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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테 클래식 Jan 21. 2024

죄와 벌: 나의 아저씨의 죽음

죄와 벌로 세상 읽기

죄와 벌: 공동체의 광기, 대안은 없는가?


1.   나의 아저씨의 죽음


경찰 수사를 받던 중 27일 스스로 생을 마감한 배우 이선균(48)의 올해는 정점에서 바닥으로 추락한 안타까운 한 해였다. 그는 인생의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20대 무명 시절을 거쳐 30대에 굵직한 드라마를 통해 빛을 봤다. 40대에 출연작이 칸 영화제만 수 차례 초청되는 등 그의 인생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아무 문제 없는듯했다. 그러던 중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를 휩쓴 봉준호 감독의 작품 ‘기생충’의 주역으로서 월드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이러던 그가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나는 그제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친 듯이 기사들을 찾아봤다. 그리고 최근에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이렇게 생애를 마감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의 수많은 기사들을 보면서 바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과도함아니 ‘광기였다. 세상에서 제일 의미 없는  연예인 걱정이라 했던가? 그런데 이번 사건 속에서 나는 ‘ 무의미한 걱정과 관심 우리 사회와 대중은 얼마나 크게 열광했는지, 아니 열광하며 광란의 축제를 즐겼는지를 목격하게 되었다. 나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심지어 아니 그의 사생활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는  안타까운 선택을 했을까? 생의 마지막 앞에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는  글을 통해 죄와  그리고 우리 시대의 아픈 현실을 직시해 보려 한다.  


2.   죄를 대하는 사회의 태도: 당국, 언론, 대중


 첫 보도가 시작되었다. 그는 마약 범죄의 용의 선상에 놓였다. 그와 유사한 시기에 유명 연예인 권 모 씨도 같은 혐의로 내사가 진행되었다. 보통 내사 단계에 있는 사건은 공개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달랐다. 내사가 시작되자마자 ‘찌라시’가 돌았다. 언론은 많은 추측성 기사들을 양산해 냈고 ‘이선균은 첫 보도 나흘 만에 일사천리로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된다. 피의자 신분으로의 전환 이후 배우 이름과 ‘마약’ 투약을 암시하는 제목의 수많은 기사들이 넘실댄다.


<출처: mbc PD 수첩>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 후 3번의 소환이 진행됐다. 모두 공개 소환이었다. 이 배우의 사망 이후 무리한 수사와 공개 소환이 이 배우 사망의 원인이었다는 지적이 빗발쳤다. 그러나 경찰은 배우의 변호인 측은 지하주차장을 이용한 비노출 출석을 요청한 사실은 있으나, ‘지하를 통해 이동하면 모양새가 좋지 않을 수 있음’을 설명했고, 변호인도 이에 “알았다”라고 답한 사실이 있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바라보는 다른 눈들이 있다. 먼저 경찰청 초대 인권위원을 역임한 오창익 ‘인권연대’ 국장은 이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사람을 잘 검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절차를 지키는 것도 되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수상 잘못되면 당사자에게는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줄 수 있거든요. 공개 소환을 하면서 개인 이선균이라는 사람이 당할 고통은 굉장히 크고 구체적인데 이선균이란 배우를 아직 혐의도 특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렇게 한 사람의 인권을 마구잡이로 다루면 안 되죠”

<출처: mbc PD 수첩>


유명인의 공개 소환과 관련해 여러 전문가들은 "이선균 씨가 당했을 고통은 크고 구체적"이라며 "당사자를 압박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백민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수사기관 내부에 부족한 증거를 소위 여론몰이를 통해서 ‘이 사람은 범죄자 맞다’라는 낙인을 찍고…. 수사기관 내부에 부족한 증거를 소위 여론몰이를 통해서 ‘압박’에 못 이긴 수사 대상자가 자백을 하게끔 만들려는 의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극장식 수사라고 하죠, 원래 수사는 기밀을 유지하면서 하는 게 정상인데 이렇게 보여주기식 수사를 하는 이유는 여론을 통해서 수사 당사자를 압박하기 위함이라고 생각을 해요.”

<출처: mbc PD 수첩>


 그러나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고 그의 체모와 소변에 대한 4번의 검사 중 3번은 음성, 1번은 판정 불가였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또 다른 연예인은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 없음’ 불송치 처분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 배우의 경우는 달랐다. 사건의 전모를 밝힐만한 직접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한 공영방송은 전격적으로 녹취록을 방영한다. 그 후 언론의 논조는 마약에서 녹취록으로 급선회한다. 녹취록의 내용을 살펴보면 마약 협의를 입증할 만한 구체적 정황은 없다. 오히려 두 사람의 관계를 이용해 ‘누군가가 공갈 협박’하고 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대중들은 공갈협박 보다 이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에 주목했다. 선량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의 배우의 은밀한 사생활은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는 매우 자극적 소재임에 분명하다.


