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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봉 Jul 10. 2020

원도심 주택살이의 괴로움

'난닝구' 할머니 1

옥상에 할머니가 보이지 않기 시작한 지 열흘이 지났다. 매일 아침이면 옆집 할머니는 옥상에서 텃밭 돌보는 일을 한다. 할머니네 옥상과 우리 집 2층 발코니가 마주한 지라, 아침에 일어나 발코니 커튼을 열어젖히는 게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일어나자마자 부스스한 꼴로 다른 이를 마주하기도 싫지만 사실 할머니가 걸치고 있는 '난닝구' 보기가 민망하기도 해서다. 입었다기보다 몸에 걸쳐있다고 하는 게 더 맞을 러닝셔츠는 중력을 이기지 못하는 노인의 피부처럼 자꾸 흘러내리고 있었다. 매일 이런 꼴로 서로 인사하기도 뭣하고 모른 척하기도 그렇다. 그래서 커튼을 열어도 되는지 빼꼼 할머니의 옥상을 염탐하는 게 내 하루의 시작이다.


할머니와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도시가스' 사건 때문이다. 우리가 매입한 집은 초등학교 앞 오래된 이층 벽돌집이다.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를 하며 이런저런 겪을 일을 각오했지만 도시가스 문제로 머리에서 가스가 새어 나올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천만 원 가까이 드는 도시가스 연결 비용을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것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는데, 게다가 옆집에 허락을 구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만약 옆집에서 가스관을 따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도시가스 연결이 어렵다는 게 건축사의 설명이었다. 이사도 하기 전에 부탁부터 해야 한다니.


"그런데 안 해주면 어떡하죠?"

"그러면 도시가스 본선에 연결해야 하는데, 그 길이에 비례해서 비용과 공사 자체도 커집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걸 제가 해야 하나요?"

"보통 건축주께서 하십니다."


아, 내가 건축주구나. 코딱지만 한 집이라도 주인이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공사 비용이 예상보다 훨씬 많이 들어갔는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읍소를 해서라도 사용 승낙을 받아야 했다. 우리가 허락을 받아야 하는 집은 두 집. 그중 한 집이 '난닝구' 할머니네였다. 주위 얘기를 들어보니 '난닝구' 할머니도 2년 전 다른 집에서 우리처럼 파이프관을 연결해 쓴 경우였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을 잘 아시겠지.


이미 아내와 나는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앞으로 이웃이 될 주위 분들 집을 찾아가 한 차례 인사를 한 적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이 오래된 동네와 와서 산다며 모두 격려를 해주셨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선처를 기대했다. 과일이라도 사 들고 가서 부탁하면 되겠지.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건축사가 내게 준 가스회사에서 받아오라고 준 '인입배관사용합의서'는 그냥 집주인이 사인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인감도장'을 찍어야 하는 서류였다. 그리고 도장을 증명할 인감증명서를 직접 주민센터에 가서 떼야하는 번거로운 일이기도 했다. 나에게도 '인감도장'은 왠지 집문서만큼이나 무게가 나가는 '말'이고 '물건'이다. 계약서를 쓰거나 대출받을 때나 쓰는 것이지, 고작 도시가스 연결하는데 인감도장까지 필요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이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인입배관사용합의서. 이 합의서를 제출해야 남의 집 가스관에서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가스관을 설치할 수 있다.


아무튼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하면, 사과 박스와 상냥한 인사만으로 도시가스는 간단히 연결되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남의 집 도시가스관에 우리도 빨대를 꽂아 쓰는 형태인지라 이에 상응하는 가볍지 않은 '인사'가 필요했다. 문제는 내가 두 집에 다른 무게의 인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난닝구' 할머니도 그 옆집 가스관에 빨대를 꽂았기 때문에 우리 모두 '빨대 동지'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모든 일에는 앞뒤가 있고 서열이 있는 법이다. 우여곡절을 겪고 동의서를 어렵게 받았지만 정작 가스 공사는 그해 겨울을 넘기고 이뤄졌다. 도로를 파는 공사는 긴급한 일이 아니면 기존에 땅을 판 지 2년을 넘겨야 할 수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닝구' 할머니네가 가스 공사로 골목길을 판 것이 아직 2년이 안 된 것이다. 게다가 겨울이 다가오면서 땅파기 공사는 할 수 없었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을 LPG 가스로 겨우 연명하며 드디어 봄이 오고, 가스 공사가 시작되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LPG 가스통 이야기)


도시가스 공사가 끝난 날, '난닝구' 할머니는 골목길에서 아내에게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침 내가 퇴근하고 들어오는 길이라 사색이 된 아내가 뒤로 고꾸라지는 걸 겨우 막을 수 있었다. '난닝구' 할머니 왈, 당신이 찍어준 도장이 그런 건 줄 몰랐고 이 집에 '까스'를 주면 자기 집에 '까스'가 덜 나오면 어떡하냐는 말이었다. 가뜩이나 목소리가 큰 분이라 골목길이 쩌렁쩌렁 울리고 사람들이 한둘 모여들고 있었다.


"아니, 그때 설명을 다 드렸는데…. 그렇다고 가스가 안 나오는 게 아니고요, 할머니…."

"혼자 사는 늙은이라고 무시하는 거여. 여기 우리 '사우'도 데리고 왔어. 말해 봐."


'혼자 사는 늙은이라고 무시하냐'는 말까지 나오자 숨이 턱 막혔다. 아내의 표정을 보니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장모님 편을 들어주려고 급히 파견된 할머니네 '사우'분도 거들긴 해야겠는데, 뭘 어떡해얄 지 몰라 어리둥절할 때 구원처럼 옆집 어르신이 등장하셨다. 이 분으로 설명하자면 '난닝구' 할머니네도 우리 집도 빨대를 꽂은 진짜 '까스' 원조집이었다. 원조답게 어르신은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까스는 물이 아니다. 더 꽂아도 된다. 할머니, 걱정 안 하셔도 된다. 이웃끼리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


치킨집을 운영하는 '까스' 원조집 어른의 상황 정리는 간단하고 명쾌했다. 시시한 싸움이 되어버렸다고 느꼈는지 모여든 동네 사람들도 모두 흩어졌다. 우리는 가스 원조집 어른의 상황 정리가 너무 고마워 그 후로 치킨 마니아가 되었다. 아무튼 상황은 정리되었지만 '난닝구' 할머니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떡을 사들고 할머니를 다시 찾았다. 뭐가 어떻게 됐든 이렇게 얼굴 붉히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할머니께서도 미안했는지 먼저 사과를 하셨다. 하지만 그 이후로 할머니를 보는 게 사실 편치는 않았다. 인사를 하면서도 할머니도 어딘가 어색한 눈치였다.





구도심 주택살이 봉봉 TIP


1. 단독주택 매입할 때 난방을 어떻게 하는지 미리 확인해야 화를 면합니다.


2. '인입배관사용합의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설치비가 덜 듭니다. 간혹 합의를 안 해주는 이웃도 있다고 합니다. 열과 성을 다해 읍소해야 합니다.

 

3. 서울 시민들은 좋겠네요. 2019년부터 '도시가스 인입배관 공사금 분담금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사용자와 50%씩 분담하던 것을 도시가스 회사가 전부 분담합니다. 인천을 비롯해 다른 도시들도 시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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