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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Jan 20. 2024

죄와 벌: 커피프린스 1호점의 추억

죄와 벌: 어느 배우의 죽음


1.  짱구박사, 과학자가 되다


 내 어릴적 별명은 짱구박사였다. 당시 유행했던 어린이 인형극으로 기억한다. 똘똘하고 당찬 짱구박사는 어린 친구들의 여러 문제를 기발한 발명 아이디어로 해결해 주던 히어로 같은 존재였다. 그 시절 나는 좀 기발하고 똘똘한 아이였던 것 같다. 예를 들면, 나는 당시 친구들의 집 앞에서 '누구야 노올자'하며 친구들을 불러모으던 게 일상이었는데, 신박한  '깡통 전화기'를 제안했다. 각자의 집 문앞에 깡통에 낚시 방울을 달아 연줄로 연결해 집과 집을 잊자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당기면 딸랑 딸랑 소리가 나는 식이다. 이런 제안을 듣고 동네 형들은 이렇게 말했다.


일마 이거 완전 짱구박사 아이가?

대가리도, 앞짱구 뒷짱구네.

일마 진짜 짱구 박사 맞네. 하하하


그 이후로 나는 동네의 현인이 되었다. 형들과 친구들이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나를 찾아와서 물어봤다. '짱구박사, 니 이런 것도 해결할 수 있능기가? 한번 말해바라' 그 후로 내꿈은 박사가 되었다. 짱구박사 말고 흰 가운 입고, 플라스크를 뱅뱅 돌리는 진짜 과학 실험실의 박사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문과 출신으로 심리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내 관심은 과학적 심리학 그것도 생리심리학과 신경삼리학에 있었다. 꽤 긴 시간을 생리심리학(생물심리학이라고도 한다) 실험실 막내로 지냈다. 대학원 입학을 생각하며 실험실의 기본적인 일들을 몸으로 익혔다. 실험용 생쥐들을 키우고, 해부도 해보고, 약물을 주입하고, 대조되는 환경에 노출시킨 다음 전자파 기기의 전극을 뇌에 직접 꼿고하는 동물 행동 실험도 했다. 피험자들의 심리 실험 설계, 설문지 코딩 작업, 통계 분석 등 대학원생들이 하는 연구 활동도 조금씩 익혀 나갔다.


그때 내가 관심 있었던 분야는 신경과학이었다. 당시 국내의 신경 과학은 태동기에 가까웠다. 전공필수였던 신경심리학 책의 서문을 보다 숨이 멎을 듯한 문장을 발견했다.기억이 흐릿하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다.


과학이 아직 정복하지 못한 영역은 단 그 두 가지 이다. 그 중 하나는 밤하늘에 빛나는 총총한 별에 관련된 학문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정신의 심연을 연구하는 첨단 학문이다.신경심리학은 이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인류 정복의 탐험대와 같다.


나는 이 책을 보고 완전히 매료되었다. 인간의 사고를 어떻게 측정하고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신경심리학적 접근은 매우 흥미롭고 근사하기 까지 했다. 그것을 공부할 수 았는 곳은 마국이었다. 미국 유학을 통해 학업을 지속하는 것은 정해진 미래 같아 보였다. 학부생이지만, 대학원에서의 더 깊은 공부를 위해 필요한 고급 통계, 실험 설계 등을 선행 학습했다. 공부가 재미있고 좋았다. 남들은 취업도 힘든 심리학을 왜 공부하는지 의아해 했지만 나의 전공에 대한 만족도는 항상 대만족이였다.


2.  영어 까막눈

 

나는 학창시절 한번도 학원을 다녀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공부한 동네가 모두 시골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그냥 학원에 갈 돈이 없었다. 기본적인 영어 문법이나 단어 하나 외워보지 못한 채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중학교 영어는 그런 데로 할만 했던 것 같다. 기본적인 인사, 문법으로 시작했으므로 차근 차근 공부하면서 적응할 수 있었고 성적도 좋았었다.


그런데 나의 영어에 대한 흑역사는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되었다. 입학 후 첫번째 시험이 반편성 고사였는데 시험의 수준이 달랐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1 수준의 평이한 문제들이었지만 중학교와는 수준 차이가 엄청났다. 무엇보다 영작 문제가 나를 괴롭혔다. 무려 배점이 30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학교에서는 단 한번도 작문을 배워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당연히 0점이었다. 나머지 문제를 다 맞춘다고 해도 70점. 나는 고교 시절 내내 작문의 벽을 넘지 못했다. 100점 만점에 60점 대를 전전긍긍하며 학업에 대한 자존감은 바닥을 넘어 하데스로 하강하고 있었다.  영어 공부에 대한 얘기는 언젠가 더 할 날이 있을 것이다. 유학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3.   강남유명어학원 종합반 A팀장의 좌절


