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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딘 Jun 20. 2024

주연과 조연

잘 어울리는 조합

아직 쌀쌀하던 3월 우연찮게 어느 카페에 들렀다. 베이컨, 쪽파, 크림치즈가 들어간 빵으로 유명해진 곳이라고 했다. 따뜻한 커피와 시그니쳐 메뉴를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전체적으로 흰색 배경으로 된 건물에 살구색의 오전 햇빛이 테이블로 떨어지는 상황이어서 더욱 따뜻한 분위기였다. 주문한 빵은 흰색 바탕에 파란색 글씨가 쓰여 있는 접시에 올려져서, 커피는 흰색 머그잔에 담겨서 나왔다. 빵 사이에 보이는 흰색 크림치즈와 선홍색 베이컨, 초록의 쪽파가 흰색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둘러보니 주인처럼 보이는 분도 흰색 티를 입고 계셨다. 오늘, 이 시간, 지금의 많은 조건이 음식과 잘 어울렸다.


빵을 맛보기 전 커피를 모금 마셨다. 그리고 커피가 목을 천천히 타고 넘어가자마자 확신했다. 


'이 커피는 조연이 되려고 작정했구나.'


커피는 산미를 찾기 어려웠다. 향도 보통의 커피와 비슷했다. 고소한 맛이 더 가득했는데 그렇다고 쓴 맛이 센 것도 아니었다. 평소 산미 있는 커피를 좋아하기에 보통의 날이었다면 그냥 그런 커피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뒷맛이 깔끔하게 떨어졌다. 그러니 이 맛을 저 빵과 함께 먹는다면? 크림치즈가 발라진 빵을 먹은 후에 이 커피를 마신다면, 느끼함을 씻어내면서 입안에 고소함과 개운함을 남게 할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쪽파의 살아있는 맛과 향이 살짝 일어났다가 사라질 테고. 그러면 또 빵을 한 입 더 베어 물고 다시 커피를 맛보게 될게 분명했다. 예상치 못한 커피와 빵의 조화로움이 신비로웠다. 서로 최고가 되기 위해 툭닥거리는 게 아니라 오랜만에 최적의 조연과 우직한 주연을 마주하고 있다. 그래서 커피를 마시며 기분이 좋아졌다. 행복하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이 순간을 말해주고 싶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는 말처럼 보통은 잘 모르겠다가도 뭔가 어그러지면 맛을 해치는 경우가 있다. 어느 장어구이 집은 생강초절임 맛이 너무 강했다. 쌈에 장어와 생강을 넣고 먹으면 생강이 제일 앞부터 치고 나왔다. 반대로 메인 음식을 잘 보필하는 경우도 있다. 그 족발집은 주문하면 바로 무쳐서 담아주는 새콤하고 칼칼한 부추절임이 제격이었다. 혼자만 먹으면 부담될 텐데 족발과 먹으면 무거워지는 느낌을 산뜻하게 눌러준다. 주연과 조연은 서로 그런 어려움이 있다. 


주연이 조연처럼 있으면 영화는 망한다. 조연이 주연이 되려고 해도 영화는 망한다. 누가 주연인지 조연인지 모르는 영화는 애매해진다. 주연은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어 밀고 나가야 한다. 조연은 주연을 보조하며 주연이 하지 못하는 부분을 채워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서로 내 역할을 하겠다며 독립할 수는 없다. 한 편의 영화에 같이 출연한 이상 그들은 함께 해야 한다. 주연과 조연은 혼자 존재하는 것보다 상대와 함께 존재하며 제 역할을 할 때 서로 시너지를 얻는다. 음식도 마찬가지여서 영화라는 말을 음식으로만 바꾸고 주연을 빵이나 장어구이로, 조연을 커피나 생강초절임으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다. 


세상에 수많은 음식, 재료의 조합이 있다. 그중에 조화로운 음식을 만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조화를 만들어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건 행운이다. 내가 주문한 음식은 예전부터 누군가가 계속 고민해 온 질문에 대한 결과이다. 그러니 겸손하고 감사하게 맛을 대하는 게 음식과 상대에 대한 예의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수고로움의 결과로 나는 이 음식을 맛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 


그래서 다음에 그 카페에 가게 된다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라는 말 보다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마음속으로 '아, 당신은 이렇게 두 가지 맛을 이렇게 연결하시려는 거군요.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저는 마음에 들어요. '라고 음식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다. 한 잔의 커피 주문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곳. 꼭 대표 빵과 커피를 함께 주문해야 하는 카페를 찾아가서 나는 만들 수 없지만 당신과 이 음식을 계속 지지하고 있겠다는 의미를 담아 메뉴를 포장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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