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닝구' 할머니 2
어느 날 출근을 하러 나서는데 마당에 검은 비닐봉지가 있다. 누가 또 남의 집에 쓰레기를 버렸나, 순간 화가 치밀었다. 간혹 쓰레기를 담은 검은 봉투를 남의 집에 버리는 사람들이 동네에 있기 때문이다. 비닐봉지를 들어 이리저리 살피는데 난닝구 할머니가 옥상에서 나를 불렀다. 오늘 입은 옷은 '난닝구'가 아니었다.
"상추니께 씻어 먹어요. 내가 매일 물을 많이 줘서 부드러워. 좀 아까 딴 거니께 괜찮을거여."
할머니가 옥상에서 우리 집 마당으로 상추를 투하한 것이다. 퉁명스러운 말투처럼 툭. 할머니의 상추 낙하는 그날 이후로도 우리 집 마당과 2층 발코니로 간혹 이어졌다. 할머니의 하사품을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날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저녁에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고 직접 투하 위치를 알려주셨다.
"인사해 줘서 고마워요. 그전에 살던 사람들은 10년을 살았어도 생전 인사한 적이 없어."
"네? 아, 그랬어요?"
"젊은 사람들이 인사해줘서 고마워."
나나 아내나 이미 젊은 사람들은 아닌데. 이래저래 당황한 내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할머니는 돌아섰다. '난닝구' 할머니는 츤데레 할머니였다. '혼자 사는 늙은이라고 무시하냐던 말'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누구나 혼자면 외롭고 슬프다. 나이 먹은 어른이라고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도시가스 연결을 위해 필요했던 '가볍지 않은 인사'보다 빈손이라도 '사람의 인사'가 더 그립고 소중했던 것일까. '도시까스 사건' 이후 어딘가 서먹서먹하던 분위기는 그날 이후로 일단락되었다.
'도시까스 사건'
할머니가 옥상에 보이지 않은 지 열흘이 넘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날짜가 지날수록 걱정되기 시작했다. 발코니 커튼을 열며 난닝구 할머니를 마주할까 봐 조마조마했던 마음은 이제 할머니가 없을까 걱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상추랑 고추들은 누가 물을 주고 있는 건지. 땡볕에 다 탈 텐데. 주인 없는 옥상 텃밭은 참새들의 쉼터가 되어버렸다. 눈치도 없이 온 동네 참새들이 아침마다 반상회라도 하는지 모두 텃밭에 다닥다닥 모여있다.
"이층 할머니 어디 가셨어요? 요즘 안보이시네요."
"어머 웬일이야. 할머니 허리 수술했어요. 사고는 아니고… 어머 웬일이야. 걱정했구나~"
출근길에 옆집을 들렀다. 할머니네 집 1층에서 분식집을 하는 이모님은 할머니의 상황을 잘 알고 계셨다. 이모님은 보통사람의 목소리보다 최소 세배 이상의 성량과 음역대를 가지셨다.
"내가 들어보니까 내일쯤 퇴원한다고 했어요. 할머니 퇴원하면 들렀다고 얘기할게~. 어머 웬일이야."
별일도 아닌 걸 웬일로 만드는 건 이모님의 놀라운 장점이다. TV 예능프로에 나오는 패널처럼 이모님은 언제나 하이톤에 과한 리액션을 보여주셨다. 방송국 방청객 알바를 하셔도 열 명 이상의 몫을 하고도 남을 분이다. 할머니 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면서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그런데 나 정말 감동했잖아. 코로나 때문에 우리가 석 달을 쉬었잖아. 그런데 석 달만에 딱 와보니까 할머니가 임대료를 안 받겠데 글쎄. 웬일이야~ 석 달치를 다. 평소에는 수도요금 십원에도 그렇게 난리 치는 분인데 글쎄. 나 완전 감동했잖아. 그래서 한우 고기 사다 드리고 과일 사다 드리고 그랬잖아. 이건 뉴스야 뉴스. 웬일이야 정말~."
이모님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모님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마력이 있는 분이다. 분식집 주요 고객인 초등학교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걸 보면, 정말 이분은 아이들을 좋아하는 분이라는 게 느껴질 때가 많다. 우리가 젊은이가 아니듯 이모님도 실제 이모 뻘은 아니지만 원도심에선 최소 열 살 정도는 낮춰 행세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아무튼 아침마다 옥상에 불출마하는 할머니의 사정을 알게 되어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요즘 허리 수술은 그리 큰 일도 아니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런데 주차장으로 걸어가다가 불쑥 잊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늘 아침저녁으로 주차장 근처 의자에 혼자 앉아계시던 동네 할머니의 모습. 우두커니 의자에 앉아 있던 이 할머니의 모습을 못 본 지 꽤 오래되었다. 오랜만에 자리를 돌아보니 사람은 없고 의자만 남아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수술하셨다고 들었어요."
"아이 괜찮아요. 누가 또 그런 얘기를 했나 보네. 동네 소문만 나고... 남사스러워서."
다음 날 옥상에 할머니가 계셨다. 텃밭에 물을 주고 있는 할머니가 반가워 발코니 문을 열고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는 하리에 복대를 차고 계셨다. '난닝구'는 입지 않았다. 내 말이 쑥스러우셨는지, 뒷걸음을 치며 우리 집 발코니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뭐라도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으나 츤데레 할머니는 무심하게 모습을 감추셨다.
할머니네 옥상과 우리 집 2층 발코니 사이 허공을 바라다보았다. 한두 사람이 지날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이 아래로 보인다. 아파트 옆집보다는 멀고 옆 동보다는 훨씬 가까운 이 애매한 거리. 사생활 침해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이웃의 사생활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골목길 집들의 풍경을 바라보며, '이제야 이 애매한 거리감에 우리도 적응해가며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생활 침해가 사생활 걱정이 되면 그게 이웃이겠구나' 생각을 하며 멍하니 골목길을 바라보았다.
구도심 주택살이 봉봉 TIP
1. 이웃과 인사를 나누면 자다가도 상추가 생깁니다.
2. 이웃이 있어야 서로 도울 일이 있습니다. 이런 게 불편하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도 괜찮습니다.
2. 구도심에 살면 나이가 젊어져요. 40대 7년차 부부도 새댁이고 젋은이입니다. 이모도 이모뻘이 아니고, 총각도 사실 좀 그래요. 젋게 살고 싶다면 원도심으로 이사를 추천드립니다.
4. 아차! 옥상이 있다면 꼭 옥상에 수도 배관을 연결하세요. 옥상에 수돗물이 안 나오면 텃밭이고 뭐고 말짱 다 꽝입니다. 물 길어 나르다가 허리가 휩니다.
원도심 주택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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