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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상출구 Oct 23. 2022

설명 없는 삶을 어찌하리오

<하늘 높이> 올라가면 답이 보일까

한때 대통령이 읽었다는 <명견만리>라는 책을 나는 읽지 않았고 일부러 찾아 읽게 될 것 같지도 않다. 그 책의 ‘원전’인 방송 강연도 마찬가지로. 지식이나 통찰(이라고 요란한 주장)의 집약, 전달을 기획 의도로 하는 책과 방송엔 좀처럼 흥미가 붙지 않는다. 그 각광의 계기가 유력 정치인이나 유명인의 독서 목록에 들었기 때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좋은 책이라면 누가 읽었다고 벼락 스타가 될 게 아니라 애당초 그 좋은 내용 때문에 일반 독자의 입에 오르내리며 진가를 증명해야 한다. 뭐 이런 나름의 기준이 있지만 어찌 보면 취향 문제이니 너무 개의치 마시길. 어쨌거나 책은 읽을수록 대체로 남는 양식이니까.


명견만리. 1만 리(3927㎞)를 훤히 내다본다니 허세스럽기는 해도 다양한 지식과 논의를 아우르는 강연이나 책의 제목으로 쓰임 직하다. 다수 구성원을 책임져야 하는 정치·외교·안보·경제·의료·안전 같은 영역에서는 만리 앞을 보려는 노력과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사태는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으로 보자면 ‘명견만리’는 아득한 말이다. 한 치 앞도 못 보는 게 인생 아닌가. 나 역시 만리를 훤히 보는 일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래서 아예 반대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만리를 내다보려 애쓰며 보이지도 설명되지도 않는 것들을 두려워하기보다 한 치 앞도 모르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삶은 어떤가 하는 이야기.


삶이라는 미스터리

 

나는 페루 출신 감독 클로디아 로사의 <하늘 높이(ALOFT)>(2014)를 수수께끼로 둘러싸인 고립무원의 삶과, 그런 삶의 (체념적 수용이 아니라) 의지적 수용에 관한 이야기로 읽었다. 이 영화는 2014년 10월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됐지만 내가 아는 한 국내 상영관에서 정식 개봉한 적은 없으니 본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반전이 묘미인 영화는 아니고 여기서 세세한 내용을 늘어놓진 않겠지만 일부나마 스포일러라 할 수 있으니 참고하세요).


어릴 적 떠난 어머니를 찾아 나선 아이반, 그가 찾는 나나, 나나를 취재 중인 자니아(왼쪽부터). 영화 <하늘 높이> 스틸컷

혼자 어린 두 아들을 키우는 나나라는 여자(제니퍼 코넬리)가 있다. 둘째 아들은 악성 종양에 걸렸다. 의사들마저 수술을 거부하는 이 아이를 살리기 위해 나나는 예술과 자연을 이용해 불치병을 고친다는 건축가를 찾아가는데, 거기서 아들은 고치지 못한 채 자신도 모르는 치유 능력이 건축가 눈에 띄게 된다. 건축가의 설득에 반신반의하던 나나는 아픈 아들이 사고로 죽자 남은 가족을 떠나 치유 활동에 전념한다. 그런 어머니를 원망하며 성인이 된 큰아들 아이반(킬리언 머피)은 나나의 활동을 취재 중인 기자 자니아(멜라니 로랑)를 따라나선다.


이 영화는 전체적인 서사(큰 그림)를 가린 채 그 가림막에 띄엄띄엄 작은 구멍을 뚫듯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단서로서의 정황을 조금씩 노출하며 전개된다. 시원하게 설명하는 법은 없다. 좁은 화각과 클로즈업, 포커스 아웃 같은 방식으로 특정 인물, 특정 상황만 부각하고 나머지는 은폐한다. 최소한의 설명, 제한적 시야 탓에 관객은 자꾸만 무슨 일인지, 왜인지 질문하고 상상하게 된다. 영화는 그 의문의 아주 일부에만 가끔씩 선문답 같은 설명을 내놓을 뿐이다. 이런 화법 때문에 관객은 몰입하면서도 갑갑하고, 갑갑해하면서 몰입하는데, 그 몰입과 갑갑함이 인생이라는 미스터리에 대해 감독이 말하려는 바가 아니었을까.