만약 내가 똑같은 위치에 놓인다면 어떨까? 내 평소의 삶이 고인의 사례처럼 까발려진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될까? 나의 은밀한 생각, 말, 행동 나아가 내가 저지른 어떤 범죄의 정황이 이런 방식으로 까발려진다면 나는 온전히 삶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좋다. 백 번 양보해서 내 범죄의 정황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나오고, 새로운 녹취와 증인이 나온다고 하자. 하지만 그 증거, 녹취, 증인 등 모든 것들이 실시간으로 수사기관을 통해 흘려지고, 미디어를 통해 중계되고 수많은 유튜버들을 통해 재생산되고, 대중들의 온갖 루머와 악플이 쏟아진다면 또 어떨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힌다. 아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친다. 나 같은 소시민은 경찰서에서 날아온 벌금 고지서만 봐도 경기를 한다. 범죄 혐의를 받고, 포토라인에 서는 것도 두려운 일이다. 대중들의 비난과 멸시, 온갖 루머와 혐오 속에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눈앞이 아찔해진다.


3.   도스토옙스키의 인간관과 수치를 아는 인간  


 인간은 누구나 그 안에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100%로 선한 인간은 없다. 도스토옙스키의 인간관도 그 맥을 같이 한다. 그에게 인간은 종착점이 아니라 이제 막 길에 들어선 존재이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완결된 것처럼 치장하지만 그 내면은 항상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존재이다. 도스토옙스키식으로 얘기하자면 배은망덕하고 악하고 더러운 ‘지하생활자들’이다. 인간 내면은 항상 소돔의 이상(지옥)과 마돈나의 이상(천국)이 싸움을 벌이는 치열한 전쟁터이다.

그의 다른 소설 <지하생활자의 수기> 초반부에 그는 인간을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병적인 인간이다…. 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는 남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인간이다… 나는 짓궂은 인간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결국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위인이다. 악인도 될 수 없었고, 선인도, 비열한도, 정직한 인간도, 영웅도, 벌레도 될 수 없었다… 나는 선이라든가, 그 ‘아름답고 고귀한 어떤 것’이라든가 하는 것을 분명히 의식하면 할수록, 더욱 깊숙이 자기 내부의 흙탕 속에 빠져들어 옴짝달싹도 못하게 되어버린다.”<지하생활자의 수기,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간의 심리를 아주 잘 이해한 작가이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인간 내면에 자리한 악마적 습성만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 악마적인 본성을 은폐하거나 외면하고 값없이 구원받은 척하는 위선과 근거 없는 선민의식이다.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는 노파를 살해한 범인으로 등장한다. 그는 늙고 사악한 전당포 노파 살해해서, 그 노파의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계획을 실행한다. 소설 초반부의 그는 정의를 구현할 초인으로 등장하며 노파 살해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당연한 희생으로 치부한다. 그는 궁극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초인이라 착각하며 노파 살해를 감행했다. 그러나 살인을 저지른 후 그는 자신의 계획의 실행하기는커녕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밀려오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의 좁은 방안 갇혀 버린다. 사건 초반 그는 자신의 살인을 합리화하는데 골몰한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사회적 통념을 넘어서는 살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무엇보다 수치심을 잃은 자에게 구원의 손길은 필요하지 않다. 벌레만도 못한 자신의 죄악을 자백하고, 악하고 더러운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를 구원한단 말인가?


 이선균의 사례는 <죄와 벌>의 사례와 정반대다. 그는 아직 죄인이 아니다. 직접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그는 광장으로 끌려 나왔다. 그리고 그는 3번의 소한에 앞서 모든 미디어와 대중 앞에 끊임없이 사과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죄를 시인한 적이 없다. 그가 마약을 했는지, 매춘을 했는지, 외도를 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의 1차 소환 당시 때 그가 한 말이다.


<그는 허리를 숙여 90도로 사과했다>


“ 먼저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어서 많은 분들께 큰 실망감을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허리를 90도 숙여 인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저를 믿고 저를 지지해 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사과드리겠습니다.(허리를 90도 숙여 인사) 하~ 소속사를 통해서 전달해 드렸듯이, 진실한 자세로 성실하게 수사에 임하겠다는 입장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너무 힘든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다시 한번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허리를 90도 숙여 인사)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이 장면을 수십 번 반복해 보았다. 그는 광장에 나와 3번을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과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성실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노라 다짐했다. 2차 조사도 비슷한 패턴이다. 그는 포토라인 앞에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실대로 솔직하게 답변드리겠다.” 고 했다. 그러나 3차 조사를 마친 그의 소감은 다소 다른 느낌이다. 그는 19시간의 밤샘 조사 후 새벽 5시경 문을 나왔다.  


“일단 오늘 피의자 조사, 고소인 조사 함께 조사해 가지고 너무 늦게 끝나서 기자분들께 기다리게 해 드린 점 진심으로 죄송하고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오늘 피의자로서 고소인 조사까지 마치게 되었습니다. 오늘 조사 성실히 임했구요. 이제 앞으로 경찰에서 저와 공갈범들 사이에 어느 쪽이 진술에 신빙성이 있는지 잘 판단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게 해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허리 90도 숙여 인사)”


이 장면을 본 서원대 상담심리학 김태경 교수는 이렇게 얘기한다.


“이 사람이 계속 ‘성실하게’, ‘진솔하게’라는 단어를 쓰거든요. 뭔가 이 안에서 객관적이고 신뢰 되게… 자기의 진성성이라고 해야 하나요. 그런 것들이 잘 드러나질 거라는 기대를 했던 것 같아요…. 3차 조사 이후에 이 사람이 한 얘기들을 보면 그러지 못할 거라는 불안이 강도 높게, 그 불안이 확 고조가 되어 있어요.   

<출처: mbc PD 수첩>


 이례적인 공개 소한, 4번의 검사, 19시간의 밤샘 조사로 특정된 범행은 아직 없다. 그러나 언론의 취재 경쟁, 무수한 쇼츠와 짤들… 그는 마치 연쇄살인마라도 된 듯 광장으로 끌려 나왔다. 마치 철창에 갇힌 서커스의 야수라도 된 듯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 그동안 무수한 강력 범 외에서도 지켜졌던 무죄추정의 원칙과 피의자 보호는 온 데 간데없다. 무언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되었다.


4.   광장: 회개와 용서의 시작(수평과 수직적 변화의 이해)


<속죄, 위키피디아>


일어나세요. 지금 즉시 나가서 네거리에 서서 먼저 당신이 더럽힌 대지에 절을 하고 입을 맞추세요. 그다음 온 세상을 향해 절을 하고 소리를 내어 모든 사람에게 말하세요. ‘ 내가 죽였습니다.’라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또다시 당신에게 생면을 보내주실 거예요. <죄와 벌, 토스토옙스키>


인간의 진정한 죄는 눈에 보이는 범죄보다 더 복잡하다. 진짜 죄는 내면에 감추어진 악마적 본성임을 은폐한 채 천국의 이상을 설파하며 맹신하는 곳에서 독버섯처럼 자란다. 그는 도끼로 타인 뿐 아니라 자기 심연의 깊은 문제도 드러내 버렸다.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의 눈물 어린 요청에 응답했다. 자신의 골방에서 일어나 타자들과 연결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광장의 많은 이들과 연결돼서 그들에게 ‘내가 죽였다’고 고백하는 것은 자존심을 내려두고 겸손해질 것에 대한 결단의 의미가 있다. 진심으로 겸손한 사람만이, 자신의 죄를 부끄러워하는 자만이 자기의 죄를 회개할 수 있다. 그래서 대지에 엎드려야 한다. 대지에 절하고, 그 더러운 땅에 입을 맞추라는 것이야말로 나의 죄를 자복하는 시작점인 것이다.


 이선균 배우는 사례는 이런 점에서 매우 뼈아프다. 그는 몇 차례 경찰 소환에서 공개적으로 수차례 사죄했다. 그의 사과가 부족했던 것일까? 공권력, 언론, 대중은 연신 그를 압박해 왔다. 라스꼴리니코프의 사과가 갱생과 부활의 출발점이 된 반면 이 배우의 사과는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초인(통치자)의 주관심 사항이었고, 수사 경찰들의 특진을 위한 수단이었으며, 대중 앞에 까발려진 마녀사냥식 수사의 먹잇감이 되는 듯했다. 수사는 전방위적으로 확대되었고, 대화 녹취록이 되었다. 언론은 대중들에게 기사를 실어 나르느라 바빴고, 대중들은 더 은밀하고 자극적인 기사를 탐닉했다.  상황은 극단적으로 흘러갔고 결국 배우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의 종지부를 찍게 된다.



5.   공동체: 죽을 사람을 살리게 하는 마지막 보루   


 인간의 죽음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의 과제를 남긴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자녀이다. 또 누군가는 엄마이고 아빠이고, 동생이고, 친구이고, 동료이다. 어쩌면 라스콜리니코프는 사회로부터 상처받고 고립된 사람의 전형일 것이다. 현대의 히키코모리들처럼 그는 소외되고 고립된 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형식적으로 연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당시 영국에서 시작된 양적 공리주의에 경도된 나머지 노파 살해를 단행했지만, 그는 노파 살해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자신의 명분의 공허함으로 인해 자신 없이 찬성과 반대를 오가며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를 구원해 낸 것은 다름 아닌 가족들이다. 그는 동생이 자신을 위해 돈 많은 늙다리에게 시집가는 것을 몸서리치도록 싫어했다. 그러나 그 동생의 희생정신에 늘 빚진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늘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사랑해 주는 존재였다. 노파 살해 이전까지 어머니가 보내 준 사랑의 메시지는 이제 그를 일으켜 세우는 큰 기둥이 된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다. 당신의 아들이 자기보다 어머니를 더 사랑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는 어머니의 멈추지 않고 사랑할 것임을 다짐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되듯 어머니와 다시 연결된다. 어릴 적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 그의 강퍅했던 마음을 녹였다. 어머니는 그 무시 무시한 광기의 순간에서 그를 구원해 낸 것이다.


 어머니가 잃어버린 자기 존중감을 지지해 준 원천이었다면, 소냐는 무조건적 동정과 사랑의 여신이다. 그는 소냐에게 자신이 살인범임을 힘들게 고백했다. 소냐는 그를 위해 진심으로 울어주고 불쌍히 여겼다. 자신도 매춘부의 삶을 살면서 ‘당신처럼 불쌍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냐’며 그를 위해 울었다. 그리고 소냐는 절대로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니, 밖으로 나가 광장에서 온 세상을 향해 절하고, 대지에 입 맞추고, 소리 내어 용서를 빌라고 요구한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녀의 말처럼 온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바닥에 엎드린다.

 

  나는 이 배우가 3차례 경찰 소환에서 보여준 자세를 잊을 수가 없다. 특히 처음 경찰 소환에서 그는 자신이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된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실망감을 준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리고 허리를 90도 숙여, 3번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사람들의 큰 실망감,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줬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너무 힘든 고통을 감내하고 있을 가족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그러나 그의 사과는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그는 공영방송으로 녹취록이 방영된 다음 날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이 배우의 마지막 사과는 힘든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가족들에 대한 사과였다. 나는 이것이 그의 죽음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마지막 공개된 ‘녹취록’으로 인해 라스콜리니코프를 마지막으로 연결해 주던 가족의 지지, 중요한 사람들을 배신했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선택을 감행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대중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했다. 아니 오히려 무자비했다. 그 누구에게도 타인의 고통에 동참 하려거나 돌보는 이들은 소수다. 오늘날 우리는 평소에는 그럴듯한 페르소나를 쓰고 사람들과 관계 맺고 살아가는 듯하다. 그렇나 그럴듯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고 나누거나 서로의 삶을 격려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온갖 매체들은 자극적이고 비극적인 정보들이 난무한다. 예능, 노래, 드라마, 영화 등 영상 산업의 전반에서 마치 ‘너의 아픔은, 나의 기쁨이야’를 변주하며 광기의 축제를 벌이는 듯하다.


 현대 연극, 드라마, 영화의 기원이라는 ‘그리스 비극’ 공연의 관람은 누군가가 당하는 고통을 비켜보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비극 공연의 주인공은 나를 위해 대신 죽은 어린양(산양 혹은 염소)이자 또 다른 나였다(비극의 어원은 ‘염소(Tragos)’의 노래(ode)’로 영소를 제물로 바칠 때 하는 노래였다). 주인공이 비극적인 삶 속에서 죽어갔던 것은 바로 죄로 물든 나를 죽이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거듭나겠다는 나의 다짐을 상징하는 제의였다. 공연을 보는 시간은 나를 죽이는 시간이었고, 그렇게 나를 죽여 죄를 씻어 새롭게 부활하는 것이 비극의 정신이었다.


 나는 사랑하는 배우의 죽음 앞에서 그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수많은 플래시 세례 속에서 ‘솔직하고 정직하게 조사에 임하겠다’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대답하던 그가 그립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로 고통을 가족들을 걱정하던 한 가정의 가장을 보는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나는 그가 '나의 고통과 내 삶의 최종적 목격자가 되어 달라고' 요구하지 못했음에 가슴 아프다. 그가 내 힘든 삶에 큰 위로가 되어 주었던 것처럼. 힘든 고통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을 이유가 되어달라는 댓글 하나 달지 못했음을 후회했다. 힘든 하루하루 속에서 언젠가는 이 싸움을 끝내리라 고민하며 서강대교를 찾아가던 힘들었던 첫 직장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 힘겹던 시절 나를 한없이 위로해 주었던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최한성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지금도 나를 위로하고 있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내용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나의 아저씨가 부디 지극한 편안함에 이르시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죽고 싶은 와중에, 죽지 마라,
당신 괜찮은 사람이다.

파이팅 해라.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숨이 쉬어져.

고맙다.
옆에 있어줘서.


https://youtu.be/tndusynA2Jw?si=clMhkXxC0RyMViyQ

<tvn 나의 아저씨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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