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캘리포니아 불의 고리 위에서
새벽 1시쯤, 혼자 거실에서 음악을 들으며 컴퓨터를 보는데 몸에 갑작스런 현기증이 느껴졌다. 배멀미같기도 하고 알-딸딸하게 취했을때 몸이 땅으로 쏠리며 빨려드는 느낌이었다. 빈혈인가 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봤지만 여전히 출렁출렁 어질어질-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창문 버티컬이 조용히 흔들리고 부엌 조명이 푸코의 진자처럼 나란히 왔다갔다하네. 순간 온 몸에 전류가 흐르듯 소름이 끼쳤다.
'아- 올 것이 왔구나!'
내 생애 첫 지진이었다.
그래, 내가 불의 고리 위에 살고 있었지
잠시 책상 밑으로 몸을 숨길 것인가 고민도 했으나 몇 십초 후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빠르게 지역 SNS들을 검색해보니 역시나 팜스프링스 근처에서 규모 5.1의 지진이 있었다네.
그렇지 않아도 올 봄, 구마모토부터 에콰도르까지 강진이 이어지면서 불의 고리와 환태평양 조산대가 연일 미디어에서 화제였다. 내가 있는 캘리포니아 또한 수개월 안에 초대형 지진이 올 수 있다는 경고도 빠지지 않았다.
알려진 대로 이 곳 캘리포니아는 대표적인 불의 고리 위의 지역으로 도시 곳곳에서 과거 대지진의 흔적과 지각 변동에 대한 대비를 목격할 수 있다.
평소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신경이 오소소 일어서며 당장 내일 땅이 갈라지고 바다가 덮치는 거 아닌가 온갖 재난 영화가 머릿속에 펼쳐지곤 하는데
당장 지진이 일어나고 천지가 뒤집어진다고 생각하니 오늘 하루가, 이번 한 주가, 이 한 달이 더 없이 중요한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란 생각이 들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도 떠오르고 ^^
그럼 이 소중한 시간에 난 무엇을 하지? 오늘 당장 뭘 해야 할까? 마음이 초조해지면서 노트에 당장 꼭 해야할 것들, 해보고 싶은 것들을 주욱 적어보았다.
한마디로 불의 고리 위에서 산다는 것은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그 자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메멘토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 -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란 뜻의 라틴어로 인간의 삶 속에 늘 죽음이 깃들어 있음을 인식하고, 인간의 유한성을 매 순간 기억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생을 더욱 가치있고 진실되게 살고자 하는 의미다.
바로크 시대 미술 곳곳에서 뜬금없는 해골 이미지가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 메멘토모리의 세계관이다.
때문에 <메멘토모리 - 죽음을 기억하라>는 종종 <Carpe Diem - Seize the day -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해라>와 유사한 의미로 통한다.
그렇게 내 생각들을 노트에 정리하다 보니 놀랍게도 나는 현재의 내 삶에 만족감이 꽤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 딱히 뭔가를 꼭 해보고 싶다는 미련이 별로 없고 그저 지금처럼 담담하게 일상을 살 것 같다.
다만 한 가지, 강렬한 욕구를 깨닫게 됐는데 나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것을, 나란 사람의 흔적을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더 열심히 남겨야겠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글을 쓰고 그 글을 혼자만의 공간이 아닌 많은 사람들과 공유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것을 보고 느꼈던 사람이 세상에 있었단 흔적을 남겨야겠다는 마음. 그래야 내가 이 세상에 왔다간 의미가 있지않나.
참 재미있는 일이다.
살면서 나는 늘 내가 뭘 하고 싶은 사람인지, 어떤 우물을 파면 좋을지, 어떤 일을 하면 잘 할지, 무엇이 적성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었다. 하지만 딱히 알지 못한 채 흘러가는 대로 회사를 다니고, 일상을 살고, 나이를 먹었는데, 불의 고리 위에서 살아보며 당장 언제든 내 삶의 마지막 순간이 될지 모른단 생각을 하자 가장 하고 싶은 것이, 글쓰기인 것이다.
그래서 이 글들을 쓰기 시작한다.
지금을 살며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며 내가 세상에 살아있고, 존재하고 있음을 남겨보고자 한다.
그러니 늘 이렇게 초대형 재난을 염두에 두고 매 순간이 삶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지역 사람들은 삶을 대하는 자세나 가치관이 좀 다를지도 모르겠다. 성공, 돈, 미래.. 같은 것들 보다 좀더 본인이 인생에서 꼭 하고 싶은 것에 열렬히 매진하고,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즐겁게 살려고 노력할 거란 것.
그것이 이 곳에서 오늘 하루를 보내는 나의 마음이다.