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로라 관측의 1번지, 옐로나이프
옐로나이프는 독특한 시간표에 의해 움직이는 도시다. 해가 떠 있는 낮시간에는 텅 빈 도시처럼 인적이 드물고 한산하다. 너무 추운 기온 때문에 분주하게 돌아다니지 않는 탓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정오까지 잠을 청하거나 저녁까지 휴식을 취한다.
그러다 차츰 해가 기울고 선셋이 다가올수록 도시 전체가 기지개를 펴고 절전모드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신발끈을 동여 매고 옷매무새를 다지며 결의에 찬 출정을 준비하듯 분주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마침내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고대하던 옐로나이프의 밤이 찾아온다. 그와 동시에 낮 동안 다들 어디에 있었던걸까 싶은 인파가 쏟아져 나오며 인산인해를 이룬다. 깜깜한 어둠과 함께 이 도시의 가장 붐비고 활기찬 시간이 찾아왔다.
낮엔 잠들고 밤엔 깨어나는 이상한 도시, 옐로나이프의 하루다. 이 도시의 모든 시계와 동선은 오로라가 지배한다.
북위 62도, 사람이 살고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한 얼어붙은 북방의 오지는 오로라 인더스트리가 육성되고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대동강 물을 돈을 받고 팔았다는 봉이 김선달이 이러했을까. 흔적도 없고, 실체도 없고, 랜드마크가 있는 것도 아닌 하늘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오로라로 산업을 만들어가는 도시. 그것이 내가 본 옐로나이프다.
# 옐로나이프의 오전
이 도시에선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하늘을 보는 것이다. 맑은가 흐린가, 구름이 꼈나 안개가 꼈나 눈이 오나. 옐로나이프에선 모두가 수시로 하늘을 본다.
구름 낀 밤엔 선명한 오로라를 보기 힘들고, 눈이 오면 아예 가능성이 없으며, 날이 쨍하고 밝으면 오로라 레벨이 신통치 않아도 오로라를 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때문에 날씨가 맑으면 아침부터 도시 전체에 생기가 돋고 신바람이 난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낯선 사람들끼리도 서로 축하의 눈빛을 주고 받는 듯하다. 반면, 날씨가 흐리면 거리는 착 가라앉고 조용해진다. 하늘의 표정이 사람들의 표정을 좌지우지하는 도시다.
거리 곳곳에선 오로라 등대가 그날그날의 오로라 레벨을 알려준다. 파란색이면 오로라가 없이 조용한 하늘이고, 빨간색이면 오로라 폭풍이 부는 날이다. 다들 아침이면 등대 앞으로 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불빛을 확인하고, 설마하는 마음으로 하루종일 오가며 재차 등대를 확인한다.
# 옐로나이프의 오후
옐로나이프 공항에 처음 도착한 사람들은 가장 먼저 방한복부터 대여한다. 눈밭에서 오로라를 보는 겨울 밤은 영하 30도 이하, 체감온도 영하 50도까지 이르는 극한의 추위이기 때문에 왠만한 겨울 코트로는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올드 타운의 상점에서는 아예 유명한 방한복 브랜드 <캐나다 구스>를 판매한다. 커버 가능한 온도에 따라 레벨 5까지 나뉘어져 있는데 마지막 레벨5가 영하 30도 이하 용이다. 방한복의 본토답게 굉장히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어서 늘 문전성시를 이룬다.
상점 앞에 마을 이벤트가 있는지 동네주민들이 잔뜩 모였는데, 마치 캐나다구스의 전시장을 방불케하는 모습이다. 한국에선 값비싼 럭셔리 브랜드일지 모르지만, 이 곳 옐로나이프에선 생존을 위한 주민들의 생활복이다.
올드타운의 입구엔 그레이트 슬레이브 호수가 있다. 전체 규모가 남한의 3분의 1 크기에 이르고, 겨울이면 2m 두께로 얼어서 거대한 얼음 평원을 형성하는 어마어마한 호수다. 때문에 캐나다 북부 옐로나이프에서 중부 에드먼튼까지 운송해야할 화물은 주로 겨울동안 얼어붙은 호수를 차로 가로질러 옮긴단다. 나머지 계절엔 거대한 호수 가장자리를 빙 둘러가야 해서 이동량이 몇 배로 걸리기 때문이란다.
