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딘 Jul 18. 2024

억울하게 맛있는

기다리면 안 되고 직접 찾아가야 하는 맛

옥수수는 딱히 좋아하는 식재료는 아니었다. 차라리 감자를 삶아서 소금이나 설탕에 찍어먹으면 더 좋지, 옥수수가 왜 맛있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친구들과 밤낚시를 하다가 배가 고파졌을 때 동네 밭에 심어진 옥수수를 서리해다가 구워 먹은 적이 있긴 했다. 탱글탱글하지도 않고 식감도 별로였던 옥수수를 들키까봐 몰래몰래 구워 먹는 스릴은 있었지만 그때도 별미라는 느낌보다는 일탈에서 오는 희열과 허기짐을 채우려는 게 더 강했다. 딱딱하고 고소하긴 해도 있으면 먹고 아님 말고 정도의 음식. 나중에야 서리했던 옥수수가 사실은 가축 사료용으로 키운 옥수수였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옥수수에 대한 호불호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데면데면한 사이였던 옥수수를 새로 알게 된 건 장모님 덕분이었다. 처가 식구들과 강원도 어딘가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저녁에 옥수수를 삶아 먹자는 말에 동네 시장 가는 길에 동행했다. 멀지 않은 길을 걸어가며 '고기를 더 사거나 하는 게 아니라 굳이 옥수수를?' 싶었으나 '때가 그 철이니까', '오랫동안 강원도에 살고 계시니깐'이라 추측했다. 심심하던 차에 침묵을 깰 겸 물었다.

"어머니, 어떤 옥수수를 골라야 맛있어요?"

수박 고르듯 옥수수도 비슷한 방법이 있는 줄 알았다. 껍질이 어떻고 향이 어떻고 만져봤을 때 단단함이 어느 정도 되고... 를 예상했다. 하지만 장모님의 답은 달랐다.

"으응, 밭에서 바로 딴 거면 돼."

그러고 나서 시장에 도착하기 전에 길가에 팔기 위해 모아둔 옥수수 앞에 서서 노파에게 똑같이 물어보셨다.

"할머니, 이 옥수수 언제 따신 거예요?"

"여기 옆 밭에서 지금 따 온 거예요"

"아, 이 밭에서 바로 따셨어요?"


장모님은 한 번 옥수수를 스윽 훑어보고 언제 딴 건지 다시 묻고 별다른 의심 없이 옥수수 값을 치르셨다. 그게 전부였다.


그날 저녁 나는 지금까지 먹어왔던 옥수수의 양보다 더 많은 옥수수를 하루 만에 먹어치울 기세로 삶은 옥수수를 먹었다. 옥수수는 의심의 여지없이 달고 찰졌다. 그러니깐 옥수수는 정말 맛있었다. 배가 터질 것처럼 부른데도 솥에서 갓 삶아 나온 흰 옥수수와 검정 옥수수를 하나씩 집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에 별들이 옥수수 알갱이를 흩트려 놓은 듯했다. 옥수수를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이건 억울하다.

나는 그동안 속고 살았다.


속았다. 옥수수는 맛있는 것이다. 제철 옥수수는 정말 맛있는 거였다. 그래서 너무 억울했다. 지금까지 왜 몰랐단 말인가. 위로의 말을 전하자면, 옥수수는 수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건에서만 정말 맛있는 것이다.


그날 밤 장인어른의 옥수수론에 의하면,

1. 대부분의 식물이 그럴 테지만 옥수수도 수확하고 나면 종족보존을 위해 낱알에 있는 당분을 녹말로 바꾸고 껍질을 두껍게 만들기 시작한다. 2. 그러면 질겨지고 단맛도 줄어들게 된다. 3. 그러니깐 제일 맛있는 옥수수를 먹으려면 강원도 국도를 달리다가 옥수수밭이 있는 길가에서 바로 삶아서 파는 곳을 찾으면 된다. 4. 갓 딴 옥수수는 소금 설탕 사카린 없이 그냥 물로만 삶아도 충분하다. 5. 아마 그동안 네가 먹은 옥수수? 수확해서 바로 삶지 않았을 확률이 높지. 그러니 맛이 그럴 수밖에. 6. 그리고 옥수수 꽃가루는 사방 몇 킬로를 날아간다. 네가 아무리 좋은 옥수수 품종을 심더라도 주변에 사료용 옥수수 키우는 곳이 있다면 교잡종이 생길 가능성도 높지. 그런 옥수수 맛은 말 안 해도 알겠지?


그랬군요. 그동안 우리 집 어른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왜 그랬을까요. 왜 몰랐던 걸까요. 

도대체 왜!!!


옥수수 맛은 숙성에서 오는 맛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산지 직송도 불가한 재료였다. 그때부터였다. 처가에서 텃밭에서 수확한 옥수수를 고속버스 택배로 보내겠다고 연락이 오면 나는 한사코 반대했다. 처가에서 내 집까지 두세 시간이면 갈 거라고 했지만 그 시간에 이미 옥수수의 맛은 급락하고 있을게 뻔했다.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 옥수수 따는 날짜 알려주시면 제가 가서 같이 따고 삶아서 가져올게요" 

하루를 오로지 써도 아쉽지 않을 가치가 있었다.

"아침에 옥수수 때문에 와서 일하고, 삶아서 오후에 내려가겠다고?"

"네. 바로 출발할게요."

밭에 도착해서 수확한 옥수수는 삶지 않은 채 생 낱알을 떼 먹어도 딱딱하지 않아 부드럽고 달콤했다. 날 것으로 먹어도 충분히 맛있었다.  


이후부터 우리 집에도 처갓집에도 냉동실에는 갓 삶아서 급랭 시킨 옥수수가 한가득이다. 가을 겨울을 보내고 다음 여름이 오기 전, 냉동실에 있는 옥수수가 떨어져 가면 불안하고 조마조마해진다. 그동안 많이 먹은 게 문제일까 너무 적게 쟁여 놓은 것이 문제였을까. 


그때 먹어야 딱 좋은 음식과 재료가 있다. 재료 본연의 맛으로 승부할 수 있는 때. 자두가 제철일 때는 샐러드 소스 없이 자두만 썰어 넣어도 충분하다. 평양냉면은 무 맛이 제대로 드는 겨울에 먹어야 제맛이다. 꼬막은 1월 한창 추울 때 난 것을 살짝 삶아 먹어야지만 예의에 맞고 6월에 먹는 참소라는 초장 없이도 달큰하다. 행복하려면 재료의 특징을 알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필요하면 직접 찾아가야 한다. 내가 그 음식을 찾아가는 건, 택배의 기다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만족이고 행복이다.


아 장모님... 햇 옥수수가 먹고 싶어요.

제갈공명의 동남풍처럼, 사위를 소환하는 마법의 주문은 아직인가요.

옥수수 밭에 여름의 햇빛과 비와 바람이 아직 필요한 건가요. 

 





























이전 18화 잊은 줄 알았는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