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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May 17. 2020

졸라맨을 그린 나에게 박수를

완벽한 그림에 대한 기대를 버리기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회의 시간 끄적거리는 건 쉬워도 막상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론 나란 인간은 반드시 ‘목적’이란 게 있어야, 그러니까 돈을 줘야 그리고, 승진을 해야 그리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점점 그림 그리기가 부담스러워진다.   

   

왜 낙서하긴 쉬워도 퇴근 후 이젤 앞에 앉아 그리긴 쉽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면 내 안에 ‘완벽 증후군’이 잠자고 있는 모양이다. 뭐라도 그럴싸한 작품 하나를 그려야 한다는 중압감, 잘 그리고 싶은 욕심이 사무칠 때면 정작 그림을 그리는 시간보다 뜸 들이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 좋게 말하면 나름 진지한 자세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생각만 하다 시간을 보내는 꼴이다. 애착이 있는 무언가에 마음을 쏟을 때면 유난히 ‘완벽함’에 대한 기대가 크다. 어쩌면 한동안 그림을 떠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완벽함에 대한 기대’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침 옛날에 같이 그림을 배웠던 사람들끼리 소모임이 열린다는 소리를 들었다. 소모임은 ‘매일 30일 동안 30점의 드로잉을 그려보기’라는 프로젝트이다. 지금 하고 있는 것도 벅찬데 무슨 소모임씩이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림 그리는 사람들의 온기, 생각들이 궁금하기도 하고 나의 부담을 좀 내려놓고 싶었다.      


30일 프로젝트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프로젝트였다. 하루 한 장 그리는 건 쉬워도 30일 그리긴 쉽지 않았다. 매일의 마감, 매일의 완성이 눈 앞에 있다 보니 완벽함에 대한 미련을 과감하게 버리게 되었다. 아니 버릴 수밖에 없었다. 완벽함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고 다짐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 완벽함에 대한 갈구는 숨을 쉬고 있었다. 예를 들어 형태가 안 맞을 때면 나도 모르게 지우개를 들고 벅벅 선을 지우게 되었다. 자기 검열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마감 시간이 다가오면 자기 검열을 하고 싶어도 타인과의 약속 때문에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매일 완벽한 작품을 제출할 수 있을까? 그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완벽함을 버리는 게 오히려 나 자신에 대한 아쉬움을 낳기도 하고 적나라한 내 실력에 좌절을 느끼기도 했지만 대신 좋은 점도 있었다. 완벽함을 버리니 어찌 되었든 양은 늘어난 것이다. 걸작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수많은 그림 중에 씨앗이 될만한 그림도 숨어 있었다. 밀도가 부족한 그림은 나중에 보완을 한다고 생각하고 일단 양에 집중하며 매일 30일 프로젝트를 진행하니 어느새 내 스케치북은 몇 권 쌓이게 되었다. 한 번도 스케치북을 끝까지 써본 기억이 없었는데 양에 집중하는 프로젝트를 해보니 어느새 나도 스케치북 2권 정도를 끝장까지 그리게 되었다. 또 다른 뿌듯함이 느껴졌다.      


완벽함에 대한 미련을 버리니 좋은 점은 양이 비약적으로 늘었다는 점 외에 여러 가지가 있었다. 매일 조금씩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림을 아무리 그리기 싫어도 스마일 하나 정도는 그릴 수 있었다. 물론 스마일만 그리긴 아쉬워 더 그리게 되지만 이렇게 동그라미 몇 개를 조금씩 그려 나가니까 그래도 매일 뭐라도 그리는 시간이 생길 수 있었다. 완벽함을 버리니 시작하는 힘이 생길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이 글도, 모든 시작도 그렇게 작은 용기를 내서 시작하는 게 아닐까 싶다. 완벽한 모나리자를 그리는 대신 졸라맨이라도 매일 그리자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그리다 보니 매일 선을 그리고 면을 만들고 도형이, 형태가 잡히기 시작하였다.     

 

물론 매일 이렇게 조금씩 그렸다면 좋겠지만 때론 파김치같이 피곤할 땐 졸라맨조차 그리기 버거울 때가 있다. 그럴 땐 그냥 직선만 그렸던 적도 있다. 선 몇 개로 축 늘어진 내 모습을 그릴 때도 있었는데 축 늘어진 모습이 재밌어 그 자체로 기분이 좋아졌던 기억도 난다.      


완벽함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꿈틀대긴 하지만 잠시 나를 받아들이는 시간 역시 필요하다. 나에게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시간이야말로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 아닐까. 너무 오랫동안 ‘잘하고, 완벽하고’의 기준에 맞춰 살아 나도 모르게 자꾸 그 기준에 맞춰가려고 할 때가 많다. 이젠 반대로 그 기준에서 잠시 벗어나 나만의 호흡으로 나를 허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야 내 목소리를 내가 들을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이 생길 테니까. 오늘도 완벽함에 대한 기준을 잠시 내려놓고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 그림 그리기를 뚜벅뚜벅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 완벽하지 않아도 돼. 잘하지 않아도 돼. 그저 내가 좋아하는 시간을 허용하고, 만끽하면 그것으로 충분해.라는 말을 내게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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