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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 깃털 Jul 13. 2018

외출 냥이와 함께 산다는 것은

어멍 수난시대 

어떤 분이 댓글에 이런 말을 남겼다. '고양이가 마당에서 하얀 나비를 쫓는 상상을 했노라고.' 


저 댓글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고양이가 마당에서 유유자적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풍경은 참으로 낭만적이고 아름답지 않은가' 하고. 실제로 뭉치가 마당에서, 나무나 울타리를 타고 놀거나 그네 꼭대기나 테이블에서 낮잠을 청할 때, 그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다. 집 안에 있는 뭉치를 볼 때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다. 그네 위에서 낮잠 잘 때, 그 모습이 너무 예뻐 쓱 다가가 머리를 만지며 '뭉치야~' 하고 아는 척을 하면, 이때만은 쌀쌀맞은 뭉치도, '냐옹~' 하며 깨어나서 반갑게 아는 척을 해 준다. 나는 정말이지 이 콧소리 섞인 '냐옹~' 소리가 참으로 좋다.


요즘엔 그네 위에서 낮잠을 많이 자요. 큰맘먹고 산 그네에 저는 정작 앉을일이 별로 없는데 뭐, 잘된 셈이죠.

하지만 이런 낭만과 아름다움이 전부가 아니다. 실제 외출 냥이와 함께 하는 삶은 조금 과장해서 살벌한(?) 전쟁터나 다름없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뭉치의 사냥 본능'이다. 이제 죽은 쥐를 물어오는 것에는 익숙해졌다. 뭉치의 사냥실력은 죽은 쥐➜죽은 참새➜둥지에서 갓 떨어진 새를 물어오는 것으로 점점 발전되어 갔다. 둥지에서 갓 떨어진 아기새를 5마리나 물어왔을 때는(한 번에 못 옮겨서 하나씩 둘씩) 꽤 충격적이었다. 아기 새가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숨이 붙어 있는 아이를 그대로 땅에 묻을 수도, 그렇다고 어떻게 살려볼 도리도 없었기 때문에(아니 태어난 지 1~2일밖에 안된 아기새를 내가 어찌 살린단 말인가~) 아주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이때만큼은 뭉치가 아주 얄미웠다. 나무를 제법 잘 타는 뭉치가, 아마도 고의로 둥지 채 나무에서 떨어뜨렸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놀부 심보 못지않은 심술인 셈이다.


우리 집에 있는 유일한 큰 나무예요. 뭉치가 제법 나무를 잘 탄답니다.

여기까지는 애교에 불과했다. 어느 날이었다. 날이 더워지면서 밤에도 외출이 잦아져 나는 이제 뭉치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잠자리에 든다. 꼬박꼬박 도장 찍듯 들어와 자니, 어련히 알아서 들어오겠거니 하고 먼저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실제로 자다 보면 어느새 내 옆에 몸을 붙이고 자고 있다. 그 날은 안약을 넣어주고 자려고 뭉치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오랜만에 쥐를 물어왔다. 그런데 쥐가 죽지 않았다 ㅠㅠ 그렇다. 살아있는 쥐를 물어온 것이다. 순간 입에서 쥐를 놓친 뭉치, 당황해 다시 무는가 싶었는데, 쥐가 어디론가 줄행랑을 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뭉치가 세탁기 밑을 몹시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쥐가 세탁기 밑으로 쏙 숨어버린 것이다. 


하느님~ 저에게 어찌 이러한 큰 시련을 주신단 말입니까 ㅠㅠ


울타리나 대문을 타는 것도 아주 좋아해요. 생각해보면 마당은 뭉치에게 너무너무 신나는 곳일거예요.

