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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딘 Jul 11. 2024

잊은 줄 알았는데

향기가 묻는 질문, 향의 맛

어느 날 아이가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며 설명을 한 적이 있다. 다 같이 식당에 갔을 때 먹었던 건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며 수수께끼 같은 말을 이었다.

"저번에 추어탕집 갔을 때 나온 반찬이야. 빨간색이 있고..."

"어묵 볶음?"

"아니야. 빨간색이고 물컹한데 기다란 게 있어"

"무생채?"

아이는 열심히 자기가 봤던 것을 설명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무엇인지 모르자 짜증을 냈다.

"무슨 맛이었는데?"

"매운데 쫌 달아"

"맵다고? 김치도 아니고..."


"아니!! 그거 있잖아. 오징어로 만든 김치"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아이가 설명하는 음식이 오징어 젓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젓갈이라는 음식을 모른다면 충분히 그럴만한 설명이었다. 빨간 고춧가루에 버무린 음식, 김장 소에 들어가는 채 썬 무처럼 기다랗고 물컹한 식감의 오징어. 아이는 나름 최선의 노력을 한 셈이다.


음식은 다양한 방법으로 기억에 남는다. 한 가지 방법으로만 남는 건 아니지만 음식을 떠올렸을 때 먼저 활성화되는 정보는 사람마다 다른 듯하다. 아이처럼 모습을 먼저 떠올리기도 하고 맛이 먼저 생각날 수도 있다. 요리하는 과정에서 들었던 소리도, 식감도, 향기(냄새)도 가능하다.


그중에 음식과 재료의 향에 대한 기억은 시각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음식의 모양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미지를 떠올리고 색과 모습 등을 말로 풀어내야 한다. 그런데 향기는 그런 과정을 거치기 전에 먼저 훅 밀고 들어온다. 무방비 상태에서 한 방 맞은 것처럼 충격을 주면서 감정을 먼저 자극할 때가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배달원이 내리고 난 뒤에도 남아 있는 후라이드치킨의 향기를 느꼈을 때 '우와 치킨 냄새다'라고 확인하기보다 '아 맛있겠다'라는 감정이 더 밀려드는 것처럼.


20대였을 때,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 역 방향으로 걷다 보면 종종 멀리서 잊고 있던 향기가 느껴지곤 했다. 딸기 향기가 날아오고 자두나 풋사과 향이 느껴졌다. 지하철 출입구 어딘가에 과일가게가 있는 듯했다. '이렇게 계절이 바뀌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노점의 바구니에 담긴 더덕에서 올라오는 향긋함은 멀리서도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진 향기와 길거리에 가득한 여러 향 속에서 왜 그것은 불현듯 드러나는지, 다른 사람들은 저 향이 무엇인지 아는 걸까, 나는 왜 그것을 알아챌 수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다만 해가 진 저녁 시간 피곤한 몸을 움직여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며 집으로 가는 길에 그런 향을 맡으면 왠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향긋한 과일 향을 맡으면서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건, 이 향기가 무엇인지 알아챈다는 게 마치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과정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도시에서 생활하고 도시인처럼 보이더라도 네 속은 그게 아니라고, 마치 "나는 떠날 때부터 다시 돌아올 줄 알았지"라고 시작되는 노래가사처럼 너는 다시 돌아오게 될 거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부정할 수도 없고 그러고 싶다고 선택할 수도 없던 순간이 오랫동안 계속됐다. 도시에서 지나치다가 느껴지는 향기는 네가 정말 있고 싶은 곳은 어디냐고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는 질문이었다.


향기만으로도 재료나 음식이 충분할 때가 있다. 아이가 어떤 삶을 살지 모르지만 오징어김치 말고도 자신을 깨우는 향기를 만나게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바람이 있다면 그 향이 나보다 더 풍성하고 다양했으면 좋겠다. 나를 자꾸 움츠러들게 하지 않는, 살아가며 누릴 수 있는 향기가 가득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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