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과 중환자실 사이에서
작년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현관 앞에 검은색 정장구두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평소엔 나와 있을 일이 없는 부모님의 신발들이었다.
순간 서늘한 기운이 등을 스쳤다. 아, 그날이 왔구나.
큰외삼촌은 암투병 중이셨다. 가을이 깊어가던 때에, 병원 로비에서 마지막으로 본 큰외삼촌은 많이 야윈 채 휠체어에 앉아 계셨다. 우리 오빠 얼굴 좋네, 같이 사진 찍자,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왠지 슬퍼 보였던 기억이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겨울로 접어들며 큰외삼촌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모두가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누군가의 죽음은 언제나 갑작스럽기 마련이다.
장례식장은 서울에서 4시간 반이 걸리는 경남 지방이었다. 부고 연락을 받은 날부터 3일장이었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다음날 일찍 출발해 발인까지 1박 2일 동안 머물 예정이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챙겼다. 오래간만에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실 공연을 보면서도 이런저런 상념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이제 진짜 12월이네, 2024년이 한 달도 안 남았어, 통장 잔고는 바닥을 보이는데 나는 아직도 이러고 있네, 이런 현실적인 생각들이 겹겹이 밀고 들어와 공연이라는 환상에 완전히 몰입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부고 소식을 들으니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공연의 여운도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었다. 여러모로 심란한 채 억지로 잠을 청했다.
1박 2일 예정이었던 외출이 3박 4일이 될 줄은 그땐 꿈에도 몰랐다.
사실 내게 큰외삼촌은 데면데면한 친척 어른이었다. 사고를 쳐서 외할머니의 속을 심심찮게 썩였다는 말을 들었고, 결국 장남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오 남매 중 둘째인 엄마가 장녀 역할을 도맡아야 했다. 가끔은 외할머니나 엄마가 큰외삼촌 때문에 속상해하는 걸 보며, 까닭 없이 큰외삼촌이 원망스러워지기도 했다. 집안의 분위기 역시 큰외삼촌을 뺀 나머지 형제자매들끼리만 돈독한 편이었다. 자연스레 나도 큰외삼촌에게 큰 친밀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막상 부고를 들으니까 착잡해졌다. 어쨌거나 엄마는 혈육을 잃은 거고, 외할머니는 자식을 잃은 거니까.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내게는 얼굴도 몇 번 보지 않은 친척어른이 돌아가신 것보다 그로 인해 상심할 외할머니와 엄마를 챙기는 일이 더 중요했다.
다음날, 가족 모두가 아침 일찍 장례식장이 있는 경남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큰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형님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아빠는 고개를 갸웃하며 전화를 받았다. 별다른 용건이 없으면 좀처럼 전화를 하지 않는 큰아버지가 이른 아침에 걸어온 전화.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별일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통화 내용은 심상치 않았다. 할머니가 넘어져 다치셨다고. 구급차를 타고 다른 도시의 큰 병원으로 이송 중이며, 입원수속에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할머니는 홀로 경북의 소도시에 살고 계셨고 아빠의 형제들은 모두 수도권에 거주 중이었다. 평일이었으니 다들 생업에 묶여 당장 먼 거리를 당장 달려갈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큰아빠는 우리가 마침 대전 즈음에 와 있던 차에 전화를 걸어왔다. 큰외삼촌의 부고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대전까지 올 일도 없었다. 정말, 묘하게도 얄궂은 상황이었다. 결국 아빠는 차를 돌려 할머니를 이송 중이라는 병원으로 향했다.
넘어져서 쓰러져계신 할머니를, 독거노인 생활지원사님이 발견해서 늦지 않게 구급차를 부를 수 있었다고 했다. 할머니가 얼마나 심하게 다치신 걸까. 안 그래도 큰외삼촌의 죽음으로 가라앉았던 분위기에 또 하나의 불안이 겹쳐졌다.
할머니는 노인성 질환으로 약을 드시고 계셨지만 평소에 큰 병 없이 건강하신 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구급차에 실릴 정도로 위독해지셨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게다가 의식이 없다는 말까지 들으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다시 몇 시간을 달려간 병원에서, 할머니가 중환자실에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
낙상사고로 할머니의 고관절이 골절되었고 생각보다 큰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단 할머니를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터졌다. 할머니…라고 부르자마자 할머니의 눈이 놀라움으로 가득 커졌다.
할머니의 그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온갖 감정이 회한처럼 밀려왔다.
나는 결코 살가운 손녀가 아니었다. 지방에 계신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도 못했고, 안부 전화 한 통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여러 사정으로 명절에 할머니댁에 가는 게 여의치 않아, 몇 년에 한 번씩 겨우 얼굴을 볼까 말까 하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그런 눈으로 나를 보고 계신 거였다.
바란이, 네가 여기 웬일이냐.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냐.
할머니의 상태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아빠는 다른 형제들이 올 때까지 병원에 남기로 했다. 우리는 큰외삼촌의 장례식장에 가는 길이었기에 마냥 병원에 머무를 수만은 없었다.
결국 엄마와 나만 큰외삼촌의 장례식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피로와 상심이 가득한 얼굴의 아빠를 혼자 병원에 두고 돌아서는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할머니도 여전히 중환자실에 계신 상태였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 속상했을 텐데도 내색조차 못한 채 얼굴이 까맣게 죽어가던 엄마를 챙기는 일도 내겐 중요했다.
마음은 급한데 지방이라 교통편도 순탄치 않았다. 시외버스를 두 번 갈아탄 끝에 저녁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큰외삼촌의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정말 아주 나쁜 장난을 치는 것 같은 날이었다.
아주 길고 길게 느껴졌던 그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