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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예 Feb 26. 2024

텅 빈 느낌만 들어요

E의 텅 빈 마음이 조금씩 채워지는 날이 머지않았기를 바라며

* 본 사례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실제사례에 기반하여 각색된 것임을 밝힙니다.


초등학교에 있으면서도 종종 우울한 아이들을 만날 때가 있다. 일시적인 우울감의 수준을 넘어서서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어야 할 정도의 우울증을 가진 아이들이다. 고학년 학생 중에서나 한두 명 있겠거니 하는 예상을 할 수도 있지만, 저학년 아이들 중에도 그런 아이들이 있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오래되어봤자 10여 년쯤 된 어린아이들의 우울을 보고 있자면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어진다.


나는 우울증을 앓아본 적이 없다. 책과 강의로 배웠을 뿐이다. 비로소 학교에 와서 처음 우울한 아이들을 만난 것이다. 우울증이라는 단어는 익숙했지만, 우울증의 실체는 낯설었다. 알고 있지만, 아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이들의 우울을 처음 마주했을 때, 한 번씩 우울을 호소하는 아이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순간도 있었다. '정말 침대에서 일어날 힘도 없다고? 단순히 학교 가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부끄럽고 죄책감이 들기도 하는 고백이지만 그런 순간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누구보다 무기력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우울을 앓고 있는 본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평범하게 일어나 세수하고, 가방을 챙기고, 친구들과 웃고 떠들고, 공부를 하고, 가족들과 식사를 하는 아주 일상적인 일들을 다른 누구보다 그 아이들은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마음 안에 커다란 '블랙독'과 함께 하고 있는 아이들은 그 무게에 짓눌려 무언가 해낼 에너지를 잃어버리고 만다. 그러면서 스스로에 대해 무능감을 느끼며, 자기 스스로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고 고백하는 아이들도 있다.


* 나의 성찰

책과 강의로 아는 지식이 곧 내담자를 설명하는 것은 아님을, 책과 강의보다 더 자신의 증상을 잘 느끼고, 알고 있는 사람은 내 앞에 앉아 있는 내담자라는 사실을 명심할 것.



E는 5학년이 다 끝나가던 겨울이 되어 상담실에 찾아왔다. 마른 체형,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담겨있지 않았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E의 첫인상이다. E는 처음 상담실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긴장도가 매우 높았고, 활기참과는 정반대에 서있는 아이 같았다. 늘 초조해 보였고,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는 날도 많았다. 자기를 조금씩 표현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텅 빈 느낌"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친구와의 시간을 그리워하고, 친구를 좋아했지만 자신의 우울로 인해 관계가 멀어질 것이 두려워 방어막을 높게 치던 아이였다.


졸업하는 그날까지 우울증으로 버거워하던 E였지만,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상담실에서 E가 조금씩 변화했음은 분명하다.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기 시작했고,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조금씩 마주했고, 한 번씩 새로운 친구와의 에피소드를 풀어놓는 날도 있었다. 양육자의 협조가 조금만 더 빨리 이루어졌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지속적인 약물치료와 심리상담이 이어진다면 속도가 느릴지라도 분명 좋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E는 자신의 우울에 대해 이미 마주했고, 누구보다 나아지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아이였으니까 말이다.     


K는 이제 막 1학년이 된 아이였다. K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말하기를 "내가 커서 누군가를 죽일지도 몰라요. 나는 살인자가 될지도 몰라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는 나도 놀랐지만, 아이를 몇 차례 더 만나면서 그 표현이 곧 자신에 대한 혐오감정을 드러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평탄치 않은 가정환경과 양육자의 우울이 아이에게도 영향을 미친 사례였다.


K와는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만났는데, 다행히 K는 종결이 다가왔을 때쯤 "제가 여기 상담실에 처음 왜 왔었는지 기억도 안 나요."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 K는 양육자의 우울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부모상담을 하면서 양육자의 우울증을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러 번 양육자를 설득했었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양육자의 우울이 개선되면서 아이의 우울이 개선되는 속도에도 탄력이 붙었던 기억이 난다.   


우울증을 앓는 아이들을 몇 차례 관찰하다 보니 이런 의문이 생긴다. '우울증을 단순히 마음의 감기쯤으로 표현해도 되는 것일까? 그런 비유는 우울증을 너무 가볍게 묘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우울은 일상을 잠식한다. 학교에 가지도, 친구들을 만나지도 못하게 하고, 심지어는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을 먹는 아주 최소한의 일상까지도 어렵게 만든다. 그러면서 끝끝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든다.


감기는 병원에 가도 일주일, 안 가도 일주일이라고 하지만, 내가 관찰한 우울은 내버려 둔다고 나아지지 않았다. 굳이 우울증을 감기로 표현해야 한다면 정말 지독한 감기, 내버려 두면 여러 합병증까지 가져올 수 있는 그런 지독한 감기라고 하겠다. 우울에는 분명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했다. 물론 우울의 크기나 아이의 특성에 따라서 개입의 방법은 달라질 수 있지만, 운동이나 글쓰기, 심리상담, 약물치료 등 우울의 크기를 줄이고, 에너지를 높일 수 있는 일들을 일단 찾아서 해나가는 것은 중요하다. 그럼에도 개입 직후 곧바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닐뿐더러,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때 낙담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그 과정을 함께 해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E와 K에게 내가 그런 사람이었기를 바란다.


사진: UnsplashJonathan Cosens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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