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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딘 May 02. 2024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아이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

초등학생 때 엄마를 따라 한의원을 간 적이 있다. 밥도 잘 안 먹고 비실비실하니 약을 좀 먹여야겠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버스를 타고 도시로 나와 소개받은 한의원에 도착했다. 진료를 마치고 의원을 나와 걷다 보니 골목 귀퉁이에 만두집이 있었다. 엄마가 먼저 만두 먹고 갈까 물었던 것 같다.


가게는 작았다. 분식집이 아니고 찐만두만 파는 식당이었다. 연신 김을 뿜어내고 있는 함지박처럼 큰 찜기 옆으로 오래된 알루미늄 패널로 된 출입문이 있고 가게 안에서 주인은 계속 만두를 빚는 곳이었다. 주문을 하고 잠시 후 접시에 만두가 담아져 나왔다. 얇은 피의 만두가 아니라 좀 더 두툼한 피에 소가 채워져 있었다. 만두라기보다 찐빵에 가까운 피였다. 크기는 찐빵의 1/4 정도로 되었을까. 어린아이 주먹만 한 만두는 따뜻하고 파근파근했다. 함께 나온 간장은 식초와 고춧가루를 섞어서 짜고 시큼하고 매웠다. 만두가 부드러움을 담당한다면 간장은 그 반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의원에 오갈 때마다 그 가게를 몇 번 더 엄마와 가 본 것 같다. 이후에 청소년이 되었고 한의원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갈 일이 없어졌고 그 만두집도 점점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러다가 인터넷이 자유로워진 세상이 되면서 문득 그 가게를 찾아보고 싶어졌다. 10년은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남아 있을 텐데. 만두, 지역 맛집, 분식... 검색어로 찾아도 나오지가 않았다. 시시콜콜한 정보까지 올려지는 세상인데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없을 수 있다니. 무슨 일일까.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하며 시간을 보낸 지도 몇 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방향으로 가 본 적이 있다. 가게는 없어지고 다른 간판이 올려져 있었다. 식당이 아니라 다른 직종의 사무실로 바뀌고 사람들이 드나드는 걸 보니 꽤 오래전에 바뀐 듯했다. 다시 검색을 해 보니 사장님의 지병이 심해져서 더 이상 만두를 빚을 수 없었고, 그래서 가게를 넘겼는지 주인이 바뀌었는지 그런 일이 있었고, 결국 폐업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를 찾을 수 있었다.


사라진 가게를 생각하면 아쉽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어떤 막연함이 있다. 그때 먹은 만두 맛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만두의 맛보다는 내가 드나들었던 공간이 이제는 세상이 없다는 것에 마음이 간다. 그 공간에 대한 기억은 찜기에서 올라오는 김이 시야를 가리듯 밖에서 보던 거리, 가게 모습, 안에서 보이던 것들이 듬성듬성 보였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특히 이상하게도 엄마의 모습은 선명하지가 않다. 엄마는 나보다 큰 사람, 함께 가게로 들어가고 만두를 먹고 다시 집에까지 동행했던 사람으로 분명히 있었는데 왜 별다른 기억이 없다. 많은 기억이 영화처럼 이어지는 게 아니라 스틸컷으로 끊어지며 색이 바랠 텐데 그 공간의 것도 마찬가지인 걸까.


그곳에 대한 글을 정리하다가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엄마는 왜 나를 데리고 거기를 갔던 걸까?' 집으로 돌아가려면 버스를 타고 다시 한 시간 넘게 갔어야 했는데, 엄마는 일을 미루고 나온 외출이니 돌아가면 정리할 것도 많았을 텐데. 점심과 저녁 사이의 시간이라 굳이 간식을 먹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한 번도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처음 보게 된 가게를 우연히 들어갔더라도, 이후에 굳이 다시 찾아갈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예전에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때 엄마의 기분을 어렴풋하게 알 것 같다. 내가 성인이 되어서가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된 이후부터 '그때 엄마는 이런 기분이었을까?' 떠오르게 되는 장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다니다 보면 자연스러워지는 상황이 있다. 병원을 다녀오는 날이면 먹고 싶은 걸 사주는 일에 너그러워진다.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을 사주는 일이 어렵지 않다. 뭐라도 먹이고 싶고 원하는 걸 쥐어주고 싶은 안쓰러움. 나도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 앉아 핫초코 한잔을 사주고 마주 앉아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병원을 오가는 일은 내가 익숙해져 있는 일상의 시간을 약간 비트는 일이다. 시간을 내어 일정을 잡고 움직여야 한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신경 써야 할 일이 생긴다. 진료 전에는 막연한 걱정을 털어내고 괜찮아질 거라는 다짐을 더 하기 위해 애쓴다. 진료 후에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신경이 쓰인다. '잘 되겠지'라고 넘기고 싶어도 부모의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그 자체로 계속 긴장하게 되는 하루. 게다가 아이는 부모인 나를 의지하고 바라보는데, 아... 사실 나도 처음이거든. 마음이 무겁지만 그렇다고 티 내지 못하는 상황. 하물며 내가 이런데 아이는 오죽할까.


그래서 뭐 먹고 싶은 게 있는지, 뭐 먹고 갈까 묻고 가게에 들어가 앉게 된다. 어쩌면 나를 위로하려는 무의식적 표현일지도 모른다. 간식을 오물거리는 아이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잘 먹는지 확인하는 게 아니다. 그냥 아이가 무언가 먹는 순간이라도 잠시 넋 놓고 아무 생각하지 않고 멍하게라도 있고 싶어서다. 잠깐이나마 그냥 그렇게 있고 싶어 진다.


엄마도 그때 그러지 않았을까. 별다른 말 없이 만두를 나눠먹고 다시 집으로 출발했던가. 그래서 내게도 동행하는 순간이었지만 엄마가 했던 말, 표정, 모습은 희미한 걸까. 당신은 잠깐이라도 그렇게 걱정을 잊을 수 있었을까, 마치 지금의 나처럼. 혹시라도 과거를 여행할 수 있는 일이 가능해지거나 기억을 더 생생하게 떠올리게 하는 뇌과학이 실현된다면 그 장면을 다시 보고 싶다. 엄마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그 아이를 어떤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을지 살피고 싶다. 만약 말을 건넬 수도 있다면 아이에게 엄마를 좀 잘 보고 기억하라고 속삭이고 싶다. 그게 아니면 만두가 맛있다고, 다음에 또 오자고 이런저런 말이라도 더 해보라고 채근하고 싶다.


지금의 어머니는 그때 일을 기억하실까.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고, 뭘 그런 일을 생각하고 있냐고 핀잔을 주실까. 세상에 좋은 것만 찾으며 살아도 부족한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노인의 툴툴거림을 하실 텐가. 언젠가 기회가 되면 부모로 산다는 건 그런 일들에 익숙해지는 과정이었던 거냐고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때 너무 까탈스러운 아이를 돌보느라 고생이 많으셨다고. 이제 조금은 당신 마음이 어떤지 나도 이제 알 것 같다고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지고 싶다. 진지하게 말하려고 하면 왠지 내가 자꾸 엄마와 만두집으로 향하는 아이로 되돌아갈 것만 같긴 하다. 나는 어쨌든 이미 어른이 되어버렸는데... 그러니 그냥 농담처럼 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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