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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딘 May 16. 2024

미술관에서 만난 커피

맛의 그라데이션

얼마 전 여행을 가서 미술관에 방문했다. 관람 후에는 미술관 1층에 있는 카페에 들렀다. 무난하게 아메리카노를 시킬까 하다가 시그니쳐라고 표시되어 있는 서리태 크림 라떼 메뉴를 주문했다. 진동벨이 울려 받으러 가니 점원이 말을 걸었다.

"저희 매장 시그니처메뉴 드셔보신 적 있나요?"

이게 무슨 상황이람. 외지인을 향한 친절인지 의심인지, 시그니쳐 메뉴에 포함된 서비스인지.

"어... 아니요"

"드시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일단 처음부터 섞어드시지 마시고요..."


점원의 이야기를 잘 듣고 커피를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커피 마시면서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미술관 커피라서 여기도 도슨트가 있는 건가. 잔을 바라본다. 투명한 컵에 담긴 한 잔의 시그니쳐. 컵 아래쪽으로 캐러멜색 커피가 보인다. 그 안에는 얼음도 들어있겠지. 잔의 중간 높이에는 흰색 두터운 층이 있다. 이건 크림이겠고. 그리고 맨 윗 층에는 황설탕에 재어둔 듯한 서리태 소가 올려져 있다. 크림이 연하지 않고 진해서인지 올려진 소가 커피까지 푹 꺼지지 않고 크림 윗 층에 떠있다. 소는 윗면에 모두 뿌려지지 않고 가운데 쪽에만 폭 내려앉았다. 한 잔의 메뉴에서 여러 가지 색을 보니 재미있다. 어느새 커피가 미술작품이 되어있다.


천천히 점원이 알려준 대로 맛을 보았다. 스푼으로 서리태를 떠먹어보니 달다. 견과류가 가진 입자감도 있다. '당연히 달겠지. 그리고 콩 같겠지.'라고 식상해하면서 근데 왜 하필 서리태일까 이 지역 특산물을 살리려는 노력일까 상상해 본다. 땅콩 아몬드 서리태 호두 깨... 무엇이 적절할까. 크림도 한 번 맛을 본다. 많이 달지 않고 예상보다 더 농밀한 점성이다. 그래서 소가 떠 있었구나. 빨대를 커피가 있는 아래 부분까지 넣고 마셔본다. 빨대가 밑까지 내려가면서 담은 소, 크림, 커피가 섞이지 않은 채 하나하나 입으로 올라온다. 마지막으로 커피. '달지 않네. 산미도 안 느껴지고. 산미가 없지만 너무 쓰지도 않아서 이 메뉴의 베이스로 잘 어울린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러니깐 이 메뉴는 충분히 맛있다.


시그니처가 맞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다. 하나하나 맛을 보고, 스푼으로 살짝 섞으며 함께 맛보고,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섞인 후에 맛보는 것이 모두 새로운 느낌이었다. 고정된 맛이 아니라 여러 변화를 경험하게 해주는 음식, 맛의 단계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었다. 맛의 단계, 그라데이션이 있는 음식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커피를 마무리하며 여기에 오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지나는 길에 시그니쳐 흑임자 크림 라떼 메뉴가 보이는 카페가 있어 들어가 보았다. 메뉴를 주문하니 미숫가루처럼 보이는 커피가 나왔다. 컵은 에이드를 담는데 어울리듯 길쭉했다. 유리잔 안으로 색의 단계를 찾을 수 없었다. 얼음도 덩어리가 아닌 듯했다. 뭔가 불안한데? 맛을 보니 너무 달았다. 층마다 조금 달고 많이 단 것도 아니었다. 셰이크처럼 재료가 잘 섞여 나온 음료였다. 결국 다 먹지 못하고 가게를 나오게 되었다. 이게 왜 시그니쳐일까 궁금했다. 후에 지인에게 그런 커피를 먹은 이야기를 하니, 한창 크림 라떼나 견과류 넣은 라떼가 유행이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아마 그 카페도 메뉴가 시그니처가 된 게 아닌가 싶다. 유행을 따르며 빨리 마셔야 하고 달달하고 고소하게 먹을 수 있는 커피를 만들다 보니 그런 시그니쳐가 만들어진 걸까.


세상에는 먹는 순간부터 최적의 맛으로 세팅해야 하는 음식이 있다. 순댓국에 새우젓, 들깻가루, 깍두기 국물, 부추를 얼마큼 넣어야 하는가는 맛의 정점을 찾는 행동이다. 먹으면서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보는 음식도 있다. 삼겹살을 구워 먹을 때 곁들일 소금장, 쌈장, 새우젓, 멜젓, 갈치속젓, 참소스... 를 준비한다. 그리고 하나의 음식을 맛보면서 음식 안에서 맛의 변화를 느끼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앞의 두 가지와 비교하자면 좀 더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한다. 먹는 자의 민감함, 먹어본 자의 세심한 안내와 배려, 그리고 충분히 맛의 단계와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허기를 채우기 위하거나 타인과의 교류와 대화의 도구로 쓰이는 게 아니라 나와 음식이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바쁘게 지내다 보면 음식의 간이 세지기 쉽고 센 맛의 변화에 무뎌지곤 한다. 미숫가루 같은 시그니쳐 커피를 테이크아웃으로 마시며 걷는 삶보다 테이블에 앉아서 천천히 미술관 시그니쳐를 마시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되었으면 한다. 그런 사람들, 음식, 공간과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한다. 맛의 그라데이션을 충분히 알아채며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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