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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땠을까

만약 다른 일을 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by 여백 Feb 20. 2025

혈기왕성한 20대 시절,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살면서 한 가지 직업만 갖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붙으면 교사로 일하다가 돈 많은 집에 시집가서 40세 전에 딱 그만두고 곡 쓰면서 행복하게 살 거야.”




2024년 4월 11일.

요새 내 얼굴엔 알 수 없는 붉은 형체가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다. 며칠 후 이것들이 서서히 얼굴 전체를 덮기 시작했다.


오늘 겨우 조퇴를 하고 피부과를 갔더니 주사 피부염이라는 생소한 진단 결과를 받았다.


왜 이런 염증이 생긴 걸까?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자외선, 음주, 과도한 운동.. 다 아닌 것 같다.


원인은 '열'이다.




최근 행정실과의 갈등으로 거의 이성을 잃기 직전까지 갔었다.


교무실에서 꽥 소리를 지르게 만들었던 그때의 급작스러운 스트레스와 상체열로 얼굴 전체에 염증이 퍼진 것 같다.


40세 전에 그만둬야지라고 편히 생각했던 나의 직업은, 살아남기 위해 기를 쓰고 겨우 버티는 곳이 되었다.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던 나는, 매일 ccm만 연주하고 레슨 5분 전 클래식곡을 벼락치기로 연습하는 불성실한 학생이었다.


이렇게 연습 안 하면 전공 못한다는 레슨 선생님의 말에, 그럼 공부나 열심히 하자며 중학교 때 음악을 포기했었고, 예고 진학을 권유하는 선생님들께도 “ 저 음악 안 해요.”를 앵무새처럼 말하고 다녔다.



시간이 흘러 고1 겨울방학이 되었다.


난 음악과 떨어져 살 수 없는 인간임을 깨닫고 부모님의 반대 끝에 다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다.

작곡가를 꿈꿨던 나는 조금 자만했다.

과목별 선생님들의 칭찬은 나에게 독이 되었다.


겸손함을 배우라는 뜻인지 예비번호가 빠지지 않아 자동으로 재수를 하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인생 계획에는 없던 사범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학교를 가니 재미도 흥미도 없는 교육학을 배우게 됐고, 작곡과가 아닌 음악교육과이다 보니 이미 다 아는 내용의 쉬운 수업을 타 전공 학생들과 같이 듣기도 하였다.

본능적으로 이건 진짜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붙었던 음대를 포기하고 사범대에 왔건만 후회가 몰려왔다.


큰 맘먹고 반수를 하려고 했다. 부모님께서도 나의 의견을 존중해 주시며 다시 한번 해보라고 했다.

아무한테도 밝히진 않았지만, 일부러 입시에 도움이 될 수 있게 부전공도 피아노로 하여 피아노 교수님께 레슨도 잘 받고 있었다.

그리고 반수를 하려고 확실히 마음먹으려던 차에 갑자기 계획에 없던 일이 벌어졌다.


15분 정도 레슨해주시던 기존 교수님이 안식년으로 쉬게 되셨다. 그리고 새로운 교수님과 함께하게 되면서 난 반수를 할 필요성이 사라졌다.




작곡은 정말 어렵다.

남들은 고학년이 되면서 보통 작곡을 포기하게 되는데, 난 특이하게도 점점 재밌어졌고, 열정적인 교수님과 열정적인 제자의 시너지 효과는 엄청났다.


교수님은 나의 재능을 인정해 주셨고, 진로 상담을 꾸준히 하며 대학원 진학 혹은 유학 준비를 앞두고 있던 상태였다.


4학년 5월,

교생 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고1 여학생들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내가 학생들을 이렇게 좋아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었다.

한 달 내내 정말 즐거웠다. 특히 나의 수업을 똘망한 눈으로 들어주는 모습에 크게 매료되었고 수업 때마다 마음속 깊이 무언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당시 진로 문제와 이성 문제를 기도 제목으로 잡고 40일 특별 새벽기도에 참석하던 중이었는데, 가슴속에서 끓는 이 무언가가 바로 응답이라 생각됐다.



“교수님, 많이 생각해 봤는데요..

계속 작곡 공부를 하게 되면 저희 집 형편에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 것 같아요.

유학 다녀온다 해도 성공하기도 힘들고요…

현대 음악을 하게 되면 결국 마니아층을 위한 음악을 해야 하는 건데 이게 참.. 엘리트 코스를 밟는다는 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아요”


“00야, 내가 너 하나 못 밀어주겠니? 다시 한번 생각해 봐”



교수님은 여러 번 나를 붙잡았지만 이미 나의 마음은 기울어졌었고, 때마침 제출했던 콩쿠르곡도 입상에 실패하면서 나의 인생 계획이 순식간에 뒤바뀌어버렸다.



작곡 전공 선후배가 모두 참여한 마스터 클래스가 열렸다.

다른 전공은 보통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하고 공개 레슨을 받는데, 작곡이다 보니 스크린에 본인 곡을 띄우고 공개 레슨을 받게 되었다.


인디애나 주립대였나.. 대학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약간은 어두운 피부에 안경을 썼던 두 작곡과 교수님의 얼굴은 선명히 기억난다.


아무래도 외국인 교수이다 보니 소통에 부담감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우리 교수님이 통역을 해주셔서 레슨이 비교적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외국인 교수님은 나의 졸업곡을 보고 다양한 음악적 질문을 하셨다. 질문 중에 하나가 아직도 기억나는데, 피아노 건반을 이것저것 눌러보시더니, 특정 부분의 피아노 파트 연주가 가능한지 물어보셨다.


곡을 쓸 때, 그리고 교수님과의 레슨 때 이미 여러 번 연주했던 부분이라 질문 자체가 좀 의아했다.

그때 우리 교수님은 살짝 웃으시며 이런 내용으로 답변하셨던 것 같다.

 "she plays the piano very well"


외국인 교수의 마지막 멘트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나보고 곡을 계속 썼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인정을 받은 것 같아 잠시나마 기분은 좋았다.

나의 현 상황을 아는 동기, 선배들은 다들 깔깔대며 웃었고 난 씁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학창 시절의 선생님들이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아서였을까, 임용고시를 꽤 만만하게 봤던 나는

 겨우 한두 달 준비 후 보기 좋게 1차에 낙방했고,

졸업 후 죽어라 공부했는데도 1차에 합격하지 못했다.

이건 교사를 뽑는 건지 교수를 뽑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렵고 힘들었다


세 번째 시험 때는 이제 마지막이다. 이번에 안되면 관두고 다른 일 찾자.라는 생각으로 공부했더니,

순식간에 최종 합격하게 되었다.



주변에 음악을 계속하는 선후배들을 보며 가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곤 한다. 솔직히 부럽기도 하다.


난 공무원이 되었다.

공무원 집단이 거의 그렇다. 그렇게 고여간다.

열심히 한다고 돈을 더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밤샘하며 수업준비를 열심히 하고,

 매번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수업에 진심인 나 자신을 보면 어느 직장에 들어가도 잘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한다.

음악을 계속해도 꽤 잘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21살에 사범대를 가지 않았다면,

 교생 실습을 그냥 좋은 추억으로 남겨두었다면,

임용고시에 두 번 낙방했을 때 교사의 길을 포기하고

다시 원래대로 길을 틀었다면 어땠을까?


꽤 많이 달라졌을 내 인생과

매일을 보내는 나의 표정이 정말 궁금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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