아, 어떡하지. 내가 아무리 다소 겁이 없는 여인네라고는 하나, 살아있는 쥐를 죽일 자신은 없다. 저 쥐가 밤중에 나와서 돌아다닌다면? 오늘 밤은 다 잔 건가? 어떻게 긴 막대기라도 넣어 휘젓어 봐야 하나? 잠시 멘붕에 빠졌던 나는 정신을 수습했다. 놓쳤다 다시 물었으니 쥐가 치명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치명상을 입은 쥐가 자연스럽게 죽는 것이다. 그렇대도 쥐의 사체는? 그대로 세탁기 밑에? 혼자서 세탁기를 들 수도 없을 텐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졌고(아마 산전수전 다 겪어서인 듯), 일단 욕실 문을 닫고 잠이나 자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럼 최소한 쥐가 나와서 돌아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잔디밭에 누워있는 뭉치 포스가 제법 강렬하네요. ㅎㅎ

처음엔 욕실에 들어가지도 못할 줄 알았는데, 다음날이 되니 의외로 자연스럽게(?) 화장실을 이용했다. 하지만 만약을 대비해 안방 문은 꼭 잠갔다(안방으로 들어가는 것만은 막고 싶어서). 사건은 다행히도 이틀 후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쥐가 죽은 채로 세탁기 밖으로 살짝 나와 있었던 것. 마지막 가는 순간에는 그래도 나를 배려해(?) 옆으로 나와 죽어있었다. 배에 치명상을 입은 채로. 뭉치가 보기 전에(다행히 집에 없었다) 얼른 마당에 묻어주었다. 묻으면서 뭉치에게 쌍욕을 날려본다. '에잇~ 이넘의 꼴통쉐끼' 나는 뭉치가 다음 생에는 쥐로 태어나기를 기도한다. 쥐로 태어나서, 너도 한번 고양이한테 콱 물려 죽어 보라는 의미에서. 


테이블은 싸복이 남매의 고정석이었는데, 이제는 뭉치가 더 좋아하네요. ㅎㅎ

이제 새로운 불안이 생겼다. 내가 자는 사이 뭉치가 죽은 쥐를 물고 와 내 옆에 쓰윽 갖다 놓는 장면을 상상한다. 생각만 해도 오싹하지 않은가.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침대에 죽은 쥐가 떠억.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얼마 전엔 뭉치의 새끼인 길냥이 심이가 평소에 뭉치가 물어오는 쥐보다 훨씬 빅사이즈의 쥐를 물고 가는 것을 보기도 했다. 또 이틀 전에는 다른 새끼인 쿵이가 사람 손바닥보다 더 큰 두더지(로 추정되는) 생명체를 물고 가는 걸 보았다. 저걸 보고 나니 불안은 더해졌다. 어쩐다. 저렇게 큰 쥐를 물어오면 어쩌지. 이러다 아침에 눈 뜨면 두더지 시체를 봐야 하는 거 아니야.


행복이는 나무 타는 고양이가 그저 신기합니다.ㅋㅋ

내 얘기를 들은 우리 알바생이 말한다. '쌤~ 정말 대단하세요. 저 같으면 정말 못 살았을 것 같아요.'라고. 나는 뭉치와 함께하며 마음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아마도 뭉치는 하느님께서 '인생 공부하라는 차원에서' 나에게 보내주신 고양이가 아닌가 싶다. 싸복이 남매와 뭉치와의 일상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사건들의 연속이다. 삶은 기대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그때그때 생기는 사건들을 온몸과 마음으로 맞으며(?) 적절하게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 그렇게 내려놓고 받아들이는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배운다.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지 않겠는가. 내가 들인 고양이를 물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불가사의한 것은 그래도 여전히 나에게 뭉치는 예쁘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너무 예쁘다(내가 미친년이다).


오늘 아침엔 간식 먹는데 바로 코 앞에서 나름(?) 교태를 부리네요. 예끼 이 녀석, 다 필요 없고 이제 쥐 좀 그만 물어와라.

내일은, 일주일 후 한 달 후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어느 날 아침에 눈 뜨자마자 생쥐 아니라, 두더지 사체를 마주하게 되더라도, 나는 결코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뭐, 그럴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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