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야를 향해가는 알래스카 크루즈
세상에 낭만적이기도 하지.
이 배 안에선 우리 모두 고립됐다.
어느덧 새벽 2시,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자니 미세한 출렁거림이 느껴진다. 창밖을 보니 벌써 하늘이 환하다. 일출까지는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백야에 접어든 알래스카 크루즈의 밤이다.
크루즈는 지루하고 나이든 사람들의 여행방식이라는 선입견을 주워들은 탓에 몇 번을 망설이다 떠난 알래스카행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로 둘러싸인 열흘을 보내는 거 아닌가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승선지인 시애틀 항구에 도착했다.
청명하게 파란 시애틀 푸짓사운드에 떠 있는 하얀 루비 프린세스호의 자태를 보는 순간, 심드렁하던 마음은 흥분과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수 천명의 사람들이 배에 올라타기 위해 상기된 얼굴로 속속 항구에 도착했고, 선사 직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승선객들의 짐을 옮겨 실었다.
높다란 계단을 올라 배 안에 들어서자, 눈 앞에는 하나의 도시가 펼쳐졌다. 극장, 영화관, 도서관, 미용실, 면세점, 펍, 까페, 레스토랑, 수영장, 카지노, 헬스, 뷰티살롱... 크루즈는 단순히 이동 수단이 아닌, 바다 위를 떠가는 완벽한 하나의 독립된 사회였다.
호기심 속에 이곳 저곳 탐방하며 하루를 보낸 후, 몇 가지 흥미로운 포인트를 발견했다.
첫째는, 이 배 안에선 <모두가 고립됐다>는 점이다. 지구 반대편으로 휴가를 가도 급한 자료를 찾는 팀원의 메세지가 오는, 연결의 시대 아닌가. 그런데 망망대해 위의 단절된 공간에 수 천명이 함께 올라타고 수 일간 한없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독특한 공간인 것이다.
그 안에서 서로 마주치며 낯익은 얼굴도 생기고 교류도 하고, 매일 저 테이블에 나타나는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상상도 하며 바다를 통과한다.
이것은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에 나오는 인디언섬이나 오리엔탈 특급열차 같은 무대에 들어선 경험이었다. 혹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모여든 투숙객들 같기도 했다. 고립되고 폐쇄된 무대에서 느낄 수 있는 묘한 소설적 낭만과 스릴이 크루즈여행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지난 세기의 기차 여행이나, 이제는 20세기 소설에서나 맛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상상력을 자극하는 공간. 게다가 그 곳이 한밤에도 해가 지지않는 백야의 알래스카 내해라면 그 환상적임이 배가 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또 다른 흥미로운 포인트는 <규칙>이었다.
크루즈만의 특별한 전통적인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에 따라 모든 승객이 함께 행동하는 즐거움이란게 있었다.
크루즈는 기본적으로 휴식을 위한 장소이기 때문에 모두들 헐렁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배 안 곳곳에 흩어져 각자의 망중한을 즐긴다. 따뜻한 태양 아래 바닷바람을 맞으며 꿀잠을 자거나, 넋 놓고 바다를 바라보거나, 먹고 또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
모든 나사를 한껏 풀고 릴렉스하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풀어졌다 싶을 때, 바로 규칙이 등장한다. <포멀 나이트> <에프터눈 티타임> <선장의 기념식> 같은 것이다. 이 시간이 되면 모두가 제대로 정장을 갖춰 입고, 신사 숙녀답게 예의를 지켜 식사를 하고 파티를 하며 저녁을 보낸다.
크루즈 여행이 럭셔리 여행이란 이미지를 갖게 된 데는 이렇게 드레스를 갖춰입고 찍은 장면이 주로 미디어에 등장한 탓도 있다.
실제로 보면 그 극과 극의 풍경을 오가는 간극이 꽤나 재미있다. 오후 내내 갑판 위에 추리닝을 입고 누워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피플지에 나오는 셀레브리티가 아카데미 시상식이라도 가는 양, 드레스를 갖춰 입고 화장을 하고 나비 넥타이를 달고 한 자리에 모인다.
그리고는 자기들도 재밌어 죽겠다는 듯 갖은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으며 화기애애 밥을 먹는다.
마치 대학생들이 다 함께 교복을 꺼내 입고 클럽을 가는 교복 데이라던가, 할로윈, 연말 모임 등에 특별한 드레스코드를 만들어 이벤트적인 재미를 즐기는 것과 비슷하다. 과시나 허영보다는 다른 이동 수단과 다른 크루즈만의 재미로 행하는 전통인 것이다.
매일 집에서 보는 가족끼리도 오랜만에 서로 정장을 갖춰입고 그림같은 배 위에 마주 앉아 정찬을 즐기다 보면 낯선 매력과 긴장, 설렘이 느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완과 긴장을 오가는 여행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즐거움은 역시 이 모든 것의 배경에 항상 등장하는 바다다. 잘 때도, 먹을 때도, 운동할 때도 눈 앞에는 넘실대는 바다가 있다. 해안가의 얌전하고 예쁜 바다가 아닌, 그 안에 뭐가 들어있을 지 모를 거대한 대양 한가운데 넓다랗게 몰아치는 '진짜' 바다다.
그 아름답고도 두려운 야생적인 바다를 보고 있자면 육지에 두고 온 현실이 꿈처럼 아득하다.
바다 위에서 잠들고 바다 위에서 눈 뜨는 일주일. 수평선 너머로 뜨고 지는 해와 달과 별은 색다른 아름다움을 지녔다. 어미와 새끼가 함께 바다를 지나는 고래떼를 만나는 것은 덤이다.
배에 오르기 전 크루즈 여행은 지루하지 않을까 했던 우려 따윈 저멀리 수평선 너머로 싣고 가는 고래들이다.
아,
이 배에서 내리고 싶지 않아..!
그 바다를 향해 외친 한 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