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딘 May 09. 2024

기분 좋은 날, 기분 더 좋아지고 싶은 날

 너와 나를 이어주는 맛, 단맛

퇴근하며 기분이 푹 주저앉아 있는 날은 한 잔 하고 들어가야 한다. 일과 중에 막힌 느낌이 들면 커피를 마셔줘야 한다. 알코올의 힘으로 오늘 별거 아니었다고 위로하고 카페인으로 아직 쌩쌩하다고 위안을 삼는다. 그렇게 세상의 음식과 맛은 저마다 어울리는 순간이 있다.


어울리는 순간처럼 그 맛과 어울리는 사람도 있다. A가 그런 사람이다. A는 중학교에 가서 처음 알게 된 녀석이다. 1년만 같은 학급이었을 뿐 이후에는 함께 지낸 경험이 많지 않다. 진급하며 반이 달라지고 대학도 다른 곳으로 가고 직장을 얻고 생활지도 멀어졌다. 종종 연락은 하지만 의무감에 하는 것도 아니고 일 년에 몇 번 시간이 되면 얼굴을 볼까 말까 한 관계. 만나는 횟수로 보면 가까운 사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다. 하지만 만나면 형식적인 인사 없이도 어제 본 것처럼 마주하게 된다.


A와는 주로 식사를 한다. 그런데 서로 입맛이 많이 다르다. A는 더운 날 삼계탕을 먹고 싶은데 자기는 물에 들어간 새는 안 먹는다고 버텼고 회를 먹자고 하면 날고기는 싫다고 했다. "소주 한 잔?" 물으면 그 쓴 걸 왜 먹냐고 답이 왔다. A가 녹차라테, 쑥차를 주문하면 나는 옆에서 그게 무슨 입맛이냐며 질겁했다. 치즈케이크와 초콜릿케이크 중 뭘 고르는지로 늘 실랑이를 했다. 서로 어떻게 너는 그런 입맛을 갖고 살고 있냐며 핀잔을 주기 바빴다. A와 나는 맛의 기호가 상극이었다.


20대 시절에는 A와 햄버거 가게에서 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가득 부어서 마셨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서 이런 쓴 커피는 왜 먹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댔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하는 것보다 여기 아르바이트하는 여학생 중에 누가 더 예쁜지가 심각한 주제였다. 서로에게 보는 눈이 별로라고 깎아내렸지만 우리는 누구도 점원에게  먼저 말을 붙이지 못했다. 커피와 햄버거를 먹다가 감자튀김 하나 더 시키고 케첩 하나 더 받아오고 하는 정도로 만족했다. 숙맥들.


직장을 얻고 자리를 잡고나서부터는 돼지갈비를 먹었다. 식당도 늘 다니는 곳이었다. "함 봐야지." "그래, 뭐 먹을까?" "늘 먹던 거 있잖아." "거기?", "어.", "시간은?", "점심?", "알았다. 전화해"  장소와 메뉴가 고정된 것처럼 대화도 비슷했다. 만나면 "또 돼지갈비냐?", "딴 데 갈 데도 없잖아. 귀찮아. 니가 찾아볼래?" "아니. 그냥 여기서 먹어"라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A와 만나면 단 음식을 먹었다. 서로 다른 식성인데도 수긍하게 하는 맛이 단맛이었다. A와의 만남은 술이 한 잔 들어가야 되는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도 아니고 카페인을 쏟아부으며 몰입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내가 요즘 이렇게 고생하며 산다"라고 하소연해도 "네가 고생하는 건 다 인과응보야, 그러니 그동안 나한테 더 잘했어야지."라고 받아치고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아직도 세상의 쓴맛을 겪지 못한 애송이구나"라고 직격 했다. 무얼 말해도 농담으로 바꾸어 이야기하는 상황에서는 기분을 가볍게 해주는 맛이 어울린다. 그게 단맛이다.


단맛은 기분 좋은 날 먹고 싶다. 프로젝트 성공 기념 회식자리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기분 올라가는 무언가가 있는 날이나 그런 좋은 기분을 더 좋게 만들고 싶을 때 생각난다. 퇴근길에 '오늘은 고생했으니 커피에 조각케이크 하나 먹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때, 이미 머릿속에서는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내서 맛을 보고 있다. 국밥집에서 만나는 것보다 돼지갈비 집에서 A를 만났을 때가 평소보다 더 기분 좋게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달달함은 그런 매력이 있다.


요즘 A와 만나면 새로 오픈한 햄버거 가게에서 만난다. 둘 다 점원이 누구인지 관심을 두는 시절은 지나가버렸다. 햄버거를 먹으며 요즘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느니, 다치면 빨리 낫지 않는다느니, 뱃살은 안 빠지고 팔다리 근육만 빠진다느니 하는 말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예전과는 다르게 그런 말을 들으면 공감하고 나도 그렇다고 답을 한다. 서로 핀잔주는 말투는 줄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단맛으로 서로 이어져있다.


"음료 뭐 먹을래?"

"햄버거에는 콜라지."

"콜라... 그냥? 제로?"

"제로. 어후 이제 혈당 관리 해야 돼. 넌?"

"나도 제로다. 이번에 건강검진했는데..."


그동안 A와 만났던 날들처럼 앞으로 만나게 될 때도 단맛이 함께 할 듯하다. 차이가 있다면 점점 약해져 가는 췌장 때문에 설탕보다는 인공감미료의 단맛으로 바뀌어야 하는 정도가 될까. 카페에도 시럽 대신 스테비아, 아스팜탐을 비치해야 하는거 아니냐고 구시렁거리거나 제로 콜라 한 잔을 들이키며 A와 농담을 주고받고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서 기분 좋은 날, 기분 더 좋아지고 싶은 날이 계속되도록.















이전 08화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