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C 도산 안창호 패밀리 하우스
나는 당당히
이 땅의 주인이라고 말 할 수 있는지
때론 한 공간에서 다른 시간대를 살았던 삶을 들여다 본다.
City of Stars. 이제는 라라랜드가 더 익숙해진 LA에서 가장 신기했던 것이 도시 곳곳에서 눈에 띄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이름이었다. 안창호 선생의 이름을 딴 우체국과 도로가 도심 한가운데 있다.
심지어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 (USC) 캠퍼스 안에는 아예 <도산 안창호 패밀리 하우스>가 자리잡고 있다.
학생들이 평화롭게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남캘리포니아 대학에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의 집이라니, 대체 무슨 일일까?
실내는 크진 않지만 안창호 선생의 활동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제법 있다. 실제로 선생은 이 곳에서 살지 않았고 가족들이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그 역사적인 가치를 되새겨 한국학 연구소로 함께 쓰인다.
이것은 처음 봤을 때 너무나 의아해서 심지어는 초현실적으로 느껴진 사진이다. 캘리포니아의 한 오렌지 농장에서 어깨에 한 가득 오렌지를 따고 있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모습이다.
일제시대 한국 독립 운동가와 캘리포니아 오렌지라니!
이쯤되니 고등학교 이후 망각으로 사라진 한국사의 한 페이지가 심히 궁금해졌다.
1902년, 안창호 선생은 부인과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다음 날, 인천항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유학길에 올랐다.
이게 웬 요즘 시대 커플 이야기인가 싶지만 조국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는 교육제도에 대한 제대로 된 공부가 필요하단 생각에 유학을 결심했다고.
당시 민족의식을 말살하려고 창씨개명까지 일삼았던 식민 치하에서는 구국을 위한 공부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쉽지 않았을 상황이 짐작된다.
그렇게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지만 당연하게도 언어의 문제에 봉착했고, 그는 25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부터 들어갔다고 한다. 보통 모진 마음이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정작 그 곳에서 그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샌프란시스코 한인 동포들의 삶이었다. 무려 100년 전, 낯선 땅에서 나라도 없고 말도 못하는 한인들의 삶이 얼마나 참담했을지는 상상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때문에 선생은 현지 한인들의 일자리와 정당한 임금을 위해 발로 뛰고 조직을 결성하고, 스스로도 미국 가정의 가사고용인으로 취업을 했다.
또한 한인들이 집을 더럽게 관리해서 임대를 꺼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일이 동포들의 집을 방문해 화장실 청소부터 커튼 달기, 창가에 꽃화분 심기 등 주변을 청결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일부터 시작해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도 직접 시범을 보이며 "오렌지 하나를 따더라도 정성껏 제대로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일깨웠다고.
그러니까 이 오렌지를 따는 사진은 단순히 오렌지를 따는 노동 현장을 포착한 것이 아니었다.
말로만 가르치고 오더를 내리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몸소 가장 밑바닥부터 본보기를 보이고 근본부터 차근차근 다지려한 실천하는 지도자이자 교육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통받는 자국민들과 삶을 함께하며 그 마음을 어루만지고, 고민하고, 기본을 다져나간 지도자의 상징인 것이다. 그래서 오렌지를 따는 안창호 선생의 사진은 백마디 말보다 강한 메세지를 지닌다.
아래는 1925년, 동아일보에 실린 [주인(主人)인가 여인(旅人)인가]의 글이다.
오늘 대한사회에
주인 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자기 민족사회가
어떠한 위난과 비운에 처했든지
자기의 동족이
어떻게 못나고 잘못하든지
자기 민족을 위해
하던 일을 몇 번 실패하든지…
자기의 지성으로
자기 민족의 처지와 경우를 의지하여
그 민족을 건져 낼
구체적 방법과 계획을 세우고
그 방침과 계획대로
자기 몸이 죽는데까지 노력하는 자가
그 민족사회의 책임을 중히 알고 일하는
주인이외다
1925년에 당신은 과연 진정한 이 나라의 주인인지 묻는 글인데, 왜 현재를 사는 내가 뜨끔한건지. 나는 내가 속한 사회를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노력을 해 본 적이 있던가. 주인이 아닌 불평하고 방관하는 여행자의 삶을 살았구나.
안창호 선생은 1926년, 조국을 구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도산 뿐이라는 동포들의 설득과 강권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미국에 두고 결국 귀국을 한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 길이었다.
이것은 선생이 바다건너 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괴로운 환경일수록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공부가 필요할 거다' 라며 맨 왼쪽 구석에 작별 인사로 건넨 말이,
언제든지 킵 스마일
1920년대 독립운동가 아버지가 자식에게 마지막으로 전하는 작별 인사가, 언제든지 킵 스마일이다. 구구절절 감성적인 말 한마디 없지만, 나라도 없고 아버지도 없는 타국에서 삶을 살아갈 아들이 언제나 긍정적이고 담대하길 바라는 아버지의 진심이 느껴진다.
이렇게 눈부신 캘리포니아에서 가족도 두고 태평양 너머 차가운 식민지 고국으로 돌아가는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때도 캘리포니아의 하늘은 이렇게 청명하고, 햇살은 따사롭고, 평화로운 음악이 멈추지 않았을 텐데
저물어가는 석양을 보며 무럭무럭 커가는 자식과 사랑하는 부인과 아무일 없다는 듯 오렌지를 따며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누구라도 그 선택이 쉽지 않았겠지.
나라면 어땠을까.
결연하게 나라의 주인이 되었을까,
캘리포니아의 방관자로 남았을까.
같은 공간에서 같은 해를 바라봤을 한 사람의 신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석양이었다.
[LA 코리아 타운]
LA 중심부에 위치한 코리아타운에선 LA시당국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업적을 기념하며 이름 붙인 '도산 안창호 우체국'과 '도산 안창호 인터체인지'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