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오면 우리는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가, 하고. 그 사랑이 꼭 연인 간 애정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가족에게 충실한지,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마찬가지로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로맨스와 함께 가족 영화가 쏟아지고 자선행사도 줄을 잇는다. 왠지 12월에는 모두가 로맨티스트가 되고 세상이 조금이나마 더 선량해진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아무래도 추위에 몸을 떨게 되는 겨울은 온기에 대한 그리움을 계기로 자신이나 타인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하는 시기인 듯하다. 부족함을 느끼지 못할 때에는 남의 아픔과 쓸쓸함을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렵다.
소설이든 영화든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은 결국 사랑이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설정과 묘사가 다를 뿐 사랑의 정의나 당위에는 어떤 공감대가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랑 이야기가 결핍에서 시작한다. 세상에 결핍이 없다면 사랑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결핍이 클 때 사랑의 울림도 크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The Shape of Water)>(2018)는 다양한 배경으로 소외된 이들과 기원을 알 수 없는 괴생명체를 등장시켜 사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목소리를 잃은 공주
물로 가득 찬 거실에서 수면안대를 쓰고 잠든 채 떠 있는 엘라이자.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스틸컷
영화는 한 남자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누군가의 집은 해저에 가라앉은 배의 선실처럼 물로 가득 차 있다. 탁자와 의자, 소파, 스탠드 조명, 탁상시계 따위가 무중력 상태인 것처럼 떠 있고 수면안대를 쓴 여자가 수중에 잠들어 있다. 남자는 주인공에 대해 ‘목소리를 잃은 공주’라며 앞으로의 이야기가 “사랑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라고 귀띔한다.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목소리를 잃은 공주’는 인어공주다. 그는 사랑을 위해 마녀에게 목소리를 내주고 다리를 얻어 육지로 나왔다. 그러나 엘라이자(샐리 호킨스)가 알람 소리에 깨어난 현실에는 동화적인 데가 없다. 소파에서 잠을 자는 엘라이자의 좁고 침침한 집은 소방차 사이렌 소리와 아래층 영화관 음향으로 시끌벅적하다. 이곳은 1962년 미국 항구도시 볼티모어다.
엘라이자는 아기 때 강에서 발견돼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는 언어장애인이다. 청력에는 이상이 없어 귀로 듣고 손으로 말한다. 엘라이자가 매일 같은 시간 잠자리에서 일어나 출근길을 나서기까지 정해진 일과처럼 되풀이하는 일들은 무미건조한 삶을 암시한다. 낡은 욕조에 물을 받고 달걀을 삶는 동안 물속에 몸을 담근다. 달력에서 어제 날짜를 뜯어내고 구두를 닦는다. 샌드위치를 만들어 집을 나선다. 한밤의 출근. 딱히 딴짓을 하는 게 아닌데도 엘라이자는 늘 지각을 간신히 면할 정도로 도착한다. 개인을 규율하는 시간은 호의적이지 않다는 듯이. 세상이 미국과 소련 간 우주경쟁이나 핵 대결로 떠들썩한 시기에 엘라이자는 항공우주연구센터라는 정부 연구소의 1급 기밀구역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이 설정은 개인의 삶이 한 시대의 거대 사건과 얼마나 가깝고도 먼지를 함축한다.
왼쪽부터 엘라이자의 회사 동료 젤다, 이웃 화가 자일스, 정부 연구소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 괴생명체 연구책임자 호프스테틀러.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스틸컷
엘라이자를 둘러싼 환경은 푸른빛이 도는 녹색으로 가득하다. 영화에서 녹색은 미래를 바라보는 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색으로 설명되지만 이 색이 지배하는 인물들의 삶은 외롭고 생기가 없다. 등장인물들은 제각각 소외된 사람이다. 엘라이자는 고아이면서 장애인 여성이고, 회사에서 유일한 말동무인 동료 젤다(옥타비아 스펜서)는 흑인 여성이다. 젤다는 결혼했지만 자녀가 없고 남편은 말이 없다. 엘라이자의 독신 이웃 자일스(리차드 젠킨스)는 사진에 밀려난 퇴물 광고포스터 화가다. 노인임을 한탄하며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고 싶어 하는 그는 또한 동성애자다. 고독은 사회적으로 주류냐 비주류냐를 가리지 않는다.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는 단란한 가족과 따뜻한 집이 있지만 위안을 얻지 못하고, 스파이인 연구책임자 호프스테틀러(마이클 스털버그)는 정체를 숨긴 채 살고 있다.
