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경애의 마음>
기다렸던 소설이다. 인상깊었던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를 쓴 작가 김금희의 첫 장편 소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인 연애 소설이라고 하니!! <너무 한낮의 연애>의 인물들은 모두 묘하게 마음을 끌었다. 대놓고 호감형의 인물도 아니고, 사실 어딘가 조금씩은 이상하기도 한데 내가 꽁꽁 감추고 싶었던 어느 마음을 콕- 하고 찌르는 지점들이 있었다. 그런 인물들이 그녀의 장편 소설 속에서는 어떻게 그려지고, 어떻게 긴 서사의 이야기 속에서 행동할지가 궁금했다. 더군다나 '연애'에서 말이다.
그런데 로맨스 소설이라는 외피를 쓴 이 책에는 그 흔한 로맨스 소재는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성적인 끌림도, 썸타는 긴장감도, 마음을 애태우는 질투도, 갈등의 시작인 삼각관계도. 로맨스 소설이라면서 연애의 걸림돌은 하나도 없는 연애다. 그래서 밍숭맹숭하냐고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어떤 로맨스 소설보다 치열하다. 그것은 연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연애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이다
마음이 끌려 호기심을 갖고, 마음이 열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고, 마음이 식어 연애가 끝이 난다. 이 책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게 되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로맨스 소설이 맞다. 여자 주인공 경애는 지난 6년 간의 산주와의 연애를 끝내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떤 사랑은 같은 기차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시작되었다. 혹은 어린 시절 운동회날 달리기에서 둘 다 꼴등으로 들어왔다는 이유로, 첫눈을 함께 봤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학대받은 기억이 똑같이 있다는 이유로, 같은 밴드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돌아서서 지하철역까지 느릿느릿 걸었다는 이유로.
사랑이 시작하는 과정은 우연하고 유형의 한계가 없고 불가해했는데, 사라지는 과정에서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알리바이가 그려지는 것이 슬펐다. 가난과 폭력, 배신과 거짓말, 종교, 정치, 국적의 차이, 윤리적 판단 - 불륜, 제 삼자의 출현 - 같은 일종의 유형들이 있었다. 그렇게 소멸은 정확하고 슬픈 것이었다.
육년간의 연애가 끝이 나야 한다면 그런 세속의 셈법이 아니라 사랑 본질의 것, 슬프게도 그것이 갖는 한계이기를 원했다.
그렇다. "나를 왜 좋아해?" 라고 물었을 때, 가장 감동적인 답은 "너가 좋아서 좋지" 혹은 "그냥"과 같은 것이다. 즉, 이유 없이 너를 좋아한다는 것. 너라서 좋다는 것. 어떠한 세속의 셈법 없이 마음이 그렇다는 것.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이다. 대다수의 인간관계는 알게 모르게 손익을 따진다. 이 사람이 나에게 줄 수 있는 것, 내가 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 어쩌면 가장 진실했으면 하는 연애 관계마저도. 사실 가장 치열하게 손익을 따지는 관계가 연애 관계, 특히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관계가 아닐까 싶다. 평생 함께 살 사람을 정하려고 하면 이것 저것 따져볼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이니까. 그래서 6년간 사귀다 헤어진 산주가, 세속의 셈법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의 것, 즉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떠난 것이기를 경애는 바랐던 것이다.
경애는 마음의 많은 부분을 상실한 여자다
연애에서 뿐만이 아니다. 학창시절엔 가장 친했던 친구를 화재 사고로 잃었다. 회사에서는 노조 활동을 하다 동료를 잃었다. 무언가를 상실했을 때 그녀는 그 순간이 그렇게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움크려 있었다. 가장 친했던 친구가 죽고 나선, 그 친구가 보고싶을 때마다 친구의 음성사서함에 전화를 걸어 메시지를 남겼다. 그렇게 그 상실로 인한 고통의 순간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상실을 메우기 위해 버둥치기 보단, 그냥 견뎌낸 것이다.
