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밤이 끝나가던 8월 말부터 감정이 들쑥날쑥한 시간을 보냈다. 밤이 되면 불어오는 차가운 공기는 더 헛헛하게 느껴졌다. 눈에 보이는 나의 문제점, 문제를 알겠는데도 아니 답까지 알겠는데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나 자신. 그로인해 또 다시 스스로에게 실망하게됐다. 누구를 탓할 수도, 상황을 탓할 수도 없었다. 왜 하필 가을이 이렇게 갑자기 성큼 다가왔나, 애꿎은 날씨만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더워라! 아무생각도 못하게 다 같이 더워버려라! 했던 것이다.
그런 시간들을 그냥 견뎠다. 아니 잘 견디지는 못했고 그냥 보냈다. 견디는 걸 정말 못하는데, 어쩌다보니 감정이 오는대로 또 빠져나가는대로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친한 친구에게 물었었다. "대체 넌 힘들면 어떻게 해?" 라고. 친구는 대답했다. "그냥 견디는거지, 뭐." 아니 대체 그냥 견디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힘들 때 난 술을 퍼먹고 감정을 쏟아낸 다음 뻗어버리거나. 아니면 술을 퍼먹고 새로운 사고를 쳐서 원래의 상황보다 더 큰 위기가 닥쳐서 잠시 그 상황을 까먹거나. 아니면 술을 퍼먹고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하거나.. 아무튼 감정의 파도 한 가운데서 허우적거리다가 어느새 보니 아 이제 좀 낫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술도 못먹겠더라. 반복되는 문제에 스스로가 답답하고 지쳤다. 더 이상 쏟아낼 것도 없었다. 그치만 감정은 여전히 차오르고 어떻게든 시간이 흐르도록 해야만했다. 아직 모든 것이 괜찮아진 것은 아니지만, (특히 생각하고 결정내려야 할 중요한 것들이 눈앞에 턱턱 놓여있다만..) 그래도 어떻게든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음에 또 낙심하고 슬플 때 스스로에게 적어두는 팁이자 누군가가 우연히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어내려가 본다.
고등학교 이후 달리기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달리기를 시작했다. 요즘 러닝이 유행인데다가 주위 친한 친구들이 러닝을 열심히 하고 있어서 인스타그램 피드에 나이키 로고가 박힌 러닝 기록이 넘쳐났다. 그런데도 꿈쩍하지 않았었지만.. 여행 갔다가 우연히 찍은 비키니 사진에서 진짜 현타가 왔고, 새로 시작한 운동은 좀 더 가벼운 몸을 필요로 하고, 날도 선선해지고해서 그냥 슬슬 뛰어보기로 한 것이다.
달리기가 힘들면 걷기도 좋다.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다. 땀 뻘뻘 흘리며 뛰면 무념무상 상태가 되고 기분이 한결 가뿐해지기도 하지만, 체력이 안된다면 그냥 몸을 조금씩만 움직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마라톤을 앞둔 어제 마음이 너무 심란해서 집밖으로 무작정 나왔다. 집에 있다간 온갖 생각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마라톤 때문에 차마 뛰지는 못하겠고, 그냥 무작정 걸었다. 이어폰을 꼽꼬서, 눈물이 자꾸만 터질 것 같아 사람이 없는 도심 길을 요리조리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니 눈물은 마르고, 대신 땀이 조금씩 차오르고. 우울했던 플레이리스트의 노래는 어느새 빠른 템포의 노래로 바뀌어 있었다. 뭐가 됐든 좋다. 그냥 몸을 조금씩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한결 나아진다.
우울할 때 무슨 책 읽기냐... 할 수도 있는데, 정말 책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 딱 책이 아니어도 된다. 그냥 무언가 다른 세계에 잠시 몰입할 수 있는 것이면 된다. TV 프로그램도 좋고 영화도 좋다. 사실 예전에 한창 슬럼프일 때는 드라마를 몰아봤다. 그렇게 본 드라마가 <풍문으로 들었소>, <또 오해영>, <식샤를 합시다>, 그리고 최근의 넷플릭스 시리즈 <굿플레이스>가 있다... 아니 뭐가 이렇게 자주 우울했냐.
암튼 이번에 좋았던 책은 <이혼일기>다. 전에 리뷰했던 책 <유혹의 학교> 저자인 이서희 작가의 신간이다. 이혼을 하며 겪은 그녀의 감정들을 써내려간 에세이다. 여전히 좋았던 구절은 넘쳤고, 이 글을 마치면 빨리 그 책 리뷰를 적고싶다. 그녀의 글들은 솔직하다. 자신의 힘듦을 기꺼이 내보여준다. <이혼일기>는 누군가와 헤어지는 이야기라기보단, 자신을 되찾아가는 이야기다. 잃어버렸던 삶과 조각나버린 스스로를 하나하나 주어담는다. 거기에 맛깔난 문장들은 그녀의 책에 완전 몰입하게 했고, 그녀가 조금씩 책 속에서 나아갈 수록 나도 힘을 받았다. 책이 아니어도 된다. 장르는 뭐라도 좋다. 단, 재밌어야 한다. 그래야 시간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 볼테니까. 그렇게 보다보면 힘든 일은 잠시 생각이 안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배가 고파지니까. 밥 먹으면 또 힘이 나니까!
샤이니의 팬이다. 종현이가 죽은 후로 종현의 노래를 잘 듣지 못했다. 들으면 또 다시 힘들어질 것 같아서다. 언젠가 <라디오스타>에 나온 샤이니 멤버들이 말했었다. "오히려 우리가 종현이의 부재를 먼저 언급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서 토크쇼에 나왔다고. 그 사실을 인정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시간이 지나서 이젠 나도 그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게된 것인지 종현이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너무 좋았다. 정말 너무너무 좋은 노래들이었다. 어쩜 이렇게 좋은 곡을 썼을까. 그의 부재를 생각하기보단 그냥 그 노래에 푹-빠져 들었다. <하루의 끝>은 담담한 위로를 주고 <한숨>은 꽉찬 울림을 준다. <Lonley>는 멜로디라인이 너무 좋아서 계속 듣게 되고, <좋아>, <빛이나>, <데자부>는 훅과 리듬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게 된다. 새롭게 귀기울여 듣게된 <1000>, <우린 봄이 오기 전에>, <가을이긴 한가 봐>는 요즘 계절에 딱이다.
그래서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좋은 노래를 남겨줘서 정말정말 고맙다고. 덕분에 너무너무 힘이 났다고.
이렇게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도 문득문득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시간을 쪼개어 차 한잔이라도 하자고 찾아와주는 친구부터, 했던 이야기 백번 정도 반복해도 늘 공감해주고 갑자기 헛소리로 웃겨주는 친구, 언제든 잘 들어주는 친구, 나도 몰랐던 내 감정을 잘 이끌어내주고 오히려 스스로 답을 찾게 도와주는 친구, 힘들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연락오는 보고싶었던 친구... (다 친구라고 썼지만, 사실 여긴 언니, 선배님, 동생, 등등이 있습니다..) 아이고 고마워라. 보답하겠습니다.
여전히 감정 속에서 허우적대고, 늘 부족하고 허술하고, 가끔은 엉망진창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지만.. 아주 조금씩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고싶다. 그리고 요즘 날씨 너무 좋다. 뛰기에도, 책 읽기에도, 노래 듣기에도, 친구들하고 술 한잔 하기에도. 참 좋다. 오래 머물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