3년의 학사장교 복무를 마치고, 바로 1년 동안 유학을 준비했다. 뒤돌아 볼 여지가 없었다. 군대를 전역하자 마자 강남에 있는 유명 어학원 종합반에 등록했다. 이것은 내가 번 돈으로 내가 등록한 첫번째 학원이다. 학부 시절 유학을 동경했기에 영어 공부에 진심이었다고 자부했다. 아주 잘하는 영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영어 원서도 그럭저럭 읽었고, 함께 lab에 계셨던 해외 객원 연구원들과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합반 수강 하루만에 나는 종합반 수업 대신 초급반 수업으로 하향해 재등록하게 되었다. 스스로 수준 파악이 된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기초 문법, 어휘, 작문, 듣기 까지 완벽한 0점 재조정이었다. 그렇게 두 달을 준비한 후 다시 종합반으로 승급했다. 나는 이 결정이 내게 매우 큰 역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결정은 무엇보다 기초가 부족했던 나이기에 건출물을 올리기 전 설치하는 주춧돌처럼 나의 영어 능력 향상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이 어학원은 스터디팀을 구성해줬다. 늘 맨 앞에 앉아 열심히 수업을 들었던 나는 A팀에 배정되었다. 나는 종합반 A스터디 모임의 팀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종합반 A팀장은 약간 상징적인 의미 부여를 받는 자리였다. 매번 기수의 A팀장은 최고 점수를 받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시간도 돈도 부족했다. 이미 2개월 이상을 토플 공부에 사용했다. 학원비, 교재비, 교통비, 식비로 대략 월 백만원 정도 사용했었다. 군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의 유학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유학을 가려면 돈을 아껴야 했다. 그래서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다. 단어장이 너덜너덜해 질 정도로 외우고 또 외웠다. 난청이 생길 정도로 듣고 또 들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나도 만족스런 기회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전설의 A팀장은 이제 유학 준비에 들어간다.

   

 유학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GRE 시험도 그럭 저럭 잘 준비했다(사실, GRE에 비하면 토플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오늘은 너무 길게 얘기하지 않겠다). 필수 영어성적, 자소서, 학업계획서, 추천서 등 모든 준비는 끝났다. 가고 싶었던 대학 4군데에 지원했고, 2군데로부터 합격 통지(adimission)을 받았다. 그 중 한곳은 미국 동부의 공대 중심의 연구 대학으로 명망이 높은 대학이었다. 너무 가고 싶었다. 해당 학교로 입학을 희망한다는 메일을 보냈다. 이제 유학을 떠나면 되는가했다.


그러나 유학생 비자를 준비하면서 미국 유학을 위해서는 보호자의 재산을 증빙할 수 있는 서류가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기억이 흐릿한데 부모의 현금 자산을 증빙할 수 있는 통장 잔고증명서, 소득증빙 증명서, 부동산 자산 같은 것들의 서류들이었다. 학교 담당자에게 문의도 하고 여기 저기 자료도 찾아봤었다. 부모라는 단어 앞에 너무 무기력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좌절감을 느꼈다. 영어 성적은, 추천서는, 학업 계획서와 자기소개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보호자의 재산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내 영역 밖의 일 아이었다.  보호자가 없으니 보호자의 자산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준비는 참 힘들고 어려웠지만 포기는 너무 빠르고 쉬웠다. 그리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취업을 준비한다. 이렇게 다짐히면서


“돈을 벌자. 돈을 충분히 벌어서 내 통장에 필요한 만큼의 자산을 들고 당당하게 다시 가보는 거야. 괜찮아. 할 수 있잖아.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4.   패션 MD와 <커피 프린스 1호점>


구직 생활을 시작하고 2개월 만에 누구나 알만한 유통 회사에 입사했다. 당시 유통사관학교라 명명될 정도로 신입교육부터 만만치 않았다. 직원들 중에 이 회사를 ‘세븐일레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 화사에서 강조하던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구호에 맞게 7시 까지 출근하고 11시가 넘어서 퇴근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하루 하루가 너무 힘들었다. 군생활을 통해 배웠던 패기와 자신감은 금새 소진되었다.


당시 신촌에 본사가 있었는데 업무를 정리하고 밤10시에 퇴근하는 내게 선배가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집에 무슨 일 있어?” 나는 그 선배의 말이 진심으로 내가 걱정되어 했던 말임을 안다. 어쨌든 새벽 첫차를 타고 출근해 밤 막차를 타고 퇴근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치열하게 일해야 했다. 그때는 모두가 12시가 넘어 퇴근하는 게 일상이었다. 12시는 지하철의 막차를 탈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혹 12시가 넘어서 퇴근하게 되는 상황에 한해 법인카드를 사용하는 것도 허락될 정도로 회사 생활은 격무의 연속이었다.