한동안 따뜻하다는 말을 쓸 수가 없었어, 기억이 나서, 어떤 말은 그렇게 기억에 빼앗기는 것 같았어, 쓸 수 없었어, 그런데 그런 말이 아니라 그렇게 일상적으로 써야 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말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어. 이를테면 경배 같은 단어, 그런 단어는 자주 쓰지 않으니까 불편할 것이 없잖아. 그런데 따뜻하다는 말은 어쩔 수가 없었어. 이 밥이 따뜻하다. 그런데 E가 죽고 나서는 따뜻하다, 라고 생각하면 더이상 따뜻하지가 않아졌어, 따뜻하면 안되는 것처럼 느껴졌어, 그러면 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말을 삼키고 밥이 먹을 만하다고 정정하면서 그런 몸은 어떻게 되는 건가 생각했어.
노조 활동으로 인해 한직으로 발령이 났을 땐 흠잡히지 않도록 그 직무를 묵묵히 수행했다. 산주와 헤어지고 난 후엔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해 온라인 연애 고민 페이지에 익명으로 털어놨다. 산주를 저주하지도 못했고,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지도 못한 채 자신에게 남겨진 산주에 대한 마음을 그렇게 둔 것이다.
"우리는 육체에 봉인되었지만 상상력과 기억의 힘으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감독이 인터뷰한 기사를 읽어주었다. 그때 경애가 그 '봉인'이라는 말을 얼마나 필사적으로 붙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에는 육체 너머의 것이 있다는 것, 어떤 사랑은 멈춰진 기억을 밀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 사라진 누군가는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의 인생에서 다시 한번 살게된다는 것.
상수는 경애의 회사 상사이다. 서로에게 이성적 호기심 같은 것은 없다. 그냥 느슨한 회사의 인간 관계 중 하나 일 뿐. 그런 둘은 하나의 팀이 되고, 함께 베트남으로 발령이 난다. 둘은 회사의 입장에서 쉽지 않은 존재들이다. 경애는 노조 활동을 해서 회사에선 불편한 존재이고, 상수는 낙하산인데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서 처치 곤란이다. 그래서 그 둘을 팀으로 묶어 베트남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상수는 상실하지 않기 위해 사는 남자다
상실한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경애라면, 그 아픔을 아예 느끼지 않기 위해 무엇도 상실하는 순간을 만들지 않는 것이 상수다. 그렇다고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닌. 어느 대목에선 김금희의 단편소설 속 인물인 조중균을 떠올리게도 했다.
상수의 마음은 특정할 수 없는 무언가와 무언가 '사이'에 있다고 경애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가야 할 일이 있을 때면 긴장돼서 진정제를 찾아야 하는 나약함과 상사에게 정말 낙하산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요구를 당당하게 하기 위해 그 상사의 방문을 열어젖히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패기 사이에 상수의 마음이 있었고, 경애와 자신 둘만 있는 사무실에 매번 허황된 매출 목표금액을 적어 보면서 회사가 이루면 이루는 겁니다, 라는 유의 근면을 강조하는 문구들에 마음을 기탁해보는 것과, 어떻게 해서든 실적을 내려고 공장들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영업담당자가 원하는 것이 뒷돈이나 접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눈에 띄게 낙담하는 것 사이에 상수가 원하는 세일즈맨의 마음이 있었다.
결국 상수는 마치 추처럼 어떤 것과 어떤 것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는데 경애는 그가 그렇듯 갈등하는 것에 고유한 윤리가 있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상수는 막무가내의 이기주의자나 꼴통, 심지어 고문관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마음의 질서가 있는 사람이었고 다만 그 자기윤리를 외부와 공유하는 데 서툰 것 뿐이었다.
