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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예 Jan 15. 2024

선생님은 저보다 이게 더 중요해요?

고슴도치를 닮은 S 이야기

* 본 사례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실제사례에 기반하여 각색된 것임을 밝힙니다.


S는 3학년 여자아이였다. 어머니의 요청으로 학교상담실에서 처음 만나게 된 S는 작은 체구에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귀여운 얼굴과 다르게 뾰로통한 표정이 S의 기본 표정이었다. S는 학교에서 좋게 말하면 똑부러지고 나쁘게 말하면 되바라진 아이였다. 학교 선생님들께도 곧잘 대들고는 해서 미움을 사는 일이 많았고, 또래 친구 사이에서도 갈등이 잦아 친구관계도 위태로웠다. S는 내가 하는 말에도 날 선 반응을 보일 때가 많았다. 그래서 친밀감과 신뢰감을 쌓기 위해 시간을 들였던 아이이기도 했다. 


S는 2살 어린 남동생이 있는 누나였다. 어머니의 요청으로 상담을 시작했지만 어머니는 아이들과는 동거하지 않았고, 아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던 상태였다. 좋은 옷을 입고 다녔고, 겉보기에 부족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집안일을 해주시는 아주머니가 있을 정도였으니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가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곁에서 살뜰히 챙기는 보호자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어머니와는 연락이 잘 되는 편이었지만, 따로 살고 있어서 실시간으로 아이들을 관찰할 수 없으니 현재 모습에 대한 피드백을 주고받는데 한계가 있었다. 아버지는 아이들과 동거 중이었지만, 경제적인 돌봄 외에 다른 부분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있어서 연락조차도 쉽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S는 남동생을 구박하면서도 엄마처럼 잘 챙겼다. 구박하는 모습도 엄마가 자식에게 잔소리하는 모양새였다. 자연스럽게 동생에게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동생에게는 S가 어설프게나마 보호자의 역할을 했지만, S에게는 보호자 역할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는 떨어져 살고, 아버지는 바쁘고 무관심했다. 집안 살림을 도와주시는 분이 있었지만 아이들의 보호자 역할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잘 관리된 외형과 어울리지 않게 S의 눈빛에는 경계심과 치열함이 묻어있었다. 마치 정글에 혈혈단신으로 떨어져 어린 동생을 자신의 작은 몸 뒤에 겨우 숨기고, 혹시 어디선가 맹수의 공격이 있지 않을까 경계하며 전투태세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S가 나에게 마음의 문을 조금 열기 시작한 계기가 되는 날이 있었다. 그날은 S와 동물 피규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S는 자신을 고슴도치라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S에게 "S는 겉보기에 가시를 세우고 다른 사람들을 차갑게 대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걱정도 많고 겁도 많은 것 같아. 그래서 선생님도 너를 보고 고슴도치가 생각났어. 고슴도치도 속살은 말랑하잖아." S는 잠시 침묵하다가 "잘 아네요."라고 특유의 뾰로통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나는 그때 S의 마음이 아주 조금은 열렸다고 생각한다. 뚱한 말투였지만 그래도 내 말에 동의한다는 표현이었고, 그 이후로 S는 새로운 표정들을 보여주고는 했으니까 말이다. 


마음의 문이 조금 열렸을 뿐 S는 경계심이 많은 아이라 잠깐 방심하면 다시 경계모드에 들어가곤 했다. S는 만들기를 좋아해서 종종 만들기를 함께 하기도 했는데, 하루는 석고붕대를 가지고 손모양 틀을 만드는 시간을 가졌다. 석고붕대에 물을 묻혀서 자기 손에 붙이고 석고붕대가 굳으면 손을 살살 빼서 자기 손 모양의 틀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만들어진 손모양에 채색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며 이야기를 나눌 참이었다. 그런데 예상보다 S가 석고붕대를 붙이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상담시간이 다 끝나갈 때쯤 되어 겨우 석고틀에서 손을 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날따라 S는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면서 서둘러 정리를 하려고 했는데, 급한 마음에서였는지 석고틀에서 손을 세게 빼내려고 했다. 그 순간 S가 애써서 만든 석고틀이 갈라지려고 하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내가 S의 손을 잡고 살살 빼내는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순간 S는 아프다는 듯이 "아, 아!" 하더니 "선생님은 저보다 이게 더 중요해요?"라고 특유의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듯 잠시 벙쪘다가 부끄러운 기분에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정말 그랬다. 부끄럽지만 그 순간은 다른 것보다 '석고틀 저렇게 빼면 다 망가질 텐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오랜만에 생긴 친구와의 약속에 들뜬 아이의 급한 마음보다도 갈라지고 있는 석고틀이 눈에 더 들어왔던 것이 아니겠나. S를 보내고 한참을 생각했다. '으이구, S 말이 딱 맞다. 석고붕대 본뜨기 대회 나가려고 S랑 만들기를 한 게 아닌데, 석고틀 좀 갈라지면 어때서!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는...'

 


* S를 향한 나의 성찰


S와 고슴도치 이야기를 하던 날, S가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도록 다가간 것은 나였지만 마음의 문을 열기로 결정한 것은 S였다.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용기를 낸 것은 온전히 S의 몫이었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겪는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도록 돕는 존재일 뿐, 진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내담자의 힘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내담자가 어린아이일지라도 말이다. 


석고붕대를 가지고 만들기를 했던 날, S의 한 마디가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아있다. 나를 크게 가르치는 한 마디였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한다. 본질적인 것을 잊고 눈앞에 보이는 목표만을 해치우려고 했던 그 순간의 내 모습을 반성한다. S의 말대로 석고틀을 온전하게 만드는 일이 뭐가 그렇게 중요했을까. S와 마음이 만나는 시간을 보내고, 그 안에서 S가 편안함을 느끼고 하고 싶은 말들을 하고, 나는 그 말을 듣고 S를 이해하는 그런 시간들이 중요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이제 겨우 마음의 문을 열고 있는 S를 앞에 두고 오만하게도 본질은 뒤로 한 채 눈앞에 보이는 석고틀에 열중했던 그 순간의 내 모습은 앞으로 두고두고 펼쳐 볼 오답노트의 한 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사진: UnsplashLiudmyla Denysi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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