호수 주변의 집들은 B&B를 운영하고 있다. 호숫가 근처는 깜깜한 밤이 되면 불빛이 없기 때문에 오로라를 잘 볼 수 있어 다운타운의 호텔들보다 B&B에 머물며 셀프 오로라 관측을 하는 여행자들이 많다.
호수 위에는 여행자들이 낮동안 심심할 것을 염려했는지 얼음성을 만들어놨다. 극도로 낮은 온도와 무거운 방한복, 방한화 때문에 좀비처럼 어슬렁거리는 여행자들이 간간히 얼음조각을 구경한다. 워낙 추워서 사진 찍는 것도 퍽 성가시게 느껴지는 곳이다.
호수 주변 식당들에선 전날 새벽까지 이어진 오로라 관측으로 느지막하게 일어나 끼니를 먹으려는 사람들로 줄이 길다. 호수에서 잡아올린 커다란 물고기들이 눈길을 달려 마당에 속속 도착한다. 왠만한 성인 남자 허벅지만한 물고기들이다. 갓 잡은 신선한 생선을 튀겨 만든 피쉬앤칩스가 이 곳의 인기 메뉴다.
적극적인 여행자들은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해 설피를 신고 눈밭을 걷는 스노우슈잉이나 개썰매를 타고 설원을 달리는 체험을 하며 낮시간을 보낸다. 그래도 시간이 안 가면 숙소에서 체력을 아끼며 해가 지기만을 기다린다.
# 옐로나이프의 밤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전세계에서 몰려든 여행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온갖 언어와 함께 조용하던 옐로나이프가 파티장같이 변한다.
옐로나이프에서 오로라를 보는 방법은 크게 3가지가 있다. 나홀로 셀프 관측, 소그룹의 오로라 차량 헌팅, 기업 형태의 오로라 빌리지 등 이다. 그 중 가장 큰 규모인 오로라 빌리지는 숙소에서부터 관광버스로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국적별로 직원들의 안내를 따라 버스를 나눠 타고 빛 하나 없는 어두운 북극권의 밤길을 30분 이상 달려간다.
오로라 빌리지에 도착하면 국적별로 티피를 배정받는다. 티피는 원주민들의 전통 주거형태를 말하는데, 오로라가 뜨기 전 쉴 수 있는 휴게소 역할을 한다. 불빛과 함께 어우러진 모습이 무척이나 낭만적이다. 빌리지 스토어에선 삼각대를 대여해 주고 오로라 사진, DVD같은 상품들을 판매한다. 그러다 오로라가 뜨기 시작하면 티피 앞 쪽으로 긴 줄이 생기며, 오로라와 함께 사진 촬영 서비스가 시작된다.
어찌보면 재미있다. 옐로나이프 도시 어디에서든 오로라는 똑같이 볼 수 있다. 호숫가의 B&B는 물론이고, 심지어 다운타운 호텔 방 안에서도 볼 수 있다. 그냥 길 위에서도, 식당 앞에 줄을 서서도, 고개를 들어 머리 위 하늘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곳이 옐로나이프다. 달과 별, 해처럼 그저 머리 위 하늘에 뜨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비롯한 이 많은 사람들이 돈을 내고 굳이 빌리지에 와서 본다. 동화처럼 환상적인 티피때문에 전설의 존재같은 오로라를 더 드라마틱한 분위기에서 감상할 수 있어서인 걸까. 아니면 자칫 못 보고 돌아갈 수도 있는 오로라를, 이렇게라도 돈을 지불하고 어딘가에 몰려있으면 꼭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인걸까.
옐로나이프. 마치 트루먼쇼의 도시처럼 도시 전체가 오로라를 중심으로 하나로 맞물린 스케줄과 동선으로 돌아가는 곳이다. 이 곳을 다녀간 여행자가 죽는 날까지 두고두고 추억할 가장 아름답고도 매력적인 장면을 만날 수 있도록 모든 자원을 동원하는 도시라 말할 수도 있겠다. 그것이 세계 1번의 오로라 관측 도시, 옐로나이프의 오로라 산업이자 북극권의 도시가 살아가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