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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최재훈 Feb 19. 2024

딸꾹질 같은 외로움

영화 <립반윙클의 신부> 리뷰

<립반윙클의 신부> 스틸 컷

외로움은 딸꾹질 같다. 언제 찾아왔는지 모르게 불쑥, 평온한 호흡을 끊어놓는다. 그런데 누구도 제대로 멈추는 법을 모른다. 숨을 참거나, 물을 마시거나, 또 누군가가 쿵 심장이 내려앉는 겁을 줘도 쉽게 멈추지 않는다. 원인도 해법도 모른 체 딸꾹질이 멈추는 순간, 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을 되찾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딸꾹질을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또 언제 요상한 소리를 내며 내 호흡을 흔들며 찾아올지 모른다. 


딸꾹질 같은 외로움, 그 속

이와이 슌지 감독은 <립반윙클의 신부>(2016년)를 통해 지독히 외로운 한 여인의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이 여인의 외로움은 멈추지 않는 딸꾹질처럼 숨기는 법도, 끝내는 법도 모르고 끝내 삶을 꾸역꾸역 망치고야 만다. 스스로 그 깊은 외로움에서 벗어나, 타인과의 관계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만의 오롯한 삶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순간, 그쳐버린 딸꾹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995년 <러브레터>가 손 편지로 오가는 아날로그 감성의 사랑 이야기였다면, 20년 뒤의 <립반윙클의 신부>는 SNS 시대 속, 인간관계의 지난함과 외로움을 그린다. 거짓말로 이어가는 한 여인의 괴괴한 시간들은 얼핏 우리와 동떨어진 세상 속 이야기 같다가도, 불쑥 그 외로움의 근원을 이야기하는 순간 우리의 맨살에 맞닿는 옷감 같은 감각을 준다. 그리고 나나미의 모습은 세상과 소통하기 어려워 끙끙대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된다.


90년대 청춘을 보낸 사람들에게 이와이 슌지는 그 이름만 들어도 미소가 지어지는 추억의 이름이다. 90년대를 관통했던 <러브레터>야 말로 오래 전 연애편지를 찾아낸 순간처럼 깊고 아련한 각각의 추억과 맞닿은 영화였다. 당시 이와이 슌지 감독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정서와 아주 오래된 복고적 감성을 맞붙여 새로운 자신만의 브랜드를 창출해냈다. 그리고 90년대 그의 영화는 많은 청춘들의 마음을 때론 벅차게, 때론 설레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립반윙클의 신부>는 이와이 슌지의 감성 영화를 기다려온 사람들을 무척 설레게 만들었지만, 관객들의 기대를 크게 배신하는 영화다. 이와이 슌지는 확 달라진 세계관과 시선으로 관객들의 기대를 비튼다. 그래서 간혹 영화의 이야기는 화면과 정서가 충돌하면서 겅중대는 순간을 맞이한다. 쿠로키 하루는 손쉽게 이용당하고, 매번 속아 넘어가는 바보 같은 나나미를 현재로 끌어들여 관객들을 설득한다. 도통 그 속내를 알 수 없어 궁금증을 자아내지만, 끝내 미워할 수 없는 주인공 아무로는 살짝 어리숙하지만 또 살짝 비열해 보이는 아야노 고의 얼굴과 제법 잘 어울린다. 


아련함과 어련함, 그 사이의 어딘가

영화의 도입부 나나미는 빨간 우체통 옆에서 SNS로 맺어진 남자를 기다린다. 90년대 이와이 슌지 영화의 주요한 상징이었던 우체통과 휴대폰을 손에 든 여주인공을 한 화면에 담아내며, SNS 시대에 문자 메시지도 손 편지처럼 주요한 소통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카메라는 늘 숨죽여 사는 주인공처럼 숨을 멈춘 것처럼 요동이 없지만, 그 시선은 꽤 냉정하다. 거짓말과 돈으로 사람의 목숨을 거래하는 냉혹한 현실을 가감 없이 담아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이 슌지 감독은 그 냉정한 관계 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내민 손, 껴안은 사람의 체온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끝내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거짓된 세상에 갇힌 SNS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선과 달리, 그 세대를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하다.


이와이 슌지는 스스로의 작품을 화이트 와 블랙으로 나눌 수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와이 월드의 화이트를 담당하고 있는 작품이 잔잔하고 예뻤던 <러브레터>와 <4월 이야기>라면, 어둡고 사회비판적인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블랙 계열로 나눌 수 있다. <립반윙클의 신부>는 얼핏 화이트처럼 보이지만, 그 경계가 불분명해 보인다. 영화는 밝았다 어두웠다, 우울한 순간과 발랄한 순간을 반복하며 그 결을 달리한다. 격정적인 장면은 없지만, 관객들의 심리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따라 파도치듯 밀물과 썰물 위를 떠다니며 외로움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마지막 장면, 마스는 말짱해진 얼굴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나나미에게 재활용 가구들을 모아다 준다. 말짱한 재활용품과 함께 집안에 남은 나나미 역시 버림받았다가 다시 재활용된 사람이다. 누군가에겐 쓸모가 없지만, 지금의 나나미에게 꼭 필요한 가구들처럼 나나미 역시 세상 속에서 자신에게 꼭 필요한 존재로 되살아났다. 자존감을 잃고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나나미의 모습은 간지러운 목구멍처럼 불편했었다. 결국 모든 통증을 극복하고 오롯한 한 사람으로 되살아난 나나미의 조금은 쓸쓸하고 조금은 초연한 모습이 우리와 닮아있어 어련하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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