 나는 지금은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한 SPA 브랜드의 글로벌 소싱 MD였다. 유학 때문에 하게된 영어공부가  도움이 되었다. 글로벌 소싱은 쉽게 얘기하자면 

상사맨과 같은 일이다. 기획자나 디자이너가 상품을 설계하면 해외 생산과 무역, 유통을 담당하는 직무였다. 전통적인 무역회사는 아니지만 상사맨이 가장 비슷한 표현이다. 그래서 드라마 <미생>을 무척 좋아한다.


내가 배치된 브랜드는  50명 남짓 함께 일하는 신생 브랜드였고 거기서 내가 막내였다. 직장 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신규로 생긴 사업부는 정말 일도 많고 탈도 많다. 그런데다 내가 막내였으므로 대부분의 하기 싫고 급한 일들은 내게로 집중되었다.


한번은 새로운 시즌을 두 달 앞둔 시점에 급히 신규 오더를 결정하게 된 일이 있다. 기본적으로 상품 설계는 샘플의 컨펌과 생산, 수출입, 물류 일정을 고려해 최소 3개월, 길게는 6개월의 리드타임(상품 기획에서부터 매장 입고까지의 기간)을 둔다. 2개월은 정말 불가능한 일정이었다. 하물며 이 오더는 생산 확정도 되지 않은 말 그대로 출발선에도 서지 못한 운동 선수와도 같은 상황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 촉박한 일정을 수용해줄 해외 제조사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는 즉시 중국의 생산지로 날아갔다. 그리고 수 많은 공장의 책임자들에게 납기를 맞춰 줄 것을 사정하고 또 사정했다. 생각해 보라. 아직 무엇을 생산할지 정해지지도 않은 제품을 최대한 빨리 생산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많은 공장들을 만나 설득했지만 그들의 일관성 있는 대답은 ‘No’ 였다. 이미 시즌이 임박했고 모든 공장들의 생산은 빈틈 없이 계획된 상태였다. 큰일이다. 이번 오더는 생산불가이다. 그러던 중 한 공장 사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주일 이내에 샘플만 확정한다면 생산을 해주기로. 그러나 관건은 ‘생산 전 샘플(pre-production sample)’의 컨펌이었다. 그날 바로 작업지시서를 들고 공장의 샘플실로 갔다. 공인들과 주야를 함께 상주하며 샘플 작업을 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그 샘플을 들고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이제 샘플 컨펌만 하면 된다. 힘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방법을 찾을 수 있어 기뻤다. 인천공항에 발을 디뎠고 총알처럼 신촌으로 달려갔다. 샘플 컨펌 회의가 열렸다. 다행히 샘플의 완성도는 좋았고 바로 생산 투입을 결정했다. 중국 공장에 전화를 했다. 이제 생산만 하면 된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를 만났다.


샘플 컨펌 회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잠시 화장실에 갔다. 그리고 잠시 기억을 잃고 쓰러졌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동료 중 한 분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바로 사내에 있던 건강증진실로 나를 데려다 줬다. 사내 간호사가 혈압을 측정했는데 극단적인 수치가 나왔다. 당시 회사가 직영으로 운영하던 클리닉이 있었다. 간호사가 빨리 당산에 있는 클리닉 원장님께 전화를 해 줬고 나는 바로 택시를 타고 당산으로 달려갔다. 클리닉 원장님과 진료를 마치고 내린 결론은 휴직이었다. 업무상 스트레스로 힘들었던 상황과 과로 누적으로 혈압이 이상 위험 수위에 있다고 하셨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생명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으니 일을 중단하고 쉬어야 한다고 단호히 말씀하셨다.


처음에 나는 그럴 수가 없다고 항변했다. 내가 해야 할 많은 급한 일들에 대해, 그것을 당장 마무리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원장님께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무책임하게 업무를 쉬는 일은 할 수 없음을 말씀 드렸다. 원장님은 이렇게 얘기하셨다.


내가 뭘 도와 주면 되나요? 내가 도와 줄 있어요. 제가 당장이라도 본부장에게 전화해 줄 수 있어요. 본부장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회장님께 직접 보고 드릴 수도 있구요. 직원의 건강을 돌보는 것이 내 일이니 나는 당신의 상태를 모른 척 할 수 없어요.


나는 원장님의 단호하지만, 친절한 얘기에 설득 당했다. 그리고 바로 원장님은 본부장과 통화했고, 본부장은 회장님께도 이런 사정을 보고 드렸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6개월 유급휴직과 클리닉 상담을 무상으로 지원 받게 된다. 6개월을 쉬면서 정신 없이 일어났던 일련 사건들 속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를 다시 돌아봤다. 무엇보다 그때 원장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정말 죽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일과 삶의 의미를 다시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 즈음 내가 즐겨 보던 드라마가 있었다. 그게 바로 ‘커피 프린스 1호점’이다.


