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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 취미] 28.독서는 지적허세의 취미다.

by 봄부신 날

[독서가 취미] 28.독서는 지적허세의 취미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독서는 지적허세가 무의식 속에 깊숙하게 자리잡은 취미활동이다. 마치 대학교재 한두 권 가슴에 안고 다니며 좋은 대학 다니는 티를 냈던 옛날 대학생처럼, 나 책 좀 읽는 사람이야, 하는 티를 내는 지적허세의 취미활동이다.



요즘에는 종이책이 아니라 디지털 방식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도구가 많아져서 꼭 종이책을 펼쳐놓지 않더라고 다양한 방법으로 책을 접할 수 있다. 심지어 오디오북은 눈으로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어폰이나 헤드폰으로 책을 듣는다. 그런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보수적인 독서가들이여. 종이책을 가방에서 꺼내어 읽지 않는다고 해서 책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 오디오북이 과연 책을 읽는 행위와 동일한가 하는 문제를 여기서 따지지는 말자. 전자책을 웹툰 보듯이 손가락으로 터치하여 화면을 휙휙 넘기며 보는 행위가 손으로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한 장씩 넘겨가며 읽는 책이랑 다르다고 따지지 말자.



헤르만헤세는 인간이 자연에서 거저 얻지 않고 스스로의 정신으로 만들어낸 수많은 세계 중 가장 위대한 것이 책의 세계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좀더 따라가보자. 헤르만 헤세는 책의 마력을 이렇게 평했다. 말과 글과 책이 없이는 역사도 없고 인간이라는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고. 누군가 소규모의 공간에, 가령 집 한 채나 방 한 칸에 인간정신의 역사를 집약하여 소유하고자 한다면, 이는 오로지 책을 수집하는 형태로만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책이란 인간정신의 위대한 결정체이며 인간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가 학교에서 글을 배우고 (물론 요즘에는 학교에 가기 전부터 글자를 다 배운다.) 글을 통해 책의 세계로 빠져 들면서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기 시작한다.



책은 사람을 새로운 정신세계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다. 헤세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오늘날 읽기를 배우지만, '얼마나 강력한 보물을 손에 넣었는지를 진정으로 깨다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노벨문학상 작가가 발표된다. 스웨덴 한림원에서 발표하는 노벨상 수상자는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 있다. 다만 해를 번갈아가며 남자와 여자가 수상했기에 올해는 여자 작가가 수상할 것으로 예측된다. 철저하게 가려 있다고는 해도 이를 추측하는 다양한 기관들이 있고 여기에 돈을 거는 자본주의가 다리 한 쪽을 걸치는 희한한 풍경이 연출되곤 한다. 어느 후보에 돈을 걸어 돈을 벌어가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니지만, 이 후보군 이름에 한국인이 두세 명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 독서인들을 흥분하게 한다.



이미 부커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도 노벨문학상 후보군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10일 저녁 최종적으로 노벨문학상 작가가 발표되면 출판사들은 언제 준비했는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책을 곧바로 팔기 시작하는데, 이때 독서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이 작가의 작품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이미 이전에 그 작가의 작품성을 알아보고 책을 두루 읽어온 사람이라면 그는 마치 자기가 노벨상을 받은 것처럼 어깨가 올라가고, 나는 이 작가의 이런저런 책을 읽은 사람이야, 라고 은연 중에 표를 내게 된다. 주변 사람들이 노벨문학상 작가에 대해 질문을 해오더라도 침착하게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 양 자신이 읽은 그의 작품과 작품세계를 얘기하며 자신의 독서내공을 얌전하게 드러낼 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은 그 책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의 두 부류의 사람만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 책을 읽을 사람과 그래도 읽지 않고 버틸 사람만 존재할 것이다. 수많은 독서토론 모임에서도 앞다투어 노벨문학상 작가의 작품을 다음 독서토론의 도서로 선정하고 그의 책을 읽고 그의 정신세계에 빠져들려고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노벨문학상 작가의 발표는 전 세계에서 출판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한동안 도서 판매량을 늘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다리를 걸치고 상업주의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장사를 해댄다 해도 책은 유형물이면서 동시에 지적인 세계에 속한 무형물이다. 눈에 보이는 인간 세계의 실존을 다루는 문학작품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서 찾아낸다. 종이에 적힌 활자를 통해 문자를 해독하고 내 머리로 들어오면서 그것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세계로 변한다. 작가가 구축해놓은 견고한 세계, 복잡하면서도 추상적이고, 구체적이면서도 단순한 세계관이 쓰나미처럼 거세게 내 몸을 밀고 들어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동안 구축해놓은 내 지적세계는 다시 판을 짜고 틈을 만들어내고 허물어진 곳을 보수하고 터진 곳을 꿰매고 부족한 곳을 채워놓는다.