무언(無言)의 사랑
청소 중인 비밀 연구실 안에서 유리관에 갇힌 괴생명체와 교감하는 엘라이자.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스틸컷
엘라이자는 비밀 연구실로 옮겨져 온 괴생명체를 보게 되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는다. 몸이 미끈거리는 점액과 비늘로 덮인 괴생명체는 사람처럼 눈·코·입과 팔다리가 있다. 물속에서 사는 이 생명체는 굳이 말하자면 인어일 테지만 우리가 상상해온 인어의 모습과는 다르다. 괴생명체는 양서류처럼 물과 육지에서 모두 호흡할 수 있는데 지속적인 생존은 물에서만 가능하다. 미국 정부는 이런 생명체를 소련과의 우주경쟁을 위한 연구 대상으로 잡아왔다. 괴생명체는 연구실에 갇혀 고문당한다. 그를 잡아온 장본인이면서 임시로 부임한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는 연구와 상관없이 그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며 괴롭힌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괴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괴물에 가까운 건 모습이 기괴한 쪽보다 그 남다름을 견디지 못하고 파괴하려는 쪽일 것이다.
입단속을 위해 엘라이자와 젤다를 부른 스트릭랜드는 괴생명체가 인간처럼 생겼다고 동정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성경대로라면)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는데 저 생명체가 신의 모습은 아니지 않느냐는 논리다. 그러면서 신은 자신(백인 남성)의 모습에 더 가까울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젤다(흑인 여성)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할 때 인간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이 얼마나 주관적이며 폭력적인지 생각하게 된다. 유색인종과 여성이 오랫동안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리지 못한 것도 그런 기준 때문이었다. 그래서 괴생명체는 장애인, 흑인, 여성, 노인, 동성애자 같은 차별적 배경들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영화는 우리가 그렇게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혐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과장된 거울’인 셈이다.
밖으로 나온 괴생명체를 올라다보는 엘라이자.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스틸컷
엘라이자는 괴생명체와 사랑에 빠진다. 엘라이자의 언어장애는 사람의 말을 하지 못하는 괴생명체와의 관계에서 장애가 되지 않는다. 사랑은 말보다는 마음을 나눔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며 마음은 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나눌 수 있는 것임을 엘라이자와 괴생명체는 보여준다. 이들의 관계는 언어를 통해 서로를 살피며 깊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저편에서 번지르르한 말을 서슴없이 선사하는 사람들을 통해 언어의 기만성을 확인하게 된다. 자동차 판매원은 알지도 못하는 스트릭랜드의 사회적 지위를 한껏 치켜세우며 비싼 자동차를 사도록 부추기고, 자일스가 호감을 가진 파이 가게 바텐더는 늘 멋진 웃음을 머금고 “다음에 또 오세요”라고 인사한다. 자일스는 그 말이 진심일까 생각하며 설레어한다. 하지만 바텐더는 흑인 고객을 가게에서 쫓아내면서도 “또 오세요”라고 말한다.
‘사랑’이라는 신
이웃 화가 자일스(오른쪽)의 화실에서 그와 수화로 대화하는 엘라이자.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스틸컷
괴생명체의 탈출을 계획하는 엘라이자는 “그는 혼자”라며 자일스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거부당한다. “우리도 다 혼자인데 그가 혼자인 게 어쨌다는 거냐”는 자일스의 말은 누군가의 고독과 고통에 무뎌진 채 살아가는 우리의 자기 방어적 독백이기도 하다. 괴생명체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괴물’이라는 자일스에게 엘라이자는 반문한다. “나는 뭐죠? 나도 그 사람처럼 입을 움직여요. 나도 그 사람처럼 소리를 못 내요. 그럼 나도 괴물이에요?” 우린 아무것도 아닌데 뭘 어떻게 하겠느냐며 다시 한 번 괴생명체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일스에게 엘라이자는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면 우리도 인간이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영화는 본질적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엘라이자와 괴생명체는 서로를 불완전하거나 괴상한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행복해한다. 괴생명체는 자일스의 고양이를 잡아먹고 자일스도 다치게 하지만 자일스는 야생생물이니 어쩔 수 없는 거라며 탓하지 않는다. 사랑받는 것과 인정받는 것은 다르다. 스트릭랜드는 사랑받지 못한 채 인정받으려고만 애쓰는 인물이다. 상류층 대부분이 탄다는 말에 비싼 자동차를 사고, 어서 임무를 완수해 대도시로 가고 싶어 한다. 언제나 윗선의 기대에 부응하다 단 한 번의 임무 차질로 몰락 위기에 처한 그는 얼마나 자신을 증명해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냐고 상관에게 묻는데, 실패는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물속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엘라이자와 괴생명체.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스틸컷
영화 끝에 가서 다시 생각하는 되는 ‘물’의 의미는 사랑하는 ‘당신(의 존재)’이다. 사랑은 그 대상을 통해 가능해진다. 그 사랑은 물처럼 정해진 형태가 없다. 어떤 모습으로든 가능하면서 무엇이든 수용 가능하다. 우리를 둘러싼 우주와 같은 환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자신이 된다. 그렇게 초월적이고 창조적이라면 사랑은 ‘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악당 스트릭랜드의 마지막 절규가 유독 의미심장하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