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는 그렇게 좀 세게 얘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민재는 대기업에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사람들을 숱하게 보아왔다. 상대가 상사던, 동료던, 후배이던 상관없이 말이다. 여기서 받아주면 민 부장은 자리 멋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보고하고 또 그래도 내가 가만있을 거라고 착각할 수 있다. 욕만 하지 않고 예의 있게 하지만 강하게는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 그래? ㅎㅎ그럼 뭘 하고 싶은 거야?” 민 부장은 멋쩍은 듯 웃었지만 눈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민재는 민 부장의 표정에서 야비한 느낌마저 받았다. 민재는 이제부터 최대한 드라이하게 얘기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음.. 글쎄요. 사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서 당장 해외 파견을 가고 싶지는 않은데요. 물론 프로젝트가 잘 되면 프로젝트 전략국가에 직접 파견을 나가 제가 챙기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만 아직은 파견 날짜까지 얘기하기는 먼 얘기여서요. 그동안 제 조직 만들어서 리더를 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어. 어.. 그래? 이상하네. 난 당연히 너가 해외 파견 다시 가고 싶을 줄 알았는데. 그게 너한테 잘 어울리지 않겠니? 그리고 해외 파견 가려면 지금 팀 보다 강 이사나 최 이사가 맡고 있는 실행 전담 팀으로 가는 게 좋아. 지금 우리는 전략만 짜잖니” “말씀드린 대로 지금은 우선 맡은 프로젝트 먼저 챙기고 파견 나가는 건 나중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 한번 잘 생각해봐. 그리고 나중에 술 한잔 해야지. 또 보자” 아니라고 몇 번을 이야기해도 끝날 때 까지 잘 생각해보라고 얘기한다. 저렇게 얘기하고 윗사람에게 보고할 때는 내가 생각해보겠다고 했다고 에둘러 보고하겠지. 참 잘못된 사람이라고 민재는 생각했다. 민재는 민 부장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민 부장을 처음 만난 건 7년 전이었다. 밤 10시 30분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려 호텔로 가는데 먼저 파견 근무 중이던 민 부장에게 전화가 왔다. “정 과장(당시 과장) 잘 도착했나? 한 잔 해야지?" “아 네, 차장님. 잘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본사에서 급하게 보내달라는 보고서가 있어서요. 오늘 시간도 늦었는데 내일 하시면 어떨까요?” “무슨 소리야 정 과장 온다고 내가 7시부터 자리 세팅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얼른 와. 선배에게 그러는 거 아니야” “네? 차장님 저 10:30분 도착인데 7시부터 뭘 세팅을 해놓으셨어요. 저 정말 괜찮은데요” “출장자 오는데 공식적으로 한 잔 할 수 있고 좋잖아. 정 과장 팔아서 내가 중요한 사람들에게 술 한잔 샀어. 얼른 와” “제가 지금 차장님께도 메일 보내드렸는데 정말 중요한 본사 보고여서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 할 수 없군. 어쨌든 오늘은 정 과장 때문에 먹은 거니 정 과장도 참석한 거다~ 그렇게 알고 있어~ 나중에 경리팀이나 감사팀이 물어봐도 그렇게 대답하기다~ ㅎㅎ” 민 부장의 그런 사람이었다. 술에서 시작해서 술로 끝나는 사람. 하지만 그건 그저 시작이었다. 다음 날 민 부장은 갑자기 거래선 미팅이 생겼다면서 오후 4시에 사무실에 나왔다. 법인의 직원들이 웃으면서 민 부장 또 미팅이라고 하던 모습에서 미팅이 아니라 민 부장은 술 때문에 사무실에 늦게 나오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술버릇 외에도 민 부장에게 인수인계를 받는 동안 업무적으로도 민부장이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수인계 종료일이 다가올 때쯤 법인장에게 인수인계 결과 보고를 준비하면서 민재는 이걸 어떻게 보고해야 되나 고민이 되었다. 몇 가지 사안은 경우에 따라서 감사팀이 민부장을 징계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민 부장을 그렇게 만들면 민재도 파견 생활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당연히 들었다. 그날 밤 민재는 오랜만에 한국에 있던 아내와 통화를 하면서 영국에서의 생활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아내는 아이들의 학교 입학을 위해 한창 여러 가지 영문 서류 정리를 하고 있던 터라 나의 그런 소리를 듣고 황당해했으나 곧 뭐 그러면 비행기만 엄청 타고 바로 한국 오겠네 하며 다행히 쿨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음날 아침 8시 50분. 민재는 자신의 책상에서 심호흡을 했다. ‘10분 남았으니 이제 가야겠군. 이제 그냥 내가 옳다고 믿고 내 생각을 말할 수밖에’ 마지막까지도 민 부장 얘기를 법인장에게 어떻게 할지 민재는 고민이 되었다. 민재는 곧 엘리베이터를 타고 법인장이 있는 21층으로 갔다. 21층에 도착해서 출입문에 아이디카드를 대자 문이 열렸다. ‘이제 시작이다. 취소할 수도 없다.’ 민재는 그렇게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 EP4. 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