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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딘 May 23. 2024

언제 드실 건가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것

일상에서 익숙한 말인데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 듣게 되면 당황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마치 고수가 숨을 한 번 쉬었을 뿐인데 나는 장풍을 맞고 숨을 헐떡이는 모습이다. 그날 카페에서 들었던 말이 꼭 그랬다.


목도리를 해야 할 정도로 쌀쌀했던 겨울 오후. 따뜻한 음료가 생각나서 카페에 들렀다. 주문하며 대화가 오갈 테고 어느 카페에서나 흐름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메뉴 무얼로 해드릴까요" 라거나 "드시고 가시나요? 테이크아웃인가요?" 라거나 "기본 사이즈 맞으세요?" 라거나 "한 잔 맞으시죠?" 정도이다. 그래서 보통 주문할 때는 상대가 묻기 전에 필요한 정보를 미리 말해버린다. 그래야지 커피를 준비해 주는 사람과 주문하는 사람 사이의 어색한 대화 시간을 줄이고 거리감을 적절히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기본 사이즈로, 테이크아웃이요. 영수증은 안 주셔도 돼요"

이렇게 말을 하면, 보통 주문을 다시 확인하거나 결제 가격을 알려주는 대화가 이어진다. 그러면 "네" 정도만 말하고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사장님은 예상하지 못한 답을 했다.


"언제 드실 건가요?"


이해하기 쉬운 모국어가 분명한데 질문을 듣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커피를 주문하면서 처음 듣는 질문이었다. 내가 알아채지 못한 의도가 있는 건지, 테이크아웃 주문을 다시 확인하는 건지, 다른 이유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상대의 얼굴 표정에서도 숨은 뜻을 찾을 수 없고 반대로 내 표정에서는 당황스러움이 퍼지고 있었다.


"... 네?"

"커피, 언제 드실 거예요?"


이미 테이크아웃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좀 전에 주문도 확인해 주셨는데. 뭘 어떻게 해야 말해야 하나 어버버 하는 동안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고 그제야 사장님은 힌트를 주는 듯 이야기를 먼저 풀었다.


"걸어가면서 드실 건지, 차 타고 가시거나 조금 이따 드실 건지 여쭤본 거예요. 조금 이따 드실 거면 가시는 동안 식는 시간 감안해서 물 온도를 좀 더 뜨겁게 해 드리려고요. 바로 드실 거면 기본에 맞춰드리려고요."


아, 감사합니다 사장님. 의미를 알려주셔서. 사장님이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한참을 당황하고 있거나 이상한 답을 했을지도 모른다. 쿨한 척 "사장님 마음대로 주세요"라고 말했을 수도 있고, 다시는 이 카페를 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용기 내어 "여쭤보신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되물었을 수도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예상치 않게 에너지를 쓰는 건 너무 피곤한 일이다.


"아 네. 걸어가면서 마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커피를 받아 들고 서둘러 카페를 나왔다. 당황스러웠지만 그 의도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카페를 나오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이곳의 단골이 되어버렸다. 자신이 내린 커피에 대한 자존심 때문일지, 고객을 위한 배려심일지, 다른 이유일지 그런 태도로 준비해 준 커피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깐. 매일 들를 수는 없지만 주변에 커피를 추천한다면 이곳을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


걸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셔보았다. 뜨겁지 않았다. 차리리 따뜻함에 더 가까웠다. 그동안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너무 뜨거워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마셔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뜨거운 아메리카노인 셈이었다. 그런데 이 커피의 온도는 그보다 낮았고 따뜻했다. 마치 향기도 뜨겁지 않고 따뜻한 부드러움으로 퍼지는 듯했다. 너무 뜨겁지 않으니 커피가 갖고 있는 여러 맛들이 바로 느껴졌다. 처음에는 쓴 맛이, 이어서 약간의 신맛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과학시간에 크로마토그래피를 이용해서 색소를 추출하면 숨겨진 색들이 천천히 드러나는 것과 비슷했다.


커피는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고 깔끔했다.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한 모금 마시려고 하는데 입안에 아로마향 같은 게 느껴졌다. 은은하게 입안에 퍼졌다가 스르르 사라지고 있었다. 혹시 입술보호제 바른 게 체리향 첨가인가 싶어 확인해 보았는데 아니었다. 그건 커피에서 나는 향이었다.  코로 맡는 향기뿐만이 아니라 입안에 감도는 향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오로지 커피 맛과 향에 집중해 있었다.


그날 언제 마실건지 묻는 질문 하나에 나의 빈곤함이 바닥을 드러냈다. 사장님의 무공에 나는 날아가고 쓰러져버렸다. 하지만 덕분에 깨달음을 얻었다. 커피가 가진 매력을 드러내는데 온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부터 어느 지역 원두를 어느 정도 로스팅했는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카페에 가면 "산미 있는 원두나 커피로 부탁드려요." 라거나 모카포트에 넣을 원두를 살 때는 "아로마나 과일향이 남는 커피가 있을까요"라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아마 커피는 카페인을 채우기 위해 마시거나 테이블과 의자로 된 카페의 일부 공간을 얼마 동안 사용하기 위해 값을 치러야 하는 음료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맛보다는 용도가 우선하는 기호식품.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커피는 이제 마음의 매무새를 다듬는 음료이다. 어디서든 커피를 마시게 되면 사장님이 묻던 말과 그 안에 담겨 있던 호의가 떠오른다. '좋은 서비스를 받았다'가 아니라 '그런 모습으로 사는 게 참 부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맛있는 커피를 마시다 보면 입안에 스르르 퍼졌다가 사라지는 향처럼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배려가 있다면 하고 싶어 진다. 그날 내게 사장님이 물었던 마음처럼 겸손하고 따뜻해지고 싶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커피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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