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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들판에 모여 앉아 서로를 불렀지

지워진 채 기억되는 어떤 시절

by 바란

돌이켜보면 내게 대학 생활이라는 건, 흔히 ‘청춘’으로 포장되는 어떤 낭만으로 가득했다기보다는 차라리 무색에 가까웠다.


나는 대학 4년 대부분을 학과 수업에만 몰두했다. 오로지 성적 장학금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다양한 활동으로 스펙을 쌓아야겠다는 의욕보다는 당장의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더 컸다.


그렇게 학과 수업에만 매진하면서도 정작 내가 속한 학과에는 별다른 애정이 없었다. 과 MT나 행사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졸업 전 필수라는 답사마저 가기 싫어 미루고 미루다 결국 4학년에야 다녀왔다. 과 선배나 동기들과의 친분은 당연히 없었다.


그럼에도 나의 대학생활이 완전히 아웃사이더로 남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대학 4년 내내 했던 동아리 활동 덕분이었다.


입학 전 새내기 새로 배움터에서 만난 과 선배의 권유로 면접을 본 게 시작이었다. 그 동아리는 정확히 말하면 동아리라기보다는 취업 및 진로 웹진을 발간하는 교내 기관이었다. 활동비로 장학금도 나온다는 말에 혹했고, 글쓰기를 좋아하던 나로서는 기자 활동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서를 냈지만, 선배들 앞에서 치러진 면접은 생각보다 경직된 분위기였다. 긴장한 탓에 내가 뭐라고 대답하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횡설수설했던 기억만 남아 있다. 그래서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합격이라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렇게 나는 그 동아리와 연을 맺게 되었다.


매주 기사를 쓰고, 각종 취업 행사를 취재하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그래도 내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공강 때마다 편집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데면데면했던 동아리부원들과도 조금씩 가까워졌다.


동기들과 더욱 친밀해진 계기는, 역시 술이었다. 스무 살, 막 성인이 되었다는 해방감에 고삐가 풀려 있던 시절이었다. 소주에 과자, 과일 통조림 같은 저렴한 안주를 놓고 오로지 ‘취하는 것’을 목표로 마시는 술자리가 날로 늘어갔다. 우리는 알딸딸해진 채 학교 잔디밭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땐 몰랐다. 십수 년이 지나도 이들과 계속 연결되어 있을 줄은.


한 학기를 마치고 나니 대부분의 선배들이 동아리를 떠났고, 나를 입부시킨 선배 한 명과 동기들만이 남아 새롭게 재정비를 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그렇게 1학년 여름방학의 대부분을 편집실에서 보내게 되었다. 홍보물을 만들고, 역할을 분배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맞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동아리의 주축이 되어갔다. 그 무렵부터 이미 동아리는 내 학교생활의 중심이었다. 학교 소속 기관이었기에 학생 자치만으로는 운영되기 어려웠고, 여러 애로사항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함께 고민하고 부딪치며 동아리를 일구어 나갔다.


3학년이 될 때까지도 나는 계속 거기에 있었다. 학기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가는 중에도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그러다 4학년을 앞두고 휴학을 하며 이젠 동아리와도 자연스럽게 이별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1년이 지나, 복학을 앞두자 어쩐지 막막해졌다. 공강 시간마다 습관처럼 머물렀던 편집실, 함께 점심을 먹던 동아리 사람들, 학과 사물함 없이도 편집실 사물함 덕분에 두 손 가볍게 다닐 수 있었던 나날들. 이 모든 것이 이제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낯설었다.


내가 고민하는 눈치를 보이자 나와 함께 활동했던 부원들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렇게 나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복학한 해의 상반기는 나름 즐거운 일도 있었지만, 마지막 학기의 활동은 후회만 남았다. 이미 정리가 끝났어야 할 시점에 미련을 품은 탓이었다. 떠날 때 떠났어야 한다는 뼈아픈 깨달음만을 안은 채, 나는 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이상하게도 그 동아리에 점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4년이나 활동했으면 애착이 남았을 법도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그때 만나던 남자친구 때문이었다.


당시 남자친구와 나의 갈등은 주로 동아리에서 비롯되었다. 4학년 1학기에 동아리에서 만난 남자친구는, 내가 졸업한 학교에서 여전히 동아리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지만, 내가 없는 동아리에서 그가 후배들과 웃으며 어울리는 것이 못마땅했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은 마음. 그건 결국 아무 잘못 없는 동아리를 향한 원망으로 번져갔다.


남자친구가 동아리에 집중하느라 나에게 소홀해진 것, 그래서 서운하고 외로운 감정이 든 것까지 모두 동아리 탓으로 돌렸다. 그렇게 한때 나의 학교생활 거의 전부를 차지했던 내 소중한 동아리는 질색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결국 그와 헤어지고, 아는 후배들도 모두 졸업하면서 나와 동아리의 연결도 지연스럽게 끊겼다. 몇 년 뒤, 낯선 이름의 후배에게 홈커밍데이를 한다는 연락이 왔다. 예전 같았으면 전 남자친구 때문에 무심히 넘겼겠지만, 동기들이 참석한다는 말에 이번이 마지막이다 싶은 마음으로 응했다. 다행히도 전 남자친구는 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그때 깨달았다. 이미 지나간 사람 때문에 더 오래된 사람들과의 연을 흘려보내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그 후 누군가의 결혼식이 두어 번 있었고, 우리는 그때마다 ‘같은 동아리 출신’이라는 명목으로 모였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식장에서 만난 후배가 우리가 속해 있던 동아리가 폐지되었다는 말을 전해왔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설픈 몇 마디를 나누고는 씁쓸한 뒷맛을 남긴 채 헤어졌다.


나의 대학 시절은 이미 십수 년 전이 되었고, 동아리 후배들과 지속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일들로 마지막에는 애증으로 가득했기에, 나조차도 그 동아리를 어떻게 추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막상 이제 그 동아리는 정말 우리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는 말을 들으니, 한때 나의 열정을 바쳤던 공간이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도려내졌다는 느낌에 허탈함을 지울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결국 실체가 없어질 것을 사랑하고 미워한 셈이다. 하지만 나는 그 동아리를 정말로 미워한 건 아니었다. 그저 내가 미처 다듬지 못한 뾰족한 감정들을 동아리라는 이름 위로 올려두었을 뿐이다.


오래된 선배들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던 동아리 이름의 유래를 떠올려본다. 여러 추측 중에서도, 나는 ‘野’라는 뜻을 담고 있었을 거란 말에 왠지 마음이 간다. 결국 내게 그 동아리는, 이름 그대로 대학생활 내내 나를 든든하게 떠받쳐주고 있던 너른 바닥이었을 거라고, 지금에 와서야 깨닫는다.


한편으로는 지긋지긋했지만, 그럼에도 소중했고, 그래서 떠났지만 돌아갔었고, 결국은 끝나버렸지만 누군가에겐 아직도 남아 있는 이름. 그건 나의 무색했던 청춘 속에 가장 또렷했던 한 조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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