베트남에서 둘은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 느슨한 회사 동료였던 둘은, 서로를 사람 대 사람으로 알아간다. 누군가를 상실한 경애와 누군가를 상실하지 않으려 애쓰는 상수가, 서로를 알아간다. 이토록 천천히 서로를 내보이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관계가 있을까 싶을만큼, 둘은 정말 조금씩 마음이 열리고 물들어간다. 그러다 서로가 말하지 않았던 비밀들을 알게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섣불리 입밖으로 내지 않는다. 그게 행여나 마음을 다치게 할까봐.
죽은 친구의 음성 사서함에 메시지를 남기는 마음과, 다른 사람의 음성 사서함에 들어가 사람들이 죽은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듣는 마음. 현실에서 싸우다 힘든 마음을 온라인에 익명으로 쏟아내는 마음과, 현실에선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온라인에선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온 마음으로 듣는 마음.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알고, 이해하고, 서로의 빈 곳을 채워가며 둘은 느슨한 관계에서 조금은 특별한 관계로 나아간다.
마음은 서로를 나아가게 한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으로 인해 나의 많은 것이 변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다.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는 느슨한 관계는 서로가 함께 마음을 주고 받으며 특별해진다. 설령 상대에게 무슨 일이 생겨 관계의 셈법이 달라진다 하더라도, 그 관계를 놓지 않을만큼 단단해진다. 견뎌내는 것에 익숙했던 경애는 조금씩 나아가 보기로 한다. 상수의 마음 덕분에.
사람이 어떤 시기를 통과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궁금했다. 그때도 '나아간다'라는 느낌이 가능했던가. '견뎌낸다'라는 느낌만 있지 않았나.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듯 기척을 내니까. 상수의 손을 잡았을 때 경애는 더 밀착하고 싶다는 충동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꽉 차게 들어올리는 힘을 느꼈다. 자기는 물론이고 맞은편의 상수도 한 팔로 안아들 수 있을 듯한 정도였는데 왜 상수를 떠올리면 그런 힘을 생각하게 될까. 힘이 있어야 한다고 다짐하게 될까.
상실하지 않기위해 무덤덤히 살아온 상수는 처음으로 자신을 걸어본다. 아주 큰 상실이 그 길 끝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경애를 기다려 보기로한다.
그렇지 않아도 늘 뭔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았으니까 상수에게는 그리 힘든 기다림도 아니었다. 경애는 세상을 떠난 사람도 아니고 19세기 브론테 자매의 소설 속 인물도 아니며 브로마이드 속에만 존재하는 히로인들도 아니었다. 경애는 지금이라도 눈을 감으면 아주 복합적인 실감으로 떠올릴 수 있는 대상이었다. 경애와 상수에게는 추억이 있고 대화가, 어긋났던 감정들의 순간과 실패의 경험과 자주 있었던 낙담과 서로를 서툴게 위로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적어도 상수에게는 너무나 뚜렷했으므로 상수는 기다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럴 바에는 x 없애라' '변태일 듯' 같은 댓글 속에서도 늘 기다리는 마음을 유지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서로가 서로를 채 인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던 어떤 마음에 관한 이야기
이 둘이 연애를 시작할지 안할지는 모르겠다. 연인 관계로 진전될지 혹은 지금처럼 마음을 주고 받은 사이로 지낼지도. 그래서 이것을 연애 소설이라고 봐야할지 모르겠다. 오히려 (아직까지는) 모르던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며 공감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함께 나아가는 이야기다. (김금희 작가는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쓸 당시 촛불 시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어떤 부분에선 로맨스의 외피를 쓴 사람들이 연대하는 이야기란 생각도 든다.) 하지만 분명히 이것은 어떤 마음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 마음은 그 어떤 로맨스 소설보다 로맨스 같은 마음이다. 마지막은 아마도 이 책을 읽는다면 가장 많이 기억에 남을 구절로.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연애에서든 그 무엇에서든. 우리는 조금 부서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폐기해야하느냐고 물었지요. 폐기 안해도 돼요.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서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강변북로를 혼자 달려 돌아올 수 있잖습니까. 건강하세요, 잘 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채소를,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