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여성의 날 _ 영화 <경아의 딸> 칼럼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일상을 훔쳐보는 영상이 나온다. 카메라는 목욕을 하는 공간에도, 옷을 갈아입는 공간에도, 음식을 먹는 공간에도 있다. 실제로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사생활을 보고, 즐기고, 그렇게 정보가 쌓이는 순간 훔쳐보기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일상이 된다. 카메라가 친숙해지고, 정보의 소통이 용이해질수록 훔쳐보기의 방식은 더 공개적이고 더 폭력적으로 바뀌고 있다.
익명의 타인을 훔쳐보고 싶은 은밀한 욕망은 단순한 훔쳐보기에서 시작해, 점점 더 은밀한 방식으로 진화한다. 급기야 유명 연예인의 사생활, 몰래 카메라, 최근에는 리얼리티 TV, SNS 등으로 진화되어 온 관음증은 집단 무의식을 파고들어 결국 상대방은 나를 보지 못한다는 안도감과 함께 더욱 은밀하고 뜨거운 훔쳐보기의 욕망을 부추긴다. 그리고 익명성의 날개를 달고 마음 한편에 숨어있는 인간의 욕망 속으로 날아든다.
김정은 감독의 <경아의 딸>은 디지털 성범죄의 대상이 된 딸과 젠더 폭력으로 오랫동안 고통 받으면서도 맞서지 못했던 엄마가 딸의 고통을 거울삼아 자신의 상황을 깨닫고 극복하는 영화다. 요양 보호사로 일하며 홀로 살고 있는 중년 여성 경아(김정영)에게 하나뿐인 교사 딸 연수(하윤경)는 정서적으로 큰 힘이 되어주는 존재지만, 독립한 뒤로는 얼굴조차 보기 힘들다. 경아는 딸의 일상을 세심히 신경 쓰지만, 연수는 달갑지 않아한다.
연수는 헤어진 남자 친구 상현(김우겸)이 자신에게 집착하자 그에게 최종 이별 통보를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함께 한 동영상이 연수의 지인들에게 전송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영상의 수신인 중에는 연수의 엄마 경아도 포함되어 있다. 나의 가장 은밀한 사생활을 온라인 세상에 공개한 극악한 범죄자가 한때 가장 사랑했던 남자친구라는 사실이 더 힘들다.
경아는 영상을 보고 깊은 충격에 빠지고, 연수는 어떻게든 혼자 문제를 해결해보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연수는 사건 이후 세상 가장 든든한 내 편이어야 할 사람에게 세상 가장 잔인한 말을 듣는다. 결국 연수는 사회 안전망이라 할 수 있는 경찰의 도움을 요청하지만 세상 누구도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사실만 깨닫는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 연수를 지키기 위해 경아는 고군분투하지만, 문득 자신도 지금까지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정 폭력에 시달려 달아났지만, 세상은 늘 그녀를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고 손가락질 했고, 눈빛과 손가락과 말로 끊임없이 학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맞서지 않았고 그저 삶을 견뎌왔다.
결국 응시의 방향은 권력의 방향이다. <경아의 딸>은 딸의 고통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경아를 통해 피해자를 향한 우리 시선의 방향과 사회적 맥락에서의 방향성을 함께 보여준다. 가해자는 있지만 누구도 벌을 받지 않는 세상이 아니라, 죄 지은 사람이 진짜 벌을 받고 피해자는 보호받는 세상을 만들자고 나지막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를 낸다.
자신의 인생을 아주 객관적으로 바라본 순간, 경아는 딸에게 의지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인생을 살기로 한다. 비로소 딸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건넬 수도 있게 된다.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 각자의 삶을 살기로 한다. 두 손을 맞잡고 달아나지도 못할 가시밭을 함께 헤매는 대신 각자의 길 위에서 각자의 생존법을 가지고 나란히 걷기로 한다.
불의의 사회와 맞서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이다. 사람들에게 입은 상처와 통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어떻게든 두 사람의 삶에 엉겨있다. 사실 약자로 살다보니 세상에 맞서기보다 모른 척 등지는 법을 먼저 배웠지만 연수와 경아는 이제 단단한 마음으로 맞설 용기를 내어본다. 살아야겠다고, 살아보겠다고 결심한 여성들의 시간이 그렇게 좀 튼튼해졌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