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집에서 까투리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아이는 그날의 즐거움을 잊지 못한 듯 종종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우리는 칭찬 스티커를 모으면 까투리를 사주기로 약속했다.
비록 엄청 열정적이진 않았지만, 말을 잘 듣고 한 장씩 쌓여가는 스티커에 만족해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스티커가 거의 다 모였을 때, 아이는 마침내 까투리를 사러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아내는 최저가를 찾느라 애썼고, 마침 근처 마트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와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했을 때는 상품이 매진되어 결국 사지 못했다. 아내는 너무 미안해하며 아이에게 말했다.
“어떡하지 까투리가 없데 우리 딸 너무 슬프겠다. 엄마가 인터넷으로 빨리 사줄게”
“웅 그래도 좋아”
“좋아? 까투리 없는데 안슬퍼?”
“웅 좋아”
“왜 좋아? 까투리가 없자나”
“……그냥 좋으니까 좋은데?”
아이에게는 까투리보다 엄마와 함께 마트에 온 그 시간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우리의 기준으로는 장난감이 없으면 슬퍼하는 게 당연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이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뿐이었다. 그 단순한 진리에 어른인 우리는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아이가 슬퍼할 거라고 미리 단정 짓고, 그에 맞춰 행동할 것이라 생각한 건 아닐까 되돌아보게 된다. 정작 아이는 자신의 현재에 솔직했고, 그저 좋은 시간이었기에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순간에 휘둘리지 않고 현재에 충실했던 아이의 모습은, 어른이 되면서 점차 잃어버린 소중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아이가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는 모습을 보며, 우리도 현재에 더 충실해보자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