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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상출구 Oct 23. 2022

사람다워질 기회

누군가의 <내일을 위한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내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남의 무언가를 희생시켜야 하는, 그런 고약한 선택의 문제를 우리는 의외로 자주 맞닥뜨린다. 그럴 땐 대체로 어떤 사정들을 앞세우며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게 되고 ‘어쩔 수 없는 일’ ‘나로선 당연한 일’ ‘당신이 나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일’이라는 말로 자기 방어에 나선다. 내가 얻는 것보다 남이 잃게 되는 것이 클 때에도 좀처럼 그 선택을 포기하지 못한다. 미안해하면서도, 안타까워하면서도. 심지어 그래서 스스로를 혐오하면서도. 우리가 이런 윤리적 모순을 꾸역꾸역 감수하는 것을 보면 인간만큼 슬픈 동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양심과 욕심의 사이에서 마음은 양심에 이끌리는데 손은 욕심을 따라가는 것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굳이 해설하려 드는 것부터가 우리의 모순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일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더 슬퍼질 수밖에 없다.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Deux jours, une nuit)>(2014)은 우리가 강요된 선택의 문제 앞에서 겪는 윤리적 딜레마를 다양한 군상의 모습으로 촘촘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라는 실직 위기의 여성을 중심으로 흘러가는데, 눈여겨볼 대목은 그의 직장동료들이 ‘산드라의 복직이냐, 나의 보너스냐’라는 양자택일의 문제 앞에서 보이는 여러 태도에 있다. 산드라의 입장에 선다면 아마도 누구나 그의 희생(실직)을 전제로 보너스를 선택한 동료들을 비난하겠지만 아무래도 우리는 산드라보다는 동료들의 입장에 서야 한다. ‘내가 저들 중 어떤 사람에 가까운가’ 생각하면서 이를 다시 제삼자의 시각으로 판정할 때 영화는 단순한 감상의 대상을 넘어 우리를 돌아보는 거울이 될 수 있다. 모든 영화의 감상법이 이럴 필요는 없겠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볼 만한 영화다.


널 버린 게 아니라 보너스를 택했을 뿐

전화통화를 하는 산드라(오른쪽)와 지켜보는 남편.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스틸컷

프랑스어 원제가 ‘1박 2일(Deux jours, une nuit)인 이 영화는 남편과 함께 두 아이를 키우는 산드라가 자신의 해고 결정을 뒤집기 위해 노력하는 이틀간의 이야기다. 병가를 냈다가 복직을 앞둔 산드라는 회사가 경영난을 들어 진행한 투표의 결과로 실직에 직면한다. 사장은 산드라의 동료인 직원 16명에게 산드라를 복직시킬지, 보너스를 받을지 결정하도록 하는데 절망스러울 정도의 압도적 다수가 보너스를 선택한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산드라는 절친한 동료의 도움으로 사장으로부터 재투표 허락을 받아낸 뒤 나머지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설득에 나선다. 토요일 낮부터 재투표가 예정된 월요일 아침까지. 산드라에게는 실직 위기를 벗어날 기회가, 동료들에게는 선택을 재고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동료와 보너스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하는 문제. 제삼자의 눈으로는 무엇이 더 옳은지 분명해 보이지만 각자의 사정이 개입하면 그 옳은 것에 손을 뻗기 쉽지 않다. 산드라를 실직시키고 단 한 번 받게 되는 보너스는 정규직 기준으로 1000유로, 약 140만 원이다. 한 사람의 안정적 수입원을 잃게 만들 만큼 큰돈이라고 할 수 없지만 저임금 근로자인 동료들(일부는 회사 몰래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은 첫 투표에서 대부분 이 돈을 선택했다. 그들 중에는 산드라와 친하게 지낸 사람도 있고, 산드라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도 있다. 이들은 자신을 찾아온 산드라에게 저마다의 이유를 내세우며 보너스가 절실하다고 말한다. 아내의 실직, 자녀 학비, 집세, 남자친구와의 새 출발, 마당 공사, 가장이라는 본분 등.


직장동료를 찾아가 자신이 일자리를 잃지 않게 도와달라고 설득하는 산드라.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스틸컷

동료들은 하나같이 “보너스를 선택했다”고 말할 뿐 “너(산드라)를 버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내가 다시 일할 수 있게 투표해줄 수 있느냐”는 산드라에게 한 동료는 “널 반대한 게 아니라 보너스를 택한 것뿐”이라며 양자택일을 하도록 한 사장에게 책임을 돌린다. 또 다른 동료는 산드라가 지지 의사를 묻자 “그럼 보너스를 놓치잖아”라고 말하고는 이 상황은 역시 자신이 선택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그저 부당하게 주어진 상황에서 필요한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너스와 직장동료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과 ‘동료를 해고시키는 대가임을 알면서 보너스를 선택하는 것’ 중에서 어느 한쪽이 더 나쁘고, 덜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투표라는 의사결정 방식이 민주적 절차라는 명분으로 이렇게 책임을 분산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영화는 꼬집는다.


내겐 재앙이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되길


산드라의 힘겨운 설득 작업은 동료들의 양심에 기대를 걸고 시작한 일이다. 남편 마누(파브리지오 롱기온)는 절망한 채로 포기하려는 아내 산드라에게 직장동료들을 설득해보자며 그들이 보너스를 선택하기 전에 망설였을 거라고 말한다. 산드라가 마주한 동료 중에는 “보너스는 우리가 일한 대가인데 왜 너한테 주느냐”며 가슴에 대못을 박는 사람도 있지만 상당수는 여러 형태로 갈등과 죄의식을 내보인다. 보너스를 포기할 수 없다면서도 “원망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집에 있으면서도 없는 척 대면을 피하고, 거절을 듣고 돌아가는 산드라를 쫓아가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말한다. 사과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가장이라 보너스를 포기할 수 없다는 한 동료는 “과반수가 널 지지하면 내겐 재앙이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되길 바랄게”라고 말하는데, 이 앞뒤 안 맞는 모순적 태도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스스로 옳은 것을 선택하지 못한 채 ‘어쩔 수 없이 옳은 쪽으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태도는 현실에서 보기 드문 모습이 아니다.


재투표를 하는 월요일 아침 회사에서 직장동료들 앞에 선 산드라.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스틸컷

산드라가 한 사람씩 설득해갈수록 남은 동료들은 지금까지 보너스를 포기한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한다. 거기에는 정의롭지 못한 선택을 한 게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엿보인다. 떳떳하지 못한 선택을 할 때면 더욱 곁눈질을 하게 되는 법이다. 남들 눈치 때문에 스스로 원치 않는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한 계약직원은 “이웃을 돕는 게 신의 뜻”이라 생각하면서도 다른 동료들 눈 밖에 날 것이 두려워 산드라를 선택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자기 때문에 동료들이 보너스를 받지 못하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재계약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그가 받게 될 보너스는 남들과 달리 푼돈에 불과했다.


도의를 무시하고 실리만 쫓는 건 무서운 일이다. 실리를 추구할 때에도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까지 손에 넣는 무엇은 훔친 물건이나 다름없다. 산드라를 실직시키고 받게 되는 보너스를 당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재투표로 산드라가 얻은 기회가 ‘복직할 기회’라면 동료들이 얻은 기회는 ‘사람다워질 기회’다. 여러 동료가 산드라에게 “다시 생각해보겠다”거나 “너에게 투표하겠다”고 약속하고, 재투표는 예정대로 월요일 아침에 치러진다. 우리가 산드라의 동료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 선택으로 어떤 사람인지 결정된다면 좀 더 흔들리지 않고 ‘사람다운’ 선택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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