처받은 치료자가 되겠다고 한다.
7.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드미뜨리의 비극적 삶 속에 숨어 있는 희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비극의 기원을 되돌아보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비극은 원래 디오니소스가 그 기원이다. 일반적으로 비극은 희극과 대조되는 슬픈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생각하다. 하지만 애초에 비극은 염소를 잡아 신에게 바치는 제의적 합창이었다. 즉, ‘염소’(tragos)의 ‘노래’(oide), 염소를 제물로 바칠 때 하는 노래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 앞에서 성실히 일할 것을 다짐하고 풍요를 기원했다. 그 제사의 주신은 디오니소스였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이다. 그 원료가 되는 포도의 신인 동시에, 포도를 일구는 농민들의 신이었다. 디오니소스는 포도와 와인의 신으로서 땅의 생산성을 책임졌으므로 디오니소스 축제는 주로 풍요와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람들은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염소(디오니소는 어린 시절 헤라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산양(염소)으로 변장한 적이 있다)를 잡아서 제물로 올리면 제사장이 나서서 의식을 시작했다. 그러면 합창단이 뒤에 빙 둘러서서 노래를 불렀다. 이것이 바로 비극의 어원인 ‘트라고디아(tragodia)’이다
기원전 534년, 아테네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기원전 600~527년)는 디오니소스 제전을 처음 개최하였다. 당시 아크로폴리스 신전 곁에 딸린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열렸다. 비극경연 대회는 신관의 주관으로 약 1만 8천여 명이 모여 관람을 하였다. 당시 아테네 인구 10만 명 중 절반이 노예였고, 나머지 2만 5천 명이 여성이었고, 그중 19세 미만의 연령을 제외하면 약 2만 명의 남성이 자유시민 계급에 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가운데 해외에 출타 중인 사람, 병들고 노약한 사람,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는 공무에 있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비극 공연을 관람하는 것은 단순히 취미활동이 아니라 국가에서 주체하여 모든 시민들이 참여해야만 하는 공적이고 의무적인 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비극은 오락거리가 아닌 제전이었고, 그 내용 또한 단순히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디오니소스 극장의 중에, 측 관객들이 앉아 있는 객선과 배우들이 연기하는 무대인 ‘스케네’(skene)사이에는 합창단이 춤과 노래를 하는 ‘오르케스트라’라는 둥근 마당이 있고, 그 중앙에는 제단의 흔적이 있다. 관객들은 디오니소스 신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참석한 신도들이었고, 오르케스트라의 합창단을 지휘하는 지휘자는 제의를 집행하는 제사장이었으며, 그의 지휘를 따라 노래하는 합창단은 제의에 신성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신도들의 마음을 대변해서 신에게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구하며 가호를 기원하는 신관들이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죄를 지었을 때, 그 죗값을 몸소 치르기 위해 직접 벌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대신, 신에게 제물을 바치며 용서를 구했다. 제물은 제물을 바치는 ‘죄인’의 또 다른 ‘자아’였다. 죄를 지었기에 죽임을 당하고 불 위에서 태워지면서 그와 동시에 죄를 지은 ‘나’는 죽고, 제사가 끝나면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부활의 은총을 누린다. 제물이 죽을 때 나도 같이 죽고, 제물이 태워질 때 나도 태워지며, 제물이 사라질 때 나도 사라지는 체험이 구약의 제사였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그 전통을 대체한다. 개신교인들은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다. 이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한 예수를 바라보며 그의 삶과 죽음을 기념하며 자신도 예수의 삶을 살아갈 것을 맹세한다.
슬픈 운명을 타고나 온 세상을 떠돌며 광인으로 살았던 그가 이제 축제의 중심에 서 있다. 아테네 시민들은 제우스의 강한 빛에 불타버린 슬픈 어머니의 몸속에서 죽을 뻔했지만, 아버지의 허벅지에서 다시 부활한 디오니소스를 기념한다. 그리고 우리 삶 속에서 마주하기 힘든 수많은 비극들이 이렇다. 메데이아는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비참하게 죽인다. 자신의 딸을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트로이 전쟁에 나선 후 고향으로 돌아온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자신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무참히 살해당한다. 아가멤논의 자식들은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에게 피의 복수를 하다.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어머니는 아들과 결혼해 자식을 낳는다는 신탁을 피하기 위해 갓난 이이를 죽이려 하지만, 그 아이는 결국 살아남고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가, 섞여서는 안 될 어머니와 결혼하고, 죽여서는 안될 아버지를 죽이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비극들이 공연된다. 디오니소스 극장에 참여한 아테네 시민들은 비극 공연을 보면서, 비극의 주인공을 제물로 삼는 제의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가족, 사랑, 배신, 욕망, 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숙고하며 주인공과 감정이입한다. 그리고 그들은 극단적 비극을 보며 서로를 연민하고 자신의 일상과 과오를 되돌아보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연기자가 아니라 관객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 비극은 연극, 소설, 드라마, 영화의 전형이 되었고 아직도 우리들 곁에서 쓰여지고 읽혀지고 보여지며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 남긴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라는 말은 당시 외투 한벌 살 수 없었던 러시아 민중들의 가난한 삶을 그린 고골의 소설처럼 가난이란 문제의식을 뼛속 깊이 새긴 그의 고민과 연민의 김정을 대변하는 말이다. 그의 처녀작이 <가난한 사람들>인 것처럼, 도스토옙스키가 시대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골몰하며 일생을 보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비극적 구조가 그리스 비극의 전통 위에 단단히 서 있다고 확신한다. 내가 서두에서 던진 질문처럼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읽고 도스토옙스키를 셰익스피어에게 버금가는 자리를 헌정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나는 오늘 시대를 초월해 이 위대한 작품을 우리에게 선물한 까라마조프 선생님께 진심 어린 인류애적 감사를 보낸다. 그리고 이 시대에도 환대받지 못하고 춥고 배고픈 수많은 아귀들의 아버지가 되기 위해 ‘나를 부르는 새로운 빛을 향해’ 한 걸음 내딛을 것이다.
[참고 문헌]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김헌, 서울대출판부
그리스 신화 사전, 피에르 그리말(최애리 역), 열린 책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도스또옙스끼(이대우 역), 열린책들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백승영, 책세상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 출판, 엑스북스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관, 베르쟈예프, 행복한박물관
발달심리학, 장휘숙, 학지사
비극의 탄생, 니체, 아카넷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문학과 지성사
신들의 계보, 헤시오도스(천병희 역), 헤시오도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소포클레스(천병희 역), 숨
아이스퀼로스 비극 저집, 아이스퀼로스(천병희 역), 숨
그리스 로마 신화, 토마스 불펀치(최순혁 역), 범우사
천년의 수업, 김헌, 다산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