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블로그 이웃에게
SNS라는 건 정말 묘하다. 직접 안부 한 마디 묻지 못하는 누군가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이, 이제는 너무도 쉬운 세상이 되었다.
‘좋아요’를 누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조용히 들어갔다가 조용히 나오는 일을 반복하며, 이제는 그저 ‘아는 사람’으로만 남은 이들의 흔적을 들여다볼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치곤 한다. 내가 이래도 될까.
그래도 ‘SNS 친구’로나마 남아 미약한 연결고리라도 있는 사이라면 그건 그나마 나은 정도다. 이제 카카오톡 프로필 하나로만 겨우 근황을 짐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과연 내가 자신의 프로필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그렇게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되었지만 차마 친구 목록에서 지울 수도 없던 이가 있었다.
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온 친구 계미(가명). 나는 계미와 매일 하굣길을 함께 한 적도, 점심을 같이 먹은 적도 없었다. 초등학교 때 딱 한 번 같은 반이 되었던 것 빼고는 별다른 접점 없이 데면데면하게 지내온 사이였다.
계미는 소설가가 꿈이라고 했다. 우리가 같은 반이 되었던 해, 담임선생님은 매일 일기를 쓰게 했고 잘 쓴 일기는 항상 낭독을 해주셨다. 나는 거의 매일 선생님의 목소리로 계미의 일기를 들으며, 독후감 대회나 글짓기 대회에서 여러 번 상을 받는 계미를 보며, 순간순간 어떤 부러움이나 질투를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계미를 경쟁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 계미를 굳이 이기지 않아도, 그 시절의 나는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찬란하다고 믿는 천진함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땐 그랬다.
시간이 흘러 계미와 나는 중학교 합창 동아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는 소프라노 파트, 계미는 알토 파트.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계미를 그저 초등학교 동창 정도로만 여겼다. 계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 우리의 관계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교정도 음악실도 아닌 온라인 공간에서였다.
그 시기 나는 네이버 블로그에 푹 빠져 있었다. 또래의 아이들이 싸이월드에 열중하며 짧은 글과 사진으로 일촌을 맺던 시절, 나는 더 긴 호흡의 글을 남길 수 있는 블로그라는 공간을 선택했다. 그때 내가 블로그에 썼던 글은 일기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감정을 쏟아내기만 한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런 날 것 같은 글들도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 어느덧 나라는 사람의 결을 이루어간 것 같다. 어느새부턴가 내 블로그에 찾아온 낯선 사람들이 공감의 댓글을 달아주었고 그중 몇몇과 ‘이웃’이 되어 소통하기 시작했다.
계미는 내 블로그 이웃 중 한 명이었다. 글쓰기를 좋아하던 계미가 블로그를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 계미에게 나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되었다. 그때의 현실에서 해소되지 못한 답답함을 블로그에 쓰는 글로 해소하고 있었으니까.
계미는 ‘이웃공개’로 걸어 잠근 내 블로그 글을 열람할 수 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계미는 나의 거의 모든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아주었다. 그렇게 계미는 나의 온갖 고민, 성적, 친구관계, 불시에 찾아오던 우울까지도 모두 아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은 기억이 안 나는 계미의 글 또한 그 시절 계미를 오롯이 담고 있었겠지. 우리가 서로의 글에 댓글을 다는 그 순간만큼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가득했을 거라고 믿고 싶다.
계미와 나는 각각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물리적 거리는 멀어졌지만, 굳이 약속을 잡고 만나지 않아도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지내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었으니까.
계미는 간호학과에 갈 거라고 했다. 글을 쓰겠다는 꿈은 이제 꿈으로만 남겨두겠다고. 장녀였던 계미는 나보다 퍽 어른스러웠고,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계미의 그런 면모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계미와 만나 이야기를 할 땐, 내가 계미에 비해 철없어 보일까 봐 내심 조심스러워지기도 했다.
나는 국어국문학과에, 계미는 간호과에 진학하고 몇 년이 지나 스물세 살이 되던 해. 더 이상 중고등학생 시절처럼 블로그에 열렬히 글을 쓰지도 않았고, 자연스레 서로의 소식을 접할 일도 뜸해지던 즈음이었다. 오랜만에 계미가 만남을 청하는 연락을 해왔다. 반가움에 약속장소로 향했고, 함께 밥을 먹으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식당을 나와 함께 걷다가, 계미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우리 교회에 아는 오빠한테 연락이 왔는데, 같이 보러 갈래?”
그 말에 왜 그렇게 거부감이 일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계미는 정말 아무 뜻 없이, 그저 별일 아닌 제안으로 내게 건넨 말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계미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치 내가 알고 있는 계미가 아닌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있는 것 같은 낯선 기분이 들었다.
계미는 어떠한 목적이 있어서 나를 불러낸 거였구나.
나는 결국 계미에게 그런 사람밖에 안 되었던 거였다는 생각에 배신감마저 일었다. 적당히 거절하는 말을 둘러대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계미와 헤어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몇 해 전, 그로부터 다시 많은 시간이 흘러 서른의 나이를 훌쩍 넘긴 어느 날이었다. 계미에게서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바란아 잘 지내? 나 결혼하게 됐어…
계미는 어떤 답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웬일인지 그때에도 나는 축하한다는 말조차 건넬 수 없었다. 그렇게 계미와 헤어진 이후, 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계미와의 마지막 만남은 내게 해소하지 못한 불편함으로 남아버렸다.
그렇게 ‘읽씹’을 하고 계미와 나의 관계를 아는 다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축의금 거두려고 나한테까지 연락한 거란 생각밖엔 안 들어.”
하지만 그보다 시간이 더 지난 지금에서야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어쩌면 계미에겐 내가 잊히지 않던, 그래서 다시 연을 이어가고 싶은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소통 방식은 비록 대부분 면대면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글’이라는 매개체로 서로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주고받으며 이루어졌다. 그것은 분명 계미와 나 우리 모두에게 흔치 않은 경험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소식도, 얼굴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 수십 명의 블로그 이웃들, 그중에서도 계미는 현실 세계에 맞닿아 있던 몇 안 되는 진짜 ‘서로 이웃’이었으니까.
그렇게 무시해버린 계미의 결혼 소식에도 나는 이상하리만치 계미의 번호를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계미의 결혼, 계미의 가족, 계미의 아이… 계미의 카톡 프로필 속에 켜켜이 쌓인 계미의 삶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마침내 인정하게 되었다. 계미와 나는 이제 정말로 서로 다른 방향의 평행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서야 비로소 삭제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이제 계미는 내가 정말 모르는 세상에서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을 것이다. 계미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것처럼.
이 글을 쓰며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계미의 블로그에 다시 들어가 보았다. 11년 전의 날짜가 찍힌 어느 글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방통대로 국문학과 과목을 두 개 신청했다. 내가 이렇게나마 국문학과 과목을 들을 수 있게 되다니 좋다. 나는 글 쓰는 간호사가 되고 싶다.
너는 글 쓰는 간호사가 되었을까.
나는 국어국문학과를 나왔어도 번듯한 작가가 되지 못했어.
그래도 언젠가 네가 쓴 글을 읽고 싶다는 생각은 그때도 지금도 변치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