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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딘 Jun 13. 2024

어머니의 필살기

빈 곳을 채우는 두 가지, 단순함과 변화

어머니의 음식은 투박하다. 아버지의 맛도 투박하지만 차이가 있다. "윽!" 하고 강한 자극으로 오는 게 아버지라면 어머니가 만든 음식은 "음..." 하고 온다. 특히 두 가지 면에서 아버지와 다르다. 어머니의 맛은 훨씬 단순하며,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최적의 상태에 정지되어 있지 않는다. 섬세하기보다는 듬성듬성하달까. 


부모님 댁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올 때 엄마가 하는 음식을 먹으면 신기하게 속이 편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이유가 뭘까, 추측건대 첫 번째 가능성은 맛의 단순함 때문이다. 감칠맛을 좋아하는 내 입맛과는 다르게 어머니의 음식은 감칠맛이 크지 않다. 설렁탕을 시켜서 맛소금으로 간을 하는 것과 꽃소금으로 간을 하는 차이, 순댓국에 새우젓으로 간을 하는 것과 소금으로 간을 하는 차이가 나와 어머니 사이에 찾게 되는 맛의 간극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음식에는 익숙한데 뭔가 덜 채워져 있는 것 같은 빈 공간, 단순함이 있다. 그래서 먹다 보면 맛이 주는 자극과 부담이 덜하다.


그런 단순함으로 가득한 어머니의 음식 중 하나가 도토리묵이다. 식감을 제외한다면 가루 본연이 갖고 있는 약간의 짠맛, 묵을 굳히는 용기 벽면에 바르는 참기름의 맛과 향으로만 되어 있는 음식. 가을이면 도토리를 주워서 물에 넣고 말리고 빻는 과정을 계속하신다. 어렸을 때에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도토리 웃물을 한 번 버리고 놀러 나가라는 심부름을 몇 번씩 하곤 해서 도토리가루를 얻기까지 얼마나 번거로운 일을 계속하는지 알고 있다. 그렇게 정성으로 만든 가루로 묵을 쑤면 채소와 고춧가루, 간장, 매실청 등으로 버무리는 게 아니다. 어머니는 그냥 썰어낸 묵을 참기름과 섞은 간장을 종지에 담아 올리실 뿐이다. 가끔 간장이 진하다고 물을 타기도 하신다. 무미는 아닌데 그렇다고 맛있다고 하기도 어렵다. 대체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 거지? 싶으면서도 젓가락을 놓지 못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음식에서 느끼는 단순함을 다른 방식으로 채우곤 하셨다. 어머니는 명절이나 생일처럼 가족이 함께 모이는 날이면 두 가지 음식을 준비하셨다. 하나는 도토리묵이고 다른 하나는 나박 물김치. 도토리묵과 나박김치는 서로 다른 성질의 음식이었다. 도토리묵이 언제나 대체로 비슷한 맛을 낸다면 나박김치는 맛을 결정하는데 예상할 수 없는 변화 요인이 많았다. 나박김치는 계절(날씨)에 따라 언제 만드는지, 어떻게 보관하는지에 따라 맛이 달랐다. 언제는 모임에 딱 맞게 익어서 시원한 맛이 일품이기도 했고 다른 때는 아직 덜 익어서 짠맛만 가득하기도 했다. 너무 빨리 익어서 맛의 절정을 찍고 내려가기 직전인 경우도 있다. 김치냉장고가 없던 시절부터 계속되어 온 특징이었다. 그래서 나박김치는 가족에게 완성된 음식을 내어놓는다기 보다는 모임 날 익어가는 변화를 살피며 즐기는 음식이었다. "아직 좀 맛이 덜 찼는데?" 하면서 먹고, "딱 좋네", "이번 주까지는 다 먹어야겠네"라고 말하며 나박김치 국물을 마시다 보면 단순함으로 생긴 빈 공간을 채우는 기분이 드는 듯하다.


비어있음과 고정되지 않음을 전제로 하는 맛. 어머니의 맛은 여전히 그렇다. 요즘에는 부모님과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언제까지 저 음식과 맛을 맛볼 수 있을까 싶을 때도 있다. 이 음식의 맛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재현할 수 있을까. 내가 도토리 가루를 준비하는 수고로움을 할 것도 아니고 나박김치는 마트에도 팔고, 김치냉장고에서 비슷한 맛으로 오래 보관할 수도 있는데... 어머니의 맛은 나중에도 맛볼 수 있을까. 왠지 한 사람의 생과 함께 맛도 소멸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헛헛하기도 하다.


분명 어머니의 음식은 내가 좋아하는 맛은 아니다. 하지만 몸을 편하게 해주는 느낌이 있다. 먹다 보면 담백하고 가벼워지는 듯하다. 그래서 종종 먹고 싶어 진다. 더구나 어머니가 만들어내는 맛의 단순함과 변화는 모두 유한하기 때문에, 더 영원한 것처럼 이 순간에 맛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맛을 재현하지는 못할 테니 느낌으로라도 몸과 마음 어딘가에 잘 갈무리해두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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