5.   커피 프린스 1호점, 글로벌 커피 헌터의 꿈  


 <커피 프린스 1호점>을 보는 것이 너무 좋았다. 거기에서 발견한 따뜻한 사람들, 그들의 역경과 분투… 그리고 커피, 커피 그 자체가 좋았다. 솔직히 회사의 상담 프로그램보다 드라마를 보면서 스스로를 많이 위로했다. 특히, 은찬은 또 다른 내 자아 같았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희망의 에너지를 잃지 않고 억척스럽게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그녀가 너무 반가웠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사랑하고 지지하고 도와주는 많은 사람들이 좋았다. 이를 계기로 나는 커피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에서 커피를 직접 볶아 봤다. 주말이면 커피 고수로 유명한 인물들을 탐방했다. 로스팅을 배우고, 커피 추출 기술을 배우고, 커피 감별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회사로 복귀했다. 작지만 내게는 큰 변화가 있었다. 어느새 회사에서 나는 커피에 미친 사람으로 소문이 났다. 탕비실에서 직접 볶은 원두 커피를 직원들에게 대접했다. 모두들 너무 좋아했다. 그러던 중 그룹사에 있던 외식사업부로 전직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본부장을 찾아가서 전직을 부탁했다. 당연히 안 된다고 했다. 이제 휴직의 기회도 주고, 이제 어느 정도 업무에 능숙하게 되었는데 무슨 말이냐고. 많이 혼났다. 그새 두 번 본부장이 바뀌었다. 전직은 고사하고 사업부의 중심에서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들을 맡아서 처리해야 했다.


<대항해의 시대: 지금 까지 다녀본 나라들>


그렇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날 홍대에서 예쁜 세계 지도 한 장을 봤다. 중세 대항해 시대에 선장이 봤음직한 그런 지도였다. 그 지도를 샀다. 집에 와서 베란다에 붙였다. 그리고 네임펜으로 지도에 표시를 했다. 브라질,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에티오피아, 인도네시아, 탄자니아, 케냐 등 그 동안 로스팅 하며 테이스팅 했던 원산지의 도시들을 찾아 표시했다. 그리고 나의 대항해 시대의 시작을 다짐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확신이 들었다. 작은 카페로 시작할 수도 있고, 커피 생두 무역 회사의 신입으로 다시 입사할 용기도 생겼다. 결심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새로운 본부장님에게 사표를 전했다. 내 지난한 과거를 다 듣고 새로 오신 본부장은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은 그 일을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룹 내에 외식사업부가 있으니
내가 외식사업부 본부장에서
직접 연락해 주겠습니다.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유대리의 열정에 감명받았습니다.


<나의 꿈, 나의 청춘>

 

<안데스 산맥 커피 농장, 메데인, 콜롬비아>


나는 그 본부장님의 직접 추천으로 외식사업부로 전직하게 된다. 그리고 10년 동안 커피 브랜드의 브랜드장, 외식 MD 뿐 아니라 커피 산지의 업체를 개발하고, 수확기에 현장을 실사하고, 품질을 평가하고, 전반적인 유통을 하는 책임자를 경험하게 된다. 커피 산지를 다녔던 무수한 경험들을 얘기하자면 오늘로 부족하다. 이 이야기도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다.


내가 오늘 진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커피 프린스 1호점>에 등장했던 어느 배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드라마에서 방송음악가로 나오는 최한성은 부드럽게 잘 웃는 훈남이다. 주인공 최한결의 사촌 형이고 서정적이고 때로 털털하지만 예술가로서는 다소 괴팍하고 고집 있는 성격의 남자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부드럽고 친절한 남자이자만 자신의 깊은 내면은 잘 드러내지 않아 속내를 알 수 없는 소극적인 사람이었다. 옛 여인에 대한 실연의 상처로 불안해 하지만 편안하고 귀여운 은찬에게 마음을 주며 갈등을 겪게 된다. 나의 ‘숨겨진 자아’와도 같았던 은찬을 잔잔히 바라보던 그의 미소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를 통해 세상 살아갈 힘을 얻었던 그 시간을 반추하며 마음 한구석 아련하고 아픈 감정이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 같아 괴로워진다.


나는 그의 죽음을 남일처럼 그냥 넘길 수 없다. 나는 그간 그의 팬을 자처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 그가 맡은 배역들은 언제나 사람들을 위로하고, 보호하고, 사랑하고, 아껴주던 모습들이었 던 것이 생생히 기억한다. 이제 나의 아저씨 이선균 배우의 죽음과 관련된 무거운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나는 최근에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을 통해 이번 사건을 재조명하고 한국 사회는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고,  앞으로 어떤 교훈을 얻어야할지 말해볼 예정이다.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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