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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딘 Jun 27. 2024

프로레슬링처럼

알고도 속으면서도 찾는 맛

해장국. 속을 풀어주기 위해 먹는 음식. 속이 좋지 않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면 동료는 점심시간에 해장국을 포장해서 가져오곤 했다. 밥도 못 먹는데 이걸 어떻게 먹냐고 투덜거리면서 숟가락으로 국물을 한 술 떠서 마시는 순간이 여전히 선명하다. 숙취로 고통스러워하는 몸의 구석구석을 향해 지금까지 고생 많았고 이제 내가 왔으니 괜찮을 거라고 속삭이는 위로와 치유의 어루만짐. 그건 따뜻한 국물이 식도와 위장으로 내려가는 수준이 아니었다. 내 몸을 위해 헌신하고 있음을 의심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해장국은 경건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맛보는 음식이 되었다.


먹을 때는 몰랐지만 몸이 온전해지고 나서 되돌아보면 그때 해장국은 큰 정성으로 만든 음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식당에 들어서는 알코올에 절은 수많은 사람들의 해장을 책임지려면 24시간 내내 고기나 선지를 삶고 육수를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했다가는 해장국 가격은 지금보다 훨씬 더 비싸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가격만 보아도 분명 다른 방법을 쓴다는 게 합당해 보였다. 게다가 국물의 간도 오랜 시간 끓이면서 재료에서 뽑아냈다기보다는 맛을 느끼기 힘든 상태의 혀와 소화기관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간간하고 자극적이었다. 수익성, 시간, 효율성 등을 따져볼 때 해장국은 조미료가 필수였다. 결국 해장국은 조미료가 가득한 음식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어느 날 친구와 술을 먹지 않은 채 식사를 위해 해장국을 먹으러 갔을 때 "조미료 맛이 센 것 같아"라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추측을 좀 더 확신했다.


해장국. 조미료가 충분히 들어간 음식. 감칠맛과 간, 여타의 맛들이 가득 들어간 자극적인 음식이라고 해서 먹기 싫어진 건 아니다. 배신감도 없었다. 해장국은 오히려 너무 과한다는 걸 걸 알면서도 찾게 된다. 나의 약점을 파악하고서 속이려고 하는 시도와 그걸 알면서도 짐짓 속아주는 응답이 오간다. 속고 속이는 걸 전제로 하고 마주하는 게 프로레슬링과 비슷하다.


음식점에 들어가는 순간은 프로레슬링 공연을 기꺼이 관람하겠다는 결정이다. 내 지친 몸과 대비되는 근육 가득한 플레이어의 모습으로 해장국이 나온다. 국물을 맛보고 속이 찌르르 녹는 느낌이 나고 뒤이어 밥과 건더기를 조금씩 씹어보는 전개는 프로레슬링 스토리에서 드러나는 주인공과 빌런의 갈등처럼 반복된다.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함이지만 싫지 않다. 그렇게 해장국을 맛보며 점점 빠져들게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해장국을 먹으면서 "크으"하는 만족의 소리를 내는 건, 위기를 이겨낸 플레이어의 기예에 대해 잘 감상했다는 관객의 박수와 같다. 프로레슬링에서 주인공은 고난을 극복하고 영웅이 된다, 나도 지금의 고통을 극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장국을 더욱 열심히 먹는다. 해장국에 담긴 조미료는 공연 전체의 분위기를 돋우는 조명과 음악과 비슷하다. 관객에게 기분 좋은 흥분을 경험하게 한다.


음식은 솔직하고 진실하기도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아이가 먹는 김치에 고춧가루 대신에 파프리카를 넣어서 색만 넣기도 하고 콩으로 고기의 식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다 그만한 필요와 이유가 있다.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다 보면  육수를 내거나 맛을 올리는데 충분한 시간이 없을 때, 무언가 맛이 빈다는 느낌이 들 때, 솔직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조미료를 쓰게 된다. 상대를 속이려는 목적은 아니지만 한 꼬집으로 덕분에 식사는 좀 더 자연스러워질 수 있고 편하고 즐거운 대화로 이어지게 될 테니까.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조미료맛이 가득한 해장국을 좋아한다. 예전처럼 자주 먹지는 않지만 해장국에서 느껴지던 진한 감칠맛을, 짧은 시간 동안 끌어낼 수 없는 비현실적인 농도의 맛을 여전히 좋아한다. 음식을 만들 때 조미료를 너무 많이 쓰는 게 아닌가 하고 떨떠름한 적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해장국 덕분에 많이 자유로워졌다. 맛은 프로레슬링처럼 짜고 치는 판이다. 취객의 입맛이 아니라 보통의 입맛에서도 즐거움을 줄 정도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래서 요즘도 한 꼬집으로 속인 듯 안 속인 듯 맛의 모호한 경계를 시험한다. 프로레슬러가 되어 링 위에 오르는 기분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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