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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 Sep 21. 2016

얼음 호수 위에서 오로라를 낚는 밤

@ 북위 62도 캐나다 옐로나이프


북극권과 맞닿은 북위 62도의 밤은 극한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몹시 낭만적이었다. 하얗게 얼어붙은 호수는 보름 달빛을 반사해 은빛의 평원과도 같았고, 그 한가운데 낚시 의자를 펼치고 담요에 싸여 밤하늘을 바라본다.


오로라를 기다리는 밤이다.



캐나다 노스웨스트 준주의 주도, 옐로나이프는 청명한 날씨와 시야를 가릴 것 없는 평평한 지형으로 세계에서 오로라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지역 중 하나이다. 이 곳의 한 겨울은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는 위험천만한 추위와 오후 3시면 캄캄한 어둠이 시작되는 진정한 밤의 왕국이지만, 바로 그 밤을 만끽하기 위해서 전 세계의 여행자들이 몰려든다.



고요한 호수 위에 앉아 더 고요한 밤하늘을 들여다보는 시간. 마치 밤낚시를 하듯, 오로라를 기다리는 것은 밤을 응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칠흑같은 어둠인 줄 알았던 밤하늘은 자신의 화려한 실체를 거침없이 보여준다.



소설책에서나 읽었던 달무리가 거대한 관람차처럼 하늘 위에 광활한 원을 그리며 떠있다. 보름이 가까워진 달은 인공적인 불빛이 없는 이 땅의 절대자다. 온 천지를 낮처럼 밝히는 달의 위대함을 마주하고 나면 과거 이 땅의 인간들에게 개기월식이나 레드문 같은 것이 얼마나 극악스러운 공포였을지 느껴진다.



달만이 아니다. 잊고 살았던 거대한 북두칠성이 머리 위에 떠 있다. 전래 동화 <북두칠성이 된 일곱형제>를 읽고 밤마다 하늘을 바라보며 잠들던 어린 시절이 아득하게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놀랍도록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옛이야기다. 이제는 차라리 전설 속의 이름이 돼 버린 시리우스니 오리온 대성운이니 하는 별들 역시 총총히 눈 앞에 자신들이 여전히 실재하는 밤의 구성원임을 드러내며 하늘 위에서 빛난다.



오로라를 보겠다고 이 춥고 멀고 어두운 땅에 왔는데, 잊고 있던 밤의 황홀함을 동심처럼 되찾아들고 가는구나.

까짓거 오로라를 보지 못해도 이만하면 참 좋다 싶었다. 실재하지 않는 괴물 네쉬를 핑계로 네쉬호를 가듯, 상상의 존재 설인의 흔적을 찾아 얼어붙은 겨울왕국을 가듯, 오로라란 이 환상적인 밤을 만나러 길을 떠나게 해주는 전설의 미끼같은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런 생각을 할 때 쯤, 하늘 저편에서 이상한 낌새가 스멀스멀 감지됐다. 분명 별빛이 초롱초롱한 청명한 밤하늘이었는데 한쪽 구석에서 하얀 구름같은 것이 소리없이 빠른 속도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구름은 눈 깜짝할 새, 훨씬 농도 짙고 분명한 하얀 강줄기로 바뀌어갔다. 드넓은 밤하늘에 갑자기 거대한 빛의 강이 흐르기 시작했다. 오로라다!



오로라는 흔히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짙은 초록의 '커텐' 형상이 무지개처럼 하늘에 척 걸쳐 있는 것이 아니다. 멈춰 있는 정적인 한 장면이 아니다. 지구의 것이 아닌 무시무시한 우주의 속도로 살아 움직이는 빛의 흐름이다.



따뜻한 물 속에서 급속히 퍼져나가는 잉크액처럼, 정신없이 놀던 갯벌에서 순식간에 발밑까지 치고 들어오는 밀물처럼, 장마에 터져버린 제방 사이로 솟구쳐 오르는 강줄기처럼, 광활한 밤하늘의 끝에서 끝까지 엄청난 속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의 범람이었다.



그리고 그 빛은 쉬지않고 계속해서 형상을 바꿔간다. 때론 찌릿찌릿 날카로운 전기충격처럼, 때론 램프의 요정 지니의 몽글몽글한 구름처럼. 아름답고도 우아하지만 동시에 무지막지한 속도와 하늘을 뒤덮는 압도적인 규모에 전 세계에서 모여든 여행자들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댔다.


으아아-아아악!!

생전 처음 경험하는 생경함인 것이다.



우주의 살아있는 생물을 마주한 것 같은 경이로움. 그것이 내가 살면서 처음 목격한 오로라의 인상이다. 모든 것이 내가 상상했던 그 이상이었다. 지도에서 선뜻 찾기조차 힘든 옐로나이프란 도시에 날아오기 전, 수없이 상상하고 예상하고 짐작했던 모든 것들이 그저 내 경험의 울타리 안에서 급조된 것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우주가 선사하는 밤의 뤼미나리에는 자정을 넘어 새벽까지 계속되었고, 보는 내내 마음속으로 되새김질했다. 자만하지 말아야지. 그 어느 것도 안다고 자신하지 말아야지. 모든 전설은 실재할지 모른다, 아직 내가 가보지 못한 모든 땅 위에서. 용도, 빅풋도,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다. 



오길 잘 했다. 밤의 호수.
내 머리 위의 우주를 만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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