삶이라는 아이러니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자기 문제(아들의 병)를 해결할 길을 찾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이 남의 문제(다른 사람의 병)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고, 자기 문제는 영영 해결하지 못한 채 평생 남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 그런 삶을 살기 위해 가족(남은 한 명의 아들)을 버린다는 이야기. 나나도 그 자가당착적인 자신의 삶을 명쾌하게 해명하지 못한다. 그런 어머니에게 성인이 돼 찾아온 아들은 “어떻게 한 사람의 어머니가 자신도 설명하지 못하는 걸 위해 아들을 버릴 수 있느냐”고 따지지만 나나는 답하지 않는다. 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도 여전히 답을 모르거나, 자신의 대답에 아들이 동의할 수 없었을 테니. 그중 어느 쪽인지 영화는 역시나 설명도 암시도 하지 않는다.


나나(오른쪽)가 자신을 찾아온 아들 아이반의 머리를 감싸안는 모습. 영화 <하늘 높이> 스틸컷

이해할 수 없는 문제, 어쩔 수 없는 선택, 그것들의 연속. 그게 인생이라는 생각이 저 영화의 바닥을 떠받치고 있다. 우리가 자신에게 닥쳐온 상황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모두 거부할 수도 없다. 거기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 자신의 선택을 타인에게 모두 명쾌하게 설명할 수도 없다. 실은 자신도 그 선택을 납득하기는커녕 스스로에게조차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설득도 주장도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사건들을 조각조각 보여주기만 한다.


선택을 강요하면서도 설득도 설명도 하지 않는, 삶이라는 숙명은 지독하고 잔인한 구석이 있다. 아들이 낫게 도와달라며 재차 찾아갔던 나나에게 건축가는 냉담하게 말한다. “고통을 피할 수는 없어요. 그걸 거부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고서 하는 말이 치유 능력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을 낫게 하는 일에 동참하라는 얘기다. 여기서 내 자식이 죽어 가는데 저기 가서 다른 사람을 살리라니. 나더러는 고통을 받아들이라면서 타인의 고통은 덜어주라니. 나나는 “도와줄 수 있어요, 없어요?”라며 명쾌한 답을 요구하지만 건축가는 “사람들은 받기를 원하죠. 주는 건 다른 겁니다. 힘든 길이죠. 그게 당신의 길이에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설명인가, 설득인가, 주장인가. 이해할 수 없는 우리에게는 그냥 아이러니다.     


그런 게 사는 것 아닌가

 

아픈 아들이 아직 살아 있을 때 나나는 건축가에게 절망적으로 물었다. “내 아이는 많이 살지도 못했어요. 왜 태어났죠? 죽기 위해서?” 건축가의 입에서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나나가 나중에 스스로 내놓는 어떤 답은 “그래도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는 달관이다. 저 달관은 포기가 아닌 체념욕심이 아닌 의지 사이 어딘가에 단단히 서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삶, 그럼에도 가족에게 제대로 된 동의나 양해를 구하지 않은 어머니의 삶에 분노를 퍼붓는 아들에게 나나는 회한도 슬픔의 기색도 없이 말한다. “그런 게 사는 것 아닌가”라고.


영화 <하늘 높이> 이미지 컷

삶이 다 무너졌을 때에도 허물어진 조각들을 다시 주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그러니까 ‘그래도 살아가는 것’이 삶이다. 나나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삶에 들이닥치는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는 없다. 완벽한 통제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현실적인 삶의 자세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걷기를 시작하는 의연함이 아닐까. ‘명견만리’보다는 그게 우리 삶에 더 가까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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