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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딘 Jul 04. 2024

역치값 높이기

맛조개에서 건홍합까지, 감칠맛

어렸을 때 어머니가 끓이던 미역국에는 맛조개가 들어가곤 했다. 맛조개는 그다지 쉬운 맛은 아니었다. 쫀득쫀득한 식감은 괜찮았지만 해감이 덜 되어 뻘이 자금자금 씹혔다. 국그릇 바닥에는 자잘한 모래가 가라앉아 있는 경우가 흔했다. 그래서 미역국에 밥을 말아먹기보다 숟가락으로 미역과 국물을 떠먹어야 했다. 하지만 해감보다도 맛조개 특유의 맛이 더 문제였다. 맛조개는 미역국에 진한 무엇을 우려냈다. 어린이의 입맛에 그것은 너무 아렸다. 아리다는 게 맛이라고 해야 할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이가 먹기에 맛조개는 부드럽고 순하기보다 입안을 얼얼하게 하는 맛이었다. 눈으로 보기에는 보통의 미역국과 다르지 않은데 맛을 보면 입안에 확 퍼지는 특유의 알싸한 맛이 있었다.


그 시절 맛조개는 싸고 흔한 재료였다. 그래서 맛조개를 사다가 석쇠에 얹어 구워 먹기도 했다. 바지락보다 기다랗게 생겨서 국에 넣어 요리하기보다 구워 먹는 게 훨씬 어울렸다. 석쇠에 얹은 조개의 한쪽 껍질이 갈색으로 타기 시작하면 조갯살에서 나온 육즙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그러면 젓가락으로 톡 건드려도 조갯살은 쉽게 떨어졌다. 여전히 해감이 덜 된 조개에서 모래가 씹혔지만 구웠을 뿐인데도 미역국에 들어간 것보다 더 쫄깃했고 맛이 진했다. 익을수록 아린맛도 줄어들었다. 맛조개가 풀어내는 맛은 초장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감칠맛에 민감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 신혼 초에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배우자가 만든 음식은 내 입맛에 항상 뭔가 부족했다. 맛있다고는 했지만 뭔가 심심한데? 싶은 공백. 계란찜을 하면 당신은 맛소금으로 간을 했고 나는 새우젓으로 간을 해야 입맛에 맞았다. 묵은지찜을 하면 상대는 양파를 가득 넣어 달달함을 채웠지만 나는 멸치나 디포리, 다시마를 넣어 함께 우려내야 만족스러웠다. 젓갈이 들어가지 않은 담백한 김치보다 젓갈 맛이 팍 아우성치는 김치가 좋았다. 가래떡을 구워서 간식으로 먹을 때 조청, 간장, 조미김, 다시다 조미료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다시다를 골랐다. 그이는 떡에 왜 조미료를 찍어먹냐고 기겁했지만 내게는 자연스러운 맛이었다. 


그럼 왜 내 입맛은 이렇게 된 걸까. 감칠맛의 민감도를 수치화한다면, 나는 왜 역치값이 커져 있는 걸까. 내가 뭘 먹었길래, 무슨 재료나 맛에 길들여져 있길래 그런 걸까. 과거를 되돌아보다 보니 가장 그럴듯한 가능성 중 하나가 맛조개였다. 너무 써서 먹기 싫어지는 씀바귀 무침과는 다르게 너무 아린데도 왠지 끌리는 맛. 아리다는 건 아마도 조개의 감칠맛이 그때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청양고추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어른도 어렸을 때는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도 맵다고 할 테니까. 그런데 그런 재료를 반복해서 먹었으니 점점 작은 양의 감칠맛에는 둔감해지고 만족하기 어렵게 되었을 것이다. 


감칠맛은 마법과 같다. 단순한 세상을 순식간에 풍요롭게 만든다. 맛조개 덕분에 내 어린 시절 세상의 맛은 더욱 드라마틱해질 수 있었다. 감칠맛은 음식의 바닥을 은은하고 뭉근하게 다져준다. 그러면서도 가볍게 날아가지 않고 계속 맴돈다. 마치 해피엔딩을 예정하고 있는 기분 좋은 판타지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맛이다. 너무 과하지만 않는다면 계속 채워두고 싶게 한다. 


그래서 나도 아이를 키우면서 감칠맛을 충분히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돼지고기에 새우젓이나 멜젓을 먹어보도록 하고 나물을 무칠 때 참치액젓이나 멸치액젓을 넣는다. 찌개를 끓일 때 된장도 좋지만 쌈장을 함께 풀기도 하고 한 번은 조선간장을 한 번은 진간장을 써보기도 한다. 육수를 우려낼 겨를이 없으면 조미료를 한 꼬집 넣었다. 어려 시도를 했지만 아이에게 이번 감칠맛은 어떠냐고 묻지는 않았다. "써, 뭔가 느끼해, 달아"라고 평하는 건 실패였고 "맛있어!"라고 눈이 커지는 건 성공이었다. 감칠맛이라는 단어는 모르지만 맛있다는 말이 무엇 때문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지만 입이 심심하면 아이와 나는 종종 냉동실에 넣어둔 건홍합 살을 꺼내서 우물우물 씹어먹는다. 당근이나 오이를 썰어서 스틱으로 먹는 것보다 홍합살을 먹는걸 자연간식으로 더 좋아한다. 처음 냉동실에서 꺼내서 맛보게 해 준 건 나였지만 아이가 그렇게 즐겨 먹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랬듯, 아이와 나 사이에도 비슷한 성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꾸 끌리는 맛이 맛조개에서 건홍합으로 바뀌었을 뿐일까. 어쨌든 역치값은 점점 올라가고 있다. 잘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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