그러니 옆에 앉은 누가 책을 펼치거든 경외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라. 그는 지금 거대한 지적세계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책을 읽음으로 조금 허세를 부리더라도 눈을 딱 감고 칭찬만 해주라. 책을 읽을수록 겸손해지는 것이 맞는 것이긴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조금은 이기적이고 이타적인 부분이 있다. 자랑하고픈 것이 있고 인정받고 싶은 부분이 있다. 책읽기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이다. 내가 책을 읽었는데 그 내용이나 요약본이 옆사람에게 저절로 전염되지는 않는다. 내가 읽은 책은 오직 나의 정신세계에만 영향을 미친다. 개인의 종교적 구원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독서라는 행위 역시 철저하게 개인적이다. 내 독서목록과 내 독서경험을 백 퍼센트 똑같이 내 옆사람에게 공유할 수가 없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이 모여 그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독서모임이라 하더라도 서로 의견이 갈리는데, 하물며 그런 모임에도 가입하지 않고 혼자 책을 읽는다면, 우리 독서인은 언제나 고독하게 책을 읽는다. 독서가는 언제나 외롭다. 독서가는 고독을 읽으며 책을 펼친다. 실컷 호사를 부려보았자 음악 한 가락에 커피 한 잔. 그리고 책과 나만 남는다.



그러니 책을 읽는 행위를 지적허세로 여기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라. 내 가방엔 늘 책이 들어 있다. 아니 책을 넣기 위해 가방을 늘 가지고 다닌다. 언제라도 시간이 생기면 책을 펼쳐들기 위해서이다. 또 나는 그렇게 언제든지 사람들이 내가 읽는 책의 제목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책을 읽는다. 지하철에서 서서 한 손으로는 흔들거리는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책을 활짝 펼쳐서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책을 읽는다. 앉아 있는 사람들이 고개만 들면 책 제목을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책을 읽는다. 왜냐하면 나 역시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이 책을 읽고 있으면 그 책이 그렇게 궁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앉아 있던 사람이 내리게 되어 내가 그 자리에 앉게 되고, 책을 읽다가 눈이 피곤하여 잠시 책을 덮게 되면 반드시 표지가 위로 보이도록 하고 책을 덮는다. 나는 지금 이런 책을 읽고 있습니다. 하고 누군가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한다. 나는 그것이 나의 지적허세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책읽기를 널리 퍼트리려는 나름의 고육지책 중 하나이다. 책 제목을 보고 어떤 내용의 이야기인지 궁금해하며 휴대폰으로 한번 찾아봐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제 곧 노벨문학상 작가가 발표될 것인데, 과연 한국 작가가 수상할 것인가 하는 것은 독서가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이다.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우리나라 작가가 상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어본다. 우리나라 문학작품 중에 얼마나 훌륭한 작품들이 많은가. 영어로 번역이 잘 안되어서 그렇지 노벨문학상 수상작품들보다 뛰어난 작품들이 많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글이라는 유일한 문자로 대중화된 문학작품이 세상에 나온 지도 어느새 백 년이 넘어간다. 한국의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2016년에 국제적인 부커상을 수상했는데, 올해는 노벨문학상도 받을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국가적 지적허세를 부려본다.



어디서든 용감하게 책을 펼치는 당신 독서가여. 더 당당해지길. 어디서든 더 지적허세를 나타내길 취미가 독서인 나는 간절히 소망하고 열망한다.



2024-10-08 지